〈 198화 〉198. 협상 테이블(1)
타악!
“크윽!”
서로의 목검이 교차하고 튕겨진 가운데,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다음의 행동으로 나간 것은 에린이다.
의도적으로 튕겨나간 목검을 쥐고 있는 팔에 힘을 싣고, 다리를 축으로 전신을 한 바퀴 회전시켜 상대방의 관자놀이에 돌려차기를 꽂아 넣는 에린의 공격.
‘똑같은 공격에 몇 번이고 당할 줄 알고…!’
에린과의 첫 대련에서, 호기롭게 첫 번째 순서로 나섰다가 에린에게 깨지는 수모를 당했던 마르탄은 코웃음을 쳤다.
첫 대련에서 방심 끝에 순식간에 패배하는 쓰라린 경험을 맞보았지만, 마르탄 또한 공작가문을 섬기고 있는 남작 귀족의 자제이며, 아이테르를 상위 성적으로 졸업한 기사다.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관자놀이를 보호하고, 에린의 발차기를 막아냈다.
“크….”
완벽하게 막아내었다고 생각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전력이 가미된 묵직한 타격에 마르탄의 몸이 살짝 옆으로 밀려났다.
하체에 힘을 실어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억지로 버텨내고, 발에 땅을 딛고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에린의 한쪽 다리를 걷어찼다.
“엇.”
순식간에 에린의 양다리가 허공으로 떠올라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을 확인한 마르탄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기….’
억지로 빈틈을 만들어내어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지은 회심의 미소.
허공으로 떠오른 그녀의 옆구리에 목검을 가격하여 승리를 따내려 했지만, 허공에서 억지로 허리를 비틀면서 목검을 쥔 팔을 휘둘러 마르탄의 목검을 쳐냈다.
“뭣…!?”
공중에서 행해진 에린의 기예로 자신의 공격이 막혔다는 것에 마르탄이 적잖이 당황한다.
“읏…차!”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한에린이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마르탄을 향해 몸을 일으키며 돌진했다.
“크…!”
순식간에 접근해오는 에린의 돌진에 마르탄이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그녀와의 거리를 벌리면서 다시 태세를 정비하려 했지만, 속도가 붙은 에린의 돌진이 막 뒷걸음질을 치는 마르탄의 속도보다 더 빨랐다.
에린의 장기중 하나인 빠른 찌르기를 통해 마르탄의 목에 겨누어지고, 마르탄은 미처 대응하지 못한 자신의 검을 손에서 놓고, 패배를 시인해야만 했다.
“…졌어.”
이번이 두 번째 패배인 마르탄의 표정이 정말로 분하다는 것을 표현해주며 인상을 찡그렸지만, 에린은 그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겼다! 드디어 5연승이야!”
“…날 이긴 게 그렇게 좋냐?”
승리에 도취되어 제자리에서 방방 뛰어 온 몸으로 기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10대의 소녀다.
에린이 기뻐하고 있는 이유가 자신을 이겨서라는 것이 마르탄에게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네? 아, 현이가 기사님들하고 대련에서 5연승을 채우면 선물을 주겠다고 했거든요!”
딱히 자신을 쓰러뜨린 것으로 기뻐하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나이 어린 소녀에게 두 번이나 패배했다는 쓰라린 경험이 절대로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에는 꼭….’
마르탄은 아르미타스에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 서약을 맺으면서 생긴 자신의 첫 번째 목표를 눈앞의 어린 소녀를 이기는 것으로 정했다.
“헤헤, 현이가 도대체 무슨 선물을 주려는 걸까?”
그러기 위해선 일단 상대를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우습기 짝이 없는 핑계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고, 마르탄은 헤실헤실 웃으며 잔뜩 들떠있는 에린에게 말을 걸었다.
“에린, 이 다음에는 따로 일정이라도 있어?”
“네? 아뇨? 딱히….”
“혹시 괜찮다면, 이후에 같이 밥이라도….”
“자! 대련에서 진 사람들은 모두 모여!당장 패널티를 수행한다! 빨리 빨리 모여서 끝내고 쉬어야하니까 어서 모여!”
“…젠장.”
우렁차게 외치는 선임기사의 목소리에 마르탄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은현이 훈련장에 와서 교관으로써 기사들을 교육하면서, 훈련 종료 전에 시행되는 대련은 이젠 하나의 일과로 정착한 상태였다.
대련에서 승자는 그대로 퇴근을, 패자에게는 은현이 손수 제작한 무게 조절 기능이 들어간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달리기를 통해 2km의 거리를 채워야 하는 패널티가 부과된다.
그 지옥같은 경험을 다시 해야 하는 마르탄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가고 있다.
“응? 무슨 말씀 하셨나요?”
너무 기뻐서 마르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에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무것도 5연승 축하해.”
“헤헤. 감사합니다!”
호의가 섞인 마르탄의 축하에 에린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기사님들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그래! 아가씨도 들어가 쉬라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종종걸음으로 훈련장을 나가는 에린의 뒷모습을 보고, 아르미타스 기사들이 미소 지으며 소녀를 배웅했다.
“이야. 정말로 활발한 아가씨지.”
“그러게 보는 내가 다 훈훈하네.”
은현과 함께 처음 훈련장에 왔을 때만 해도, ‘저건 대체 뭐하는 것들이야?’라는 의문을 가진 표정으로 에린을 바라보는 기사들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사도 아닌, 미성년자의 나이어린 소녀가 살벌한 남정네들 사이에서 고된 훈련을 견디면서, 다 죽어가는 기사들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에린을 반기면 반겼지, 결코 배척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 갓 아이테르를 졸업한 비슷한 나이 또래의 신입기사들 중에는 에린의 건강한 미소에 반 즈음 홀린 듯 소녀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까지있었다.
“자! 빨리 빨리 하고 쉬러 가자고!”
기사들은 기운찬 목소리와 함께, 또 하루의 훈련 일과를 마무리 짓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 ◆ ◆
“당신…이었군요. 치료제를 개발한 사람이….”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실리아님.”
은현은 자신과 마주한 세실리아를 보고 인사를 건 냈다.
“별로 놀라지는 않으시네요. 제가 찾아온 것에 대해서.”
“그야 올 줄 알고 있었으니까요.”
담담하게 중얼거리던 은현은 세실리아의 방문과 용건을 알고 있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알렉스의 소개로 응접실에서 대면하게 된 상황 속에서, 은현은 알렉스와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것은 은현이 굳이 알렉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세실리아의 공작령 방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따로 돌아갈 것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세실리아는 생각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마나스트림 치료제의 조제법. 공유해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그것에 관한 판단은 이미알렉스에게 맡긴 상태입니다. 알렉스가 명령한다면 세실리아님께 치료제의 조제법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은현의 태도는 굉장히 단호했다.
“지금 마약에 중독된 페르닌의 귀족 자제들의 상태는…갈수록 나빠지고 있어요. 한시라도 치료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신체의 마나 각성을 강제로 활성화시키면서 억제가 되지 않는 방대한 양의 마나는 도리어 육체의 붕괴를 가속화시킨다.
물이 담겨있는 잔에 대량의 물을 부으면 결국 수용 한계를 버티지 못하고 물들이 흘러넘치듯이, 마약에 중독된 학생들의 몸은 내부에서부터 망가져가고 있는 상태였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제를 복용하면서 몸 내부의 붕괴를 막아야하는 긴박한 상황에 세실리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세실리아님.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은현이 만든 치료제의 조제법을 공개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 마약에 중독된 귀족 자제들을 나 몰라라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이죠?”
“정식 루트를 거쳐서 판매를 할 예정입니다.”
“판매…. 치료제로…사람들의 목숨으로 장사를 하실 생각이라는 건가요!?”
“설마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은현.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
“그러지.”
알렉스가 흘끗 바라보며 은현에게 시선을 옮기자,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품속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포션을 꺼냈다.
“이게 이번에 만들어낸 마나스트림 치료제입니다.”
“그게….”
확실히 공작령 출신의 몇몇 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포션과 똑같은 생김새였기에, 세실리아는 은현이 정말로 이 치료제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직시했다.
“세실리아님도 전공분야가 연금학과 약학이시니, 재료로 들어가는 촉매나 약재가 얼마나 값이 나가는지, 알고 계실 겁니다.”
“…네. 알아요.”
세실리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그녀 자신도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많은 양의 약재를 사용한 바가 있기에,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왕가의 예산으로 치료제를개발하는 공공성의 성격을 띄우고 있는 세실리아 쪽과는 달리, 은현과 알렉스는 공작가문의 예산을 이용해서 이 치료제를 만들어내었으니, 공작가의 입장에서도 땅을 파서 치료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에, 판매라는 방식을 취하는 것도 공작가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저는 이 치료제 한 병 당 금화 한 닢으로 거래를 할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치료제 2병의 가격인 금화 두 닢은 거의 일반 병사의 1개월 치에 해당하는 비싼 금액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액수다.
하지만 투입된 재료의 비용과 조제한 사람의 수고를 생각한다면, 그리 비싸다고 생각지도 않을 정도로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가격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치료제를 복용해야 하는 이들은 왕국귀족들의 자제들이기 때문에, 치료제의 값을 지불해야 하는 귀족들의 입장에서도 몇 개월 치의 분량을 한꺼번에 구매하더라도,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치료제를 판매는 언제즈음부터 이루어지나요? 저로서는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아, 그건 좀 문제가 있어서요.”
“…문제인가요?”
“사실 당장 이 치료제를 판매하지 않는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세실리아님이 직접 공작령에 내려오신 이유와도 관계가 있죠.”
세실리아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 페르닌에 이 치료제를 풀게 되면 틀림없이 또 다시 귀족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게 될 겁니다.”
“아….”
마나스트림에 중독된 현상은 은현이 개발한 치료제를 한 번만 복용한다고 곧바로 낫는 가벼운 증상이 아니다.
장기간을 보고 규칙적으로 복용을 시키면서 천천히 상태가 호전되는 것을 지켜보며 경과를 봐야하는 만큼, 소모되는 치료제의 양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다.
생산량은 한정이 되어 있고, 재력이 넘치는 고위 귀족들은 자신의 자녀들의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안정적인 치료제의 물량을 원할 테고, 웃돈을 주고서라도 또는 강제적으로 빼앗는 것으로 치료제를 쓸어 담을 것이 뻔하다.
치료제의 독점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정작 당장이라도 위태위태한 학생들은 제대로 된 시기에 치료제를 복용하지도 못하게 되고 상황은 더더욱 악화된다.
“약을 어떻게든 먼저 확보하기 위해 세실리아님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여 공작령으로 보낸 것부터가 이미 그 의도가 뻔히 보입니다.”
“으으….”
정확히 아픈 곳을 지적당하자, 세실리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귀족이기 이전에, 세실리아는 마약에 중독된 환자들을 가능한 많이 구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은현과 알렉스가 지적한 부분에 동의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세실리아에게는 그렇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도 않는 답답한 상황.
“그럼 어떻게 하실 예정인가요?”
“이곳으로 치료제가 급한 고위귀족들을 부를 겁니다. 그리고 곧바로 협상을 제안할 예정이에요.”
“그런…지금부터 제가 다시 페르닌으로 복귀하고 그분들을 설득하여 이곳으로 데려온다고 하더라도, 그때가 되면 너무 늦어요! 두 분의 우려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제가 책임을 지고 중독된 환자들에게 제대로 치료제가 복용되도록 감독할 테니여기선 저를 믿고 치료제를….”
“그러실 필요 없어요.”
“네…?”
“이미 치료제가 필요한 고위 귀족들에게는 전갈을 보내둔 상태입니다. 머지않아 공작령으로 속속들이 모여들겠죠. 급하면 급할수록 더더욱 빠르게, 치료제가 필요한 귀족들은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습니다.”
“전갈을…도대체 언제…?”
“그건 영업비밀이라고 해두죠.”
이미 은현의 사냥개들로 전락한 흑랑단들을 시켜, 페르닌의 고위 귀족들에게 ‘치료제를 가지고 협상을 하고 싶으니 생각이 있다면 공작령으로 찾아오라.’는 내용이 적힌 전갈들을 보내둔 상태였다.
“아마 내일, 아니면 모래 즈음이면 치료제가 필요한 모든 귀족들이 공작령으로 도착하겠죠. 그리고 그곳에서 귀족들과 협상을 진행할 때, 세실리아님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저한테요?”
“네. 일이 잘 성사된다면, 이 치료제의 조제법을 세실리아님께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세실리아가 흘끗 은현의 시선을 바라보자, 은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했다.
이내 결심을 굳힌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굳은 눈빛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뭘 하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