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197. 영웅들의 술자리(2)
“아마 에린의 앞날은 앞으로도 계속 고될 거야. 폐창고에서 사냥개들과 목숨을 내놓고 벌이는 사투보다도 더.”
“그냥…평범하면서 행복하게 살게 둘 수는 없는 건가?”
“그런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어. 너, 니가 죽은 다음에 에린이 아이테르에서 어떤 취급을 받으면서 살았는지 알아?”
“…….”
엘빈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여동생의 고난을 일일이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어떤 경험을 해왔을지는 대강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심각한 수준이었지. 배임횡령을 저지른 준귀족과 흑마법사의 가족이었으니까.”
“크으….”
그 원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에 엘빈이 신음을 흘린다.
아무리 공개적으로 공작가문의 비호를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학교라는 또 다른 사회성 공간 속에서 에린의 대우가 개선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작가문에 무슨 짓을 했길래, 면책을 피할 수 있었냐면서, 다리라도 벌려준 것이 아니냐는 천박한 조롱을 받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가만히 지켜봤지. 애가 몰골이 완전 금방이라도 자살할 것만 같은 위태위태한 얼굴이었어.”
그만큼 당시, 에린의 멘탈은 갈가리 찢겨져 나간 상태였다.
“그 아이에게 길을 제시해주면서, 부추긴 건 나지만, 그 길을 강하게 열망했던 건 다름 아닌 에린의 의지야.”
그때 은현이 에린에게 손을 내뻗지 않았다면, 에린은 진즉에 자신의 목을 매달고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구미호에게 몸을 빼앗겨 유리아의 미래시 속의 상황처럼페르닌을 불바다로 만드는 더한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엘빈. 네 역할은 네가 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에린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거기에 에린이 스스로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앞으로나아가고 있는 거야. 우리는 그 길을 만들어주는 역할이면 충분해.”
“명심하지. 그리고…고마워.”
은현과 엘빈은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는 제라드와 묵묵히 들어주고 있는 리오드의 대화에 끼어들며 술잔을 나눴다.
“정말 감사합니다. 현이 형님! 꼭 좋은 신붓감 찾아서 결혼하겠습니다!”
“어, 그래. 뭐….”
많은 시간을 살아왔던 은현도 이렇게 이성에 목을 매거나 결혼이 고팠던 적이 없었는데, 제라드는 그동안 쌓였던 것이 많았는지, 꽤나 후련한 듯 보였다.
“이야. 그건 그렇고 일리아나 누님도 참 대단하시네요! 결국에는 염원했던 사랑을 쟁취하신 거지 않습니까? 두 분의 연애 생활은 어땠습니까? 저도 제 미래의 신부와의 앞날을 위해서 참고 좀 해보고 싶습니다!”
“음…? 일리아나와…? 아니, 뭐 그….”
솔직히 입 밖으로 꺼내기 민망했기에 은현은 말을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연애 생활이라니, 몸 밖에 섞어본 기억이 없었는데.’
연인이 되면서 제대로 된 연인다운 일은 서로의 살을 섞어 본 것 밖에 없었다.
그래봐야 함께 밥을 먹거나 욕실에 들어가거나, 함께 마법의 연구를하는 등, 모두 집에서만 할 수 있는 활동 뿐이었다.
밖에 나가서 몸을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전형적인 인도어파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해봐야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전부.
“나는 딱히…. 일리아나가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워낙에 싫어하니까. 그냥 집에서 함께 있는 게 전부였지.”
은현은 본능적으로 리오드를 바라보며 대화의 화살을 그에게로 넘겼다.
“리오드 네 부부 생활은 어땠는데?”
“…….”
은현의 말 한 마디에 눈썹을 꿈틀거린 리오드가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탁
“부부 생활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은현.”
“어?”
이내 리오드가 은현을 응시하며 말을 잇는다.
“테레지아가 전에 일리아나에게서 이상한 물건을 받은 것 같더군.”
“어….”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던 은현이 얼굴을 싹 굳혔다.
“물론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다. 하지만….”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리오드는 이것을 말해야할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얼마 안 있어 입을 열었다.
“일리아나와 교류를 가지게 되면서, 테레지아의 낌새가 변했다.”
“변했다고?”
“거기에 최근의 교류에는 아니에스까지 껴있는 모양인 것 같더군.”
“…아니에스까지?”
여자들 셋이 모여서 도대체 무슨 교류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은현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최근에는…테레지아가 셋째를 가지고 싶다고 요구해왔다.”
“푸읍!”
술을 마시고 있던 제라드가 깜짝 놀라며, 목구멍을 타고 흘러가던 술이 역류하면서 바닥에 쏟아냈다.
“콜록! 콜록! 혀, 형님. 그건….”
“대책이 필요하다. 도와줄 수 있겠나?”
이것을 타인에게 밝히고,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은현은 거절하지 못했다.
애초에 테레지아의 성욕을 부추긴 원인은 멋대로 약속해버린 일리아나와 자신이 만든 도구가 아닌가.
“…이런 젠장.”
은현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정력제라도만들어줄까?”
“…고맙다.”
“그건 일리아나 때문이기도 하지만…애초에 그걸 만들어준 것도 나니까…. 상황이 이렇게 돼서 좀 그렇겠네. 미안해.”
“그, 그러고 보니, 현이 형님. 최근에 페르닌 안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던데요?”
서로의 아내 때문에 민망한 분위기가 은현과 리오스 사이에서 연출되자,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서 제라드가 이야기를 꺼냈다.
“소문?”
“예. 란델이 페르닌 안에 퍼뜨린 마나스트림 있지않습니까. 그 마약에 얽힌 다른 악마소환 잔당들이 있을 것 같아서 계속 조사를 하고 있던 도중인데, 이 마약의 치료제에 대한 소문이 나돌고 있던데요? 이 치료제의 출처가 아르미타스 공작령이라는데….”
“그건 나도 신경 쓰였던 부분이군. 그 치료제는 네가 만든 건가?”
직접적으로 마약을 퍼뜨린 건달들을 잡아 들이고 수사를 지속하면서 알아낸 사실은, 이 마나스트림에 중독된 피해자 학생들의 숫자가 꽤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피해자 학생들 중 일부가 마나스트림의 부작용을 치료시키는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것이 소문의 시작이었다.
치료제를 가지고있었던 학생들 몇몇의 공통점은 공작령에서 근무하고 있는 귀족들의 자제라는 것.
“아, 그거.”
제라드와 리오드의 질문에 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 페르닌 쪽에서 슬슬 입질이 올 시기인데….”
“입질?”
“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알렉스에게 말해 놨거든. 사위가 되고 공작가문에 드리는 첫 선물이라서.”
은현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 ◆ ◆
“오랜만에 보네. 알렉스. 아니, 이제는 소공작이라고 불러야 할까?”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세실리아님.”
“그러면 너부터 편하게 불러야지. 이제는 신분상으로는 네가 더 위인데. 그렇게 존대를 하면 내가 곤란해지잖아.”
“이미 친숙하게 대하고 계신데요.”
“그러게 오래전부터 붙어온 습관 같은 거라 말이 잘 안 떨어지네.”
세실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이전부터 귀족 사교계에서 자주 마주친 적이 있었던 알렉스와 세실리아는 서로 간에 어느 정도의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이점이 세실리아가 반강제적으로 아르미타스공작령에 찾아와야 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괜찮습니다. 편하게 해주셔도. 이곳에는 다른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이샤.”
“네.”
“차를 타 와주겠어?”
“알겠습니다.”
은현의 고된 교육을 통해서 제법 비서의 티를 낼 수 있게 된 아이샤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오늘 공작령을 찾아와주신 이유를 여쭤 봐도될까요?”
알렉스는 이미 은현의 예상과 계획을 통해서 세실리아의 방문과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굳이 모른척하며이야기의 방향을 이끌어 나갔다.
그에 맞춰 세실리아도 친분이 있는 친우를 대하는 것이 아닌, 귀족으로써 소공작을 대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현재 마나스트림에 중독된 아이테르의 피해학생 중 공작령 출신의 학생들이 복용하고 있는 치료제. 그 실물과 조제 방법을 공유 받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그건 왕가의 요청인가요?”
“…아니요.”
세실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며 텀을 두고 대답했다.
“그렇다면요?”
“…피해 학생들의 부모인 귀족들, 다수의 요청이었습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는 듯 알렉스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가의 요청도 아닌, 다수의 귀족들의 요구에 아르미타스가 움직여야하나요?”
“그럴 의무는…없죠.”
애초에 왕가의 명령도 아닌 다수의 귀족들의 요청에 떠밀려 자신이 공작령으로 내려와서 이런 부탁을 하고 있는 꼴 자체가 굉장히 우스운 상황이다.
페르니아스의 궁정귀족들이 이 안건을 궁정회의에 올리고, 왕가에 정식으로 요청하지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복용시킬 수 있는 치료제의 물량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나돌고 있는 치료제의 숫자도 굉장히 적어생산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고 추측을 하고 있는 상황.
왕가의 명령이 들어온다면 그 다음부터는 공공성의 성격을 띄우게 되므로, 피해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커버를 해야 한다.
마약에 중독된 자녀들을둔 귀족들은 피해학생 전체에게 정기적으로 복용할 수 있는 물량을 단기간 안에 생산을 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치료제가 우선적으로 들어오도록 방법을 모색한 결과가 이것이다.
알렉스와 친분이 있으면서, 약학에 종사하고 있는 세실리아에게 요청을 하여 실물과 조제 방법을 확보하여 가장 먼저 치료제를 확보하려 한 것.
물론 세실리아가 공작령을 찾아온 이유는 이러한 고위 귀족들의 더러운 속내 때문 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치료제 때문에 아이테르 안에서도 분위기가 굉장히 좋지 않아요. 이 치료제를 얻기 위해서 직접적인 폭력을 동반한 싸움까지 일어나고있으니까요.”
마약의 의존성이 강해지면서, 무너진 이성으로 화를 주체하지 못한 중독된 학생들은 자신의 몸에 생긴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급기야 폭력을 쓰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었다.
“아이테르의 관계자이자, 연금학과 약학에 뜻을 두고 있는 저는 하루라도 빨리 학생들의 상태가 호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알렉스와 조금이나마 친분이 있는 점을 빌미로 귀족들의 간곡한 요청에 떠밀려 내려온 것이 첫 번째 이유.
그리고 이것이 세실리아가 공작령을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하고 있는 두 번째 이유이기도 했다.
“세실리아님께서는 치료제를 개발할 수 없었던 건가요?”
“마나스트림의 부작용을 중화시키고, 의존성을 제거할 수 있는 약재들까지는 선별을 해둘 수 있었어요. 하지만…약의 조제과정에서 약재들이 가지고 있던 효능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효력을 잃기 시작했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음에도 결국에는 조제를 실패해버렸죠.”
“그렇군요.”
“소공작. 제가 이렇게 직접 공작령을 찾아온 이유는, 다른 귀족들의 요청이 있었던 것도 있지만, 이 약을 만들어내어 제가 가지고 있는 약학의 지식과 기술력을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누군가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서라는 마음 때문이에요. 부디 그분을 만나게 해줄 순 없을까요?”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약학에 대한 지식을 가진 학자로서 이 치료제를 개발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치료제를 개발한 이를 소개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제의 실물과 조제 방법을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건….”
세실리아의 요청은 들어주겠지만, 이기적인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고위 귀족들의 요청은 거부하겠다는 뜻이다.
알렉스의 말뜻을 이해한 세실리아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 녀석에게 또 큰 빚을 졌군.’
선물이라며 마나스트림을 중화시킬 수 있는 치료제들을 넘겨주고 어깨를 으쓱였던 은현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알렉스는 입을 열었다.
“치료제가 필요하다면 직접 찾아와야죠. 대리인을 보낼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