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196. 영웅들의 술자리(1)
“이야, 형님! 다시 살아나시더니 결혼까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축하드립니다!”
넉살좋게 은현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제라드가 축하의 말을 건 낸다.
“…제라드.”
호의가 섞인 축하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제라드를 바라보는 은현의 표정은 그리 고마운 기색이 아니었다.
“예?”
“너 에린한테 구혼을 했다면서?”
“그, 그것은…!”
필사적으로 함구해달라고 요청했던 자신의 실수가 적나라하게 까발려 지자, 제라드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말을 더듬었다.
“…내 동생한테?”
스르륵
“이, 이봐. 형씨! 나는 그 아이가 형님의 제자인 것도, 미성년자인 것도 몰랐다고!”
위협적으로 자신을 향해 모여드는 그림자들에, 제라드가 난색을 표하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했다.
“엘빈. 그만해. 제라드도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에린에게 사과했잖아. 기분 좋게 만난 술자리에서 험악한 분위기 만들지 마.”
“…말에 따르지.”
은현의 꾸짖음에 제라드에게 향했던 적의를 거둬들이자, 그의 주위에 있던 그림자들이 잠잠해지면서 사라졌다.
“휴우.”
제라드는 굳이 저항하지 않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잘못도 있었고, 은현의 말대로 오랜만에 만나게 된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괜히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에린은 조금 너를 꺼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게 싫어하고는 있지는 않으니까. 별 말은 하지 않겠는데…. 그렇게 결혼이 하고 싶어?”
“하고 싶죠. 당연히!”
은현의 질문에 제라드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굉장히 강렬한 열망을 품고 있는 것이 그의 표정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졌다.
“제가 그놈을 얼마나 오래 쫓아왔는지 아십니까? 자그마치 3년이에요. 그동안 그놈의 흔적을 쫓느라 한 곳에 정착하지못하고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느라, 그동안 얼마나 제 인생이 거지 같았는지 아십니까?”
“어, 음…그래. 고생 많았겠네.”
악마소환의 숙원을 이루려고 비밀리에 음지에서 활동 중이던 제국의 잔당들을 추적하는 일이 간단했을 리가 없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옆에서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고, 마을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는 부부들과 아이들을 보면 괜시리 옆구리는 시리고….”
“아니, 그건 나도 모르는 건 아닌데….”
몇 백 년을 가까이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인연을 만나고, 그 인연들을 떠나보내어 방랑하는 삶을 살아왔던 은현이 제라드의 심정을 모를 수가 없다.
“아름다운 여성분을 만나면 구혼을 하고 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던 욕구를 얼마나 꾹 참아오면서 지금까지 왔는지, 형님들이 아십니까?”
‘너 에린한테 구혼하면서 악마소환의 잔당 추적이고 뭐고, 다 버리고 여기에 정착하려 했잖아. 에린한테 다 들었어. 새끼야.’
흘끗 옆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리오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표정으로 그냥 들어주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은현은 한마디 하고 싶었던 충동을 꾹 참아내고 잠자코 제라드의 푸념을 들어주었다.
“흐윽…진짜로 리오드 형님의 결혼 소식도 충격적이었는데, 죽었다가 되살아나신 현이형님까지 결혼을…어째서 나만….”
“그거야 지금의 네 사정이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
억울함과 씁쓸함이 섞인 한탄을 듣고, 리오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은현이 네가 쫒던 그 흑마법사를 죽였다고 했었나?”
“어. 그랬지.”
“하…그것도 진짜 허탈합니다. 제가 3년을 가까이 쫓던 놈이었는데…형님께선 어떻게 그렇게 단기간에….”
“그거야 말로, 많은 요행이겹쳐서 가능했던 일이지.”
감지를 통해서 란델의 은신처를 찾은 것은 순전히 은현의 능력이었지만, 은신처인 비밀 저택이 위치한 멸망한 제국 영토로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일리아나의 텔레포트 덕이다.
게다가 란델의 의식이 의태를 버리고 본체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의 의태를 쓰러뜨려준 제라드의 덕이 컸다고 볼 수 있었다.
제라드가 없었다면 은현은 그의 비밀 저택에서 란델의 의식이 본체로 돌아올 때까지, 기약이 없는 긴 시간의 기다림이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뭐…일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동안 쫓아다녔던 그놈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건, 긍정적인 일이죠. 사실 그때 그놈의 의태를 죽이면서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에 찜찜한 기분이었거든요. 마치 볼 일 보고 궁댕이를 닦았는데도, 계속 오물이 남아있는 기분이랄까요. 그게 닦아도, 닦아도 계속 닦이지가 않는 기분이라….”
“술을 먹는데, 그런 얘기를 서슴지 않고 꺼내는 버릇은 여전하군.”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흐흐.”
인상을 살짝 찡그린 리오드의 얼굴을 보며 제라드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했다.
“…이게 영웅인가?”
쉴 틈도 없이 조잘조잘 입을 나불대는 경박한 제라드의 모습에 엘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뭐, 태도는 이래도 나쁜 녀석은 아니야. 실력도 좋은 편이고.”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엘빈은 공기를 찢어발기면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서슴없이 내찔러오는 단검에 담겨 있던 어마어마한 전격을 상기시켰다.
그 단검에 담겨있던 전류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영체를 구성하고 있던 정령의 마나가 찌릿거리며 엘빈에게 경고를 해왔었다.
그 공격을 맞아버린다면, 정령이 된 자신의 영체마저 소멸할 것이 분명하다고, 자신의 몸을 이루었던 마나들이 보내온 생존본능에 가깝다.
“저래 봬도 우리를 위해서 지금의 평화를 깨부수려는 제국의 잔당들을 혼자서 추적해왔던 녀석이야.”
제국과 대륙 연합군의 전쟁이 끝나고, 그 전쟁 속에서 제국 황제를 직접 죽이고 대륙에 평화를 가져온 영웅들은 각자가 해산하여 모두가 자신이 갈 길을 걷기 위해 떠났다.
리오드는 자신의 가문이 있는 페르니아스 왕국으로 복귀해 공로를 인정받아 승작이 되었고, 한 기사단을 이끌며 왕국을 수호하는 최강의 기사가 되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일리아나는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은현의 죽음으로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실의에 빠진 생활을 보내다가, 페르니아스 왕국 측의 요청으로 페르닌에 체류하여 마법지식을 쌓기 위한 마법도서관의 관장이 되었다.
아니에스는 에레니아 신성국으로 복귀해 국교인 베스타의 대주교라는 자리와 역할을 부여받았다.
앨리스는 정령들과의 친교를 다지기 위해 자연의 품으로 가겠다는 말을 남기며 은둔하는 생활을 선택했다.
레이넌은 전쟁이 끝난 이후로 한 번도 소식을 듣지 못했으며, 행방이 묘연한 상태.
제라드는 제국이 멸망하고,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제국의 악마소환의 숙원이 끊어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라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리오드나 아니에스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입지를 다지고, 이후의 왕국이나 성국이라는 체제 아래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해오고 있었다.
그것이 기사단장과 대주교라는 직함이다.
제라드는 각자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은현의 죽음으로 마음이 무너져버린 일리아나의 경우에는 그때 당시 도저히 더 이상의 여행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은현처럼 누군가를 이끌고 지시를 내리는 것에 재능이 없었던 제라드는 결국 혼자서 악마소환의 잔당들을 추적해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흐음….”
자신이 죽은 뒤에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가고 대륙을 위해서 일해 온 제라드를 보고 은현은 짧게 고민했다.
“제라드 앞으로는 계획이 있어?”
“예? 글쎄요. 솔직히 갑자기 목표물이었던 그 쓰레기를 형님이 처리해주신 덕에 목적이 붕 떠버리긴 했지만,아마 악마소환의 제국 잔당들을 계속 쫓지 않을까요?”
모든것을 내팽겨 치고 정착해서 결혼하고 싶다고 항상 말하는 주제에, 지금껏 해왔던 일을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그 말에 은현과 리오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엉? 왜 웃으십니까. 형님들?”
어째서 두 사람이 웃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제라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도 저래도, 경박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면서도, 굉장히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아무것도. 그러면 말이야. 왕국에 정착해볼 생각 없어?”
“…그건 또 뭔 소리입니까?”
“사실은 말이지. 나도 최근부터 악마소환이나 제국 잔당들에 대한 정보들을 모으고 있었거든.”
이어서 은현은 자신이 흑랑단을 이용해 정보를 수집하고있다는 것과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이야. 역시 형님은 대단하십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그런 쪽으론 영 젬병이라 그냥 발로 뛰어만 다녔었는데….”
게다가 많은 사람들을 부리려면 그만큼 드는 경비도 만만치가 않다.
은현의 경우에는 흑랑단의 목숨줄을쥐고 있는 입장이니, 그들을 효율 좋고, 값싸게 부릴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굉장히 효용가치가 높다.
“이제는 혼자서 애쓸 필요 없어. 정보를 종합하고 도움이 필요할 일이 생기면 내 쪽에서 너에게 도움을 요청할게.”
“아….”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앞으론 좀 쉬도록 해. 네 역할은 내가 해줄 테니까.”
“형님….”
은현의 한마디에 제라드가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으며 은현의 품에 달려든다.
“형님! 평생 따르겠습니다!”
“야…떨어져….”
존경심이 가득 찬 강렬한 포옹을 받은 은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억지로 제라드를 떼어내려 했다.
아무리 고마운 마음을 포함해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지만, 술을 마신 남자가 애정을 듬뿍 담아 자신을 끌어안아주는것에 은현은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강한 팔 힘으로 억누르며 껴안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광경에 리오드가 피식 웃음을 짓는다.
“잘 됐군. 잘하면 이곳에서 신붓감도 찾을 수 있지 않나?”
“하하!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기분이 좋아지면서 살짝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는지 제라드가 헤벌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기분입니다! 남아있는 여비도좀 있었는데, 그냥 아예 여기서 모두 털어버리죠! 오늘 술은 제가 사겠습니다. 형님들!”
“그래. 그래.”
은현과 리오드는 한껏 고조된 제라드의 기분을 깨뜨리는 것도 그랬기에 웃으며 그의 장단에 맞춰주며 술을 들이켰다.
“어때. 정령이 돼서 먹어보는 음식의 맛은?”
“미묘하군. 인간이 아니게 되었는데도인간의 감각이 존재할 수 있다니….”
“정령들은 계약자인 정령술사의 마력을 대가로 이쪽에 현현할 수 있지만, 음식은 그들의 기호에 불과해. 먹고 쉰다고 마력이 회복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알아둬.”
“그렇군.”
“그리고…너도 앞으로 마음의 준비를 해둬. 아마 쉽지 않은 싸움의 연속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고 있다. 너와 약속을 한 순간부터, 나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어.”
“너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야. 너는 당연한 거고. 난에린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야.”
“…….”
고개를 끄덕이던 엘빈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