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195. 여자들의 회의
공작가의 저택 안, 엘레노아의 침소 안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세 여자와 한 악마 사이에 미묘하면서도 싸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흐응. 정말로 악마란 말이지.”
“네, 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주인님을 모시게 된 사, 사역마. 릴리라고 합니다….”
괜히 긴장이 되어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은현의 사역마가 된 악마종, 서큐버스인 릴리는 현재 새로운 삶이나 마찬가지인 악마생 처음으로 맞이하는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태였다.
그 이유는 자신과 대치한 세 명의 여성 때문.
한 명은 아직 나이가 어려보이는 소녀로, 악마 상태인 릴리의 머리에 있는 산양 뿔을 보고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또 다른 여성은 고귀해 보이는 신분으로 보이며, 악마인 자신이 본능적으로 경고를 해올 정도로 신성한 기운을 품고 있었지만, 딱히 상관하지 않겠다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두 여자의 중앙, 의자에 앉아 매혹적인 다리를 꼬며, 팔걸이에 팔을 걸친 손으로 턱을 괴고는 자신의 전신을 훑어보는 마녀의 시선에 릴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오슬오슬 떨었다.
‘이 분이 가장 무서워…!’
본능적으로 몸서리를 치게 만드는 신성력을 품고 있는 옆의 금발 귀족 여성보다도 더 위험한 여자는 중앙에 앉아있는 고혹적인 모습의 마녀라는 것을 여자의 직감과 악마의 본능이 알려주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려는 가늘게 뜬 마녀의 눈매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몸속에 품고 있는 마력의 밀도 또한 심상치가 않다.
싸움 한 번 경험해본 적이 없는 릴리였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눈앞의 마녀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의 악마로서의 본능이 세차게 경고를 해오고 있었다.
그만큼 상대와 자신의 격차가 너무나도 컸다.
“저, 저어…. 제가 이곳에 세분을 직접 찾아뵌 이유는….”
“알아. 대강의 사정은 현이한테 들었으니까. 원래는 인간이었다며? 그 미친 X끼한테 아들이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세상 참 더럽게 꼬이면서 얘기가 너무 복잡해지네.”
“네, 네에….”
“너무 쫄지 마. 지금 당장, 그저 악마라는 이유로 너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리는 이 자리가 너무나도 불편해서 몸이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흐응. 완전 현이 취향의 여자네.”
릴리의 몸을 흘끗 바라본 일리아나가 그렇게 간단하게 평을 내렸다.
“…네?”
뜬금없는 자신의 평가에 릴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아, 아니 그냥 문득 든 생각이라 크게 신경 쓰지 마.”
“현이가 저런 타입을….”
에린이 작게 중얼거리며,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의 몸을 몰래 훑어보고 릴리의 몸을 본 뒤, 최종적으로 자신의 몸과 비교를 해보았다.
명백히 성숙한 여성의 굴곡을 자랑하는 셋의 흉부를 보고, 상대적으로 작은 자신의 흉부에 자연스레 기분이 침울해지기 시작한다.
아이테르에서는 남다른 발육을 자랑하여 성숙해졌다지만, 에린은 아직 미성년자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녀에 불과하다.
은현과 결혼할 두 여성과 비교를 하기엔 확연한 차이가 드러났다.
“그…하지만주인님께서는 제 몸에 관심이 없다고….”
“당연하지. 취향문제를 떠나서 그 책임감 덩어리가 나와 엘레노아를 두고, 다른 여자를 손 댈 리가 없잖아.”
아무리 최근에 들어서 성욕이 왕성해졌다고는 하지만, 몇 백 년을 가까이 이성과 관계를 가져오지 않았던 자제심의 화신이 이제 와서 다른 여자에 손을 댈 리도 없다.
자신감을 넘어서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하는 일리아나의 말을 듣고, 릴리는 ‘원래 그런 인간인가?’라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고개를끄덕였다.
‘…이게 악마라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서큐버스의 모습을 보고, 에린은 속으로 적잖이 당황한 모습을 애써 숨기려 애를 썼지만, 복잡한 소녀의 표정에는 그 생각들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일리아나는 흘끗 에린의 표정을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현이가 너를 우리에게 보낸 이유는 아마 너를 직접 보고 판단하라는 뜻이었겠지.”
일리아나의 추측은 정답이었다.
아무리 은현이 악마인 릴리를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릴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점은 별개의 문제이다.
은현의 의향이 다른 이들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판단 자체를 강제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은현의 방식이 아니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현은 릴리를 일리아나 쪽에 일부러 던져놓는것을 선택했고, 일리아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릴리를 직접 보고 판단해주기를 원했다.
악마라는 종족에 대한 점을 빼놓고, 그녀가 자신들에게, 인간들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보고 직접 판단을….”
일리아나의 추측에 에린이 그녀의 말을 곱씹고는 생각에 잠겼다.
에린이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일리아나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엘레노아에게 물었다.
“엘레노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 악마를 받아들일 수 있어?”
“저는 상관없어요.”
“에, 엘레노아님?”
의외롭게도, 엘레노아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뜻 승낙의 의사를 보여왔다.
그것에 에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엘레노아를 바라본다.
“은현이 직접 종속을 걸어 살려두신 거라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악마의 사정도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요. 은현과 저희에게 해의를 품을 생각이 없다면,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드라이한 엘레노아의 태도다.
언뜻 보기에는 안일한 의견이기도했지만, 그 판단에는 은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중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가차 없이 치워버리겠지만, 은현이 그녀를 살려두고 종속시키는 것을 선택했다면, 자신이 그것을 말릴 생각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은현의 이 의도에는 ‘그 분’의 의도도담겨 있는 거겠죠?”
“뭐,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현이가 이런 선택을 내렸는데, 그 분이 당연히 가만히 계셨을 리가없지.”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최종적으로 베르단디가 허락한 사안에 일리아나나 엘레노아가 뭐라 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그 분?”
“아, 아가는 아직 모르겠구나.”
아직까지 은현에게 신이라는 존재가 얽혀있는 자세한 비밀을 모르고 있던 에린에게는 의아한 이야기였다.
“그 분이 누구인데요?”
“후후,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는 알고 자신은 모른다는 것에서 발생한 차이에, 에린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외감을 느끼고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미안해. 아가. 하지만 이건 정말로 말해줄 수 없는 이야기야. 하지만…언젠가는 말해줄 수 있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
“그게…언제인데요?”
“글쎄? 그건 아가의 마음먹기에 달려있을 것 같은데?”
“후후.”
“……?”
엘레노아가 공감한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웃는모습을 에린이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보다 아가는 어떻게 생각하니?”
“네?”
“저 반마에 대한 얘기야. 아가는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니?”
“저, 저는….”
에린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에린은 이전 페르닌의 귀족들을 습격하여 정기를 착취했던 리라 바라노프라는 서큐버스와 전투를 치렀던 경험을 쌓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인상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악마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눈앞의 릴리라는 서큐버스에 대해서는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
본래 인간이었지만,흑마법사와 악마의 강제적인 실험에 의해 악마로 변이된 여자를, 지금 그녀의 종족이 악마라는 이유만으로 거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거부하기엔 그녀의 사연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저도…엘레노아님의 의견에 동감해요. 그리고…저는 저분이 그때 그 악마처럼 다른 사람을 습격할 악마처럼 보이지 않아요.”
“흐응. 그러니?”
일리아나는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어주고는 고개를 돌려 릴리를 바라보았다.
“우리 쪽의 이야기는 대강 정리가 된 것 같네. 우리 쪽도 허락할게. 네가 현이의 사역마로 지내는 거.”
“아…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릴리는 일리아나의 허가가 떨어지고 나서야, 숨이 트인다는 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전했다.
자신의 존재를 은현 이외의 이들에게 부정당하지 않은 것이 매우 기뻤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은 그 악마의 뿔과 서큐버스의 모습은 최대한 숨길 수 있도록 힘을 사용하는 거에 익숙해지도록 해. 우리나 현이가 인정했다고 일반인들에게 네 존재가 인정이 되는 건 아니니까. 적어도 일상 생활 속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지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니?”
“네! 옳으신 말씀입니다! 주인님께서도 그에 대한 충고는 해주셨어요!”
릴리는 몸속의 마력을 조작하여 자신의 양쪽 머리에 달린 산양 뿔을 없애고 평범한 인간의 상태로 변하는 것을 일리아나에게 보여주었다.
“흐응? 현이의 말대로 악마의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네.”
“그…주인님의 말씀으로는 제가 반인반마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도 가능했던 부분이라 특이한 케이스 중에서도 제일 특이한 케이스라고 하셨어요.”
“확실히, 보통의 악마와는 다른 부분이 있어.”
서큐버스를 비롯한 일부의 악마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평범한 인간들을 홀리고, 농락하는 특성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 본질인 악마의 종족 자체가 인간으로 변이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악마의 외양을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는 ‘폴리모프’의 마법과 유사하기 때문에 내부의 악마의 기운은 그대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릴리의 경우에는 서큐버스라는 악마의 기운을 찾아볼 수 없으며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하나의 몸에 두 종류의 종을 보유한 릴리는 은현의 설명대로 특이한 케이스 중에서도 굉장히 희귀한 케이스였다.
아마 은현이 릴리를 받아들인 이유 중에는 이런 악마의 특성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점이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라, 일리아나는 추측했다.
“뭐, 우리 쪽은 대강 정리됐지만, 엘레노아. 공작 쪽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제가 직접 설득해볼게요. 아버지나 오라버니에게도 쉽지는 않겠지만, 사연도 사연이고, 사역마로서 은현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점을 어필하면 떨떠름하시긴 해도, 장기적으로 관찰하는 방향을 선택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공작령에 고아원을 건설하고, 그곳에 부모를 잃어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받아들인다고 했었지?”
“네.”
“흐응. 고아들을 지원하려면 적지 않은 돈도 들어가겠네.”
“그렇겠죠.”
일리아나의 말에 엘레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조했다.
“악마. 이름이 뭐라고 했지?”
“리, 릴리에요.”
“좋아. 릴리. 우리 집에서 메이드를 하도록 해.”
“제, 제가요!?”
뜬금없는 일리아나의 제안에 릴리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니? 던전 안에 지어진 우리 집은 어떻게 보면 외부와 단절되어 악마인 너를 가둬두고 감시하기엔 최적의 공간이야. 너는 현이의 사역마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가까이에 두고 장기적으로 보면서 판단하는 게 맞잖니.”
“하지만 주인님께서는 저를 따로 어떻게 할 생각이 없으시다고….”
“그거야 걔 예정에서는 그랬겠지. 그건 내가 현이한테 얘기할거야. 그리고 공짜로 부려먹겠다는 것도 아니야.”
“공짜가 아니라고요?”
“정식으로 제대로 된 급료도 지급할거야. 그걸로 고아원의 아이들을 지원하도록 해. 그러면 적어도 공작가문 쪽에서도 너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지 않을까?”
“아….”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자신과 함께 감옥에서 지냈던 고아의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했던 릴리로서는 뜻밖의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나쁘지 않다기보다, 굉장히 송구스러울 정도로 감사한 제안.
“와…일리아나님. 대단해요.”
“…뭐니. 그 시선은?”
평소에는 생각이나 고민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고, 나른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지적이고 배려가 넘치는 모습에 에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얘도 이제는 현이의 사람이잖아. 그러면 챙겨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니?”
그 배려는 논공행상의 자리에서 에린이 기가 죽지 않도록, 은현 대신 보호자 대리의 신분으로 함께 동행해주었던 배려와도 같았다.
은현이 자신의 사람들 만큼은 챙기면서 끌어안고 가듯이, 일리아나도 그런 은현을 배려하고, 내조하는 모습에서 빛이 나오고 있다.
그 빛을 보고, 릴리는 깨달았다.
‘이 분이 실세구나!’
그렇다면 행동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다.
“감사합니다! 평생 따르겠습니다! 마님!”
“얜 또 왜이래…?”
급변하는 릴리의 태도에 일리아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