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193. 뒤틀린 흐름
“흐음…주인공이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아르미타스 기사들의 훈련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던전 주택으로 장소를 옮긴 세 사람은 거실의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던전 내부의 주택은 그만큼 밀담을 나누기에 최적의 장소나 마찬가지였다.
은현은 유리아가 제시한 키워드를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왕녀님. 그 주인공이라는 건, 누구를 뜻하는 건가요?”
“뭐야. 넌 왕녀님께 듣고 찾아온 거 아니었어?”
은현은 알렉스가 유리아를 데리러 페르닌으로 갔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대강의 사정을 파악해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런 쪽의 일에서는 왕녀님의 이야기에 구체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는 인물은 내가 아니라, 너라는 걸알고 있으니까. 굳이 왕녀님께서 두 번 설명할 일도 없이 함께 들을 생각이었다.”
“그건 또….”
굉장히 현실적인 생각이다.
유리아 왕녀가 자신에게 많이 의지해줬으면 하는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알렉스로서는 공과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것이 많이 어려울 수도 있는 부분이었는데, 딱 잘라 선을 긋고 행동하는 방식에 은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인공은….”
유리아는 이 정보를 정말로 풀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이들에게는 숨겨서 득을 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심을 굳혀 입을 연다.
“제가 보았던 ‘미래시’는 거대한 이야기 속의 흐름이에요.”
“흐름…입니까?”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전생의 지구에서 읽었던 웹소설의 지식 또는 이 세계의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최대한 알기 쉽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네. 마치 책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처럼, 시작부터 끝의 결말이 모두 담겨있는 큰 줄기요. 이 이야기 속에는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의 역할이 존재해요.”
“…그 주인공이 누구인가요?”
“이름은 ‘차한성’. 검은색 머리카락와 흑색 눈동자를 가진 고대인의 후손이에요.”
“고대인….”
알렉스는 같은 고대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 은현을 흘끗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아르케나의 대륙인 같지 않은, 묘하게 특이한 이름이 은현과 공통적인 부분이다.
고대인의 후손이라기보다는 고대인그 자체라는 표현이 옳았지만, 대외적으로 400살 이상의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이상, 은현이 귀찮은 것을 피하기 위해 고대인의 후손이라는 설정을 써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고대인의 후손이라는 주인공이 지금까지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건가요?”
“…꽤나 쉽게 믿어주시네요. 저는…이런 미래시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 헛소리라고 치부하실 줄 알았어요.”
너무도 간단히 믿는 알렉스의 반응에 유리아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알렉스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 있게 된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도 오고 가고 있는데, 미래시라고 못 믿을 건 또 뭘까.’
그리 생각하고 있던 것이 한 몫하고 있던 부분이기도 했다.
게다가 알렉스에게는 유리아의 말을 믿고 싶은 이유 중에 사심 섞인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전에 말씀드리지않았습니까. 아무리 황당무개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왕녀님의 말씀을 비웃거나, 거짓이라고 치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굳은 결심을 보여주고 있던 알렉스에눈빛에 유리아가 살짝 몸을 움찔 떨더니, 시선을 피해 얼굴을 붉힌다.
“고, 고마워요….”
“…….”
은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이 분위기를 깨어버려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이내 한숨을 쉬고는 다시 이야기의 흐름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정리하자면, 왕녀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운명의 흐름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있고, 그 주인공의 역할에 해당하는 차한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대인의 후손이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이 말씀이신가요?”
“네.”
“전부터 궁금했는데. 지금 대륙의 상황은 왕녀님이 아시는 미래와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게 좀…많은데요.”
“하나부터 빠짐없이, 전부 설명해보세요.”
“하아…그러니까….”
본래 유리아가 읽었던 웹소설, ‘운명을 개척하는 메르헨’ 속의 스토리는 이렇다.
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차한성이라는 검은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모험가를 시작하게 되면서, 조금씩 경험을 쌓고 성장을 하고 대륙에 이름을 알리게 되면서 조금씩 영웅이 되어가는 전형적인 스토리.
“조금씩 모험가 길드에서 활약을 하고, 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페르니아스의 귀족들과도 안면을 트게 되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그 사건’이 벌어져요.”
“그 사건?”
“신수의 힘을 각성한 에린 헤르샤가 구미호가 되면서, 페르닌 수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요.”
“아.”
작게 알렉스가 탄식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우연찮게 사람을 습격하던 구미호와 주인공이 조우를 하게 되면서, 주인공은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사건의 해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을 계기로 왕비에게서 직접 포상을 받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주인공과 처음으로 친한 친분을 쌓는 귀족은 알렉스, 다름 아닌 당신이에요.”
“…저 말인가요?”
“네. 이 사건에서 주인공이 구미호를 처치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게 다름 아닌 공작가문과 알렉스였거든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왕녀님이 알고 계시는 미래시에서 공작가문은, 애슈턴은 지위를 박탈 당하지 않고 소공작의 지위를 유지합니까?”
의문이 들었던 은현이 물었다.
“아뇨. 애슈턴 뿐 만이 아니라, 공작가문 자체가 나중에 쇠퇴하게 되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유리아의 말에 얼굴을 굳힌 알렉스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한다.
다름 아닌 자신의 집안의 미래의 명운이 달린 이야기였기에, 더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수도가 불타버리면서, 페르니아스 왕국은 굉장히 암울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요. 이후에는….”
사령술사가 왕국 영토의 백성들을 습격하면서 키메라 마수들을 만들어내는 사건, 엘레노아가 정략결혼으로 베스타 신전의 바르크 사제에게 시집을 가는 일 등의 사건들을 나열하고, 끝에는 페르니아스의 군권을 잡고 있던 아브로스가 피해를 막지 못한 것에 책임을 느끼고 군무장관에서 자진사퇴를 하게 된다.
“왕국의 국력 자체가 약해지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부분은 군사 부분이니까요.”
신수인 구미호와의 싸움, 사령술사와 키메라마수군단과의 전쟁에서 큰 인명 피해를 만들어낸 것에 대해서 왕국의 귀족들이 모두 군권의 지휘자였던 아브로스에게 비난의 화살일 돌려 책임을 회피했던 것이 그 결과다.
유리아가 읽었던 웹소설 속에서는 애슈턴이 저지른 배임횡령의 비리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진짜로 개판이네. 이 나라 망하지는 않습니까?”
그 지경이 되었음에도 자국의 살을 깎아 먹는 행위나 다름없는 짓거리를 하는 귀족들의 행태에 은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제가 본 미래시도 이야기의 끝까지 본 게 아니라서…. 그것까지는….”
은현은 결국 지구에서도 이 대륙이 배경이 되는 원작 웹소설을 끝까지 읽어보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에는 유리아가 가지고 있는 미래시는 참고는 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이상함을 느끼고 상담을 하고 싶어서 오셨다는 거군요.”
“네. 제 미래시 속에는…은현, 당신의 존재는 없었으니까요.”
에린을 구원하고, 페르닌에 습격한 것은 구미호가 아닌, 악마였다.
조금 더 빠른 시기에 사령술사의 존재를 감지해내고 키메라 마수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정략결혼을 통해 엘레노아가 팔려갈 뻔 했던 신전의 고위인사를 파문시켰다.
모두 은현이 개입하면서 뒤틀려버린 사건들의 연속이었지만, 그로 인해 원래 예정에 없던 사건들 또한 존재했다.
엘레노아가 납치를 당해 강간을 당할 뻔 했던 사건이나, 애슈턴의 모반으로 공작가문 전체가 파멸할 뻔 했던 사건이 그러하다.
게다가 이번에 있었던 마약 유포 사건 또한, 유리아의 미래시 속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왕국의 상황이나 이야기의 흐름이 자신이 보았던 미래의 흐름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유리아는 불안감을 느끼고 알렉스와 은현에게 상담을 하기 위해 공작령을 몰래 방문해온 것이다.
“흐음.”
은현은 한차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방으로 들어가 수정구슬 하나를 꺼내고는 마력을 이용해 작동시켰다.
- 무슨 일이지?
“사람 하나만 찾아. 이름은 차한성. 특징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남자고, 나이는….”
흘끗 유리아를 바라보자, 처음 보는 통신용 아티팩트의 존재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유리아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2, 20대 초반이요.”
“20대 초반이라네.”
- 너와 같은 고대인의 후손인가?
“그래. 그리고 아마 모험가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 …알았다.
용건을 마치자마자, 뚝 끊기는 통신과 함께 유리아가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켜 은현에게 물었다.
“그, 그건 뭔가요?”
“이번에 만들어본 통신용 아티팩트입니다.”
“그거 완전 무전…후우, 아니에요….”
이전부터 샤워기를 비롯해서 대욕탕 등, 다양한 지구의 문물을 재현해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유리아는 더는 뭔가를 말하기도귀찮아져 질문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
“상대는 흑랑단이었나?”
“어.”
“그렇군.”
“공작가문은…흑랑단을 처단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어찌 되었건 왕당파벌의 귀족들에게 협력해 공작가문을 끌어내리려 했던 길드인데…?”
“목숨을 빼앗지만 안았을 뿐입니다. 지금은 그에 맞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알렉스는 쓰게 웃으며 유리아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실제로 가문에 이빨을 들이대었던 흑랑단은 은현의 밑에서 가혹한 노동의 착취에 가까운 대우를 받고 있었다.
정보 수집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요 경비를 받고 있을 뿐, 따로 급여도 받고 있지 않는 흑랑단 사람들은 거의 무상에 가까운 노동으로 수집한 정보들을 은현에게 갖다 바치고 있었다.
그것이 은현과 아브로스가 함께 생각하면서 결론을 내린 처벌이다.
애초에 아들인 애슈턴을 매정하게 끊어버리지 못한 것에서시작된 사단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인 아브로스가 은현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것으로 납득을 하고 있다고 하니, 유리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왕녀님께서 말씀하신 차한성이라는 남자에 대해서는 제 쪽에서도 조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왕녀님. 이후 일정은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한 사흘 정도 있다가 왕궁으로 복귀할 예정이에요. 그 전까지는 오랜만에 스승님도 만나 뵙고 마법 훈련에 대한 조언을 얻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을 때, 아래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타고 에밀리아가 올라왔다.
“마스터.”
“응?”
“준비되었습니다.”
“아 그래?”
은현이피식 웃어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마침 온 참이니, 한 번 보고 갈까. 알렉스, 너도 따라와. 언젠가 한 번은 너한테도 보여줄 예정이었으니까.”
“흠? 그러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뭐가 완성되었다는 건가요?”
“최근에 이곳에서 은현이 또 무언가를 이것저것 만들고 있는 것 같더군요.”
“또 뭘…?”
“따라와 보시겠습니까?”
“…….”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던 유리아의 표정을 본 은현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왕녀님이시라면 뭔지 알아보실 것 같네요.”
“…또 뭘 만들었는데요.”
이제는 뭘 가져와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은현의 대답을 기다렸고, 마침내 은현이 보기 드물게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골렘입니다. 이름은 ‘옵티머스’로 지었는데요. 언젠가 한 번 꼭 만들어보고 싶었던 남자의 꿈 중 하나죠.”
“이 미X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