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192. 기사들의 지옥(2)
40명 중 14명, 에린의 검에 의해 패배한 기사들의 숫자다.
이들 중 대부분이 에린보다 살짝 연상이며, 아르미타스에 들어 온지, 1~2년이 채 되지 않은 젊은 신입 기사들이었다.
14연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한 이후,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의 인장이 찍힌 정식 명령서를 제시함으로써, 은현이 정말로 아르미타스 기사들의 훈련을 정식으로 맡게 된 교관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자, 기사들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무엇보다 17살의 소녀와의 대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거나, 패배한 기사들은 굉장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에린에게 패배한 14명의 기사들에게 패널티를 부과하였고, 은현은 패널티를 받은 기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에 열중했다.
“이런 X바아아알!”
양손과 양다리에 특수 제작된 각각 하나씩, 은현이 특수 제작한 팔찌형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달리기를 하고 있던 한 젊은 기사가 욕지기를 내뱉으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6번, 힘듭니까?”
기사들을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부르는 것은 에린에게 패배했던 기사들의 순서를 의미했다.
“이, 이딴 걸 차고 달리는데 어떻게 안 힘들 수가 있어!”
은현의 마력에만 반응을 하도록 특수 제작된 팔찌와 발찌들은 주인인 은현의 통제 하에, 아티팩트의 무게를 마음대로 조절 할 수가 있다.
아무리 체력 증진을 위한, 평범한 달리기라고 하더라도, 양팔과 양다리에 5kg씩, 도합 20kg의 무게를 짊어지고 계속 달리는 것이 도저히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그것도 마력을 통한 신체의 강화도 없이, 맨몸으로 1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라면, 체력이 방전되다 못해 이성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애는 잘만 하고 있는데요?”
“읏….”
자신을 언급하는 은현의 목소리에 묵묵히 훈련을 받고 있던 에린이 몸을 움찔 떨었다.
“설마 우리 애도 가능한 걸, 아르미타스의 기사님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하시는 건가요?”
“그, 그게 아니라….”
“힘드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어린 소녀에게도 지고, 그 수준으로 잘도 아르미타스의 기사를 자칭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라면 그 레벨에 잠도 오지 않아요.”
까득
은현의 비아냥을 들은 기사가 이빨을 깨물고 분노로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태웠다.
“젠…자앙! 누가 질 줄 알고!”
끊어질 것 만 같았던 팔다리에 강제로 힘을 실어 몸을 일으킨 기사는 다시 훈련장을 뛰기 시작했다.
아르미타스의 정식 임명장을 받아 교관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상, 그에게 반기를 드는 것도 불가능했던 기사들은 분을 삭이며 계속 훈련장 내부를 뛰어야만 했다.
하지만 에린에게 패배했던 14명의 젊은 기사들이 모두 그와 같은 기분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하…나는 안 될 거야….”
“죽자. 나는 공작가문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쓰레기야.”
“호수의 물은 지금 뛰어들면 따뜻하려나….”
아이테르를 졸업하지도 않은 나이어린 소녀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에 빠져, 더 이상 훈련에 임할 수 없었던 기사들도 존재했다.
“히, 힘내세요! 기사님들!”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몇몇 기사들의 표정을 보고, 에린이 그들에게 다급히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지만, 기사들은 그런 에린을 물끄러미 보고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한 거지?”
“지치지도 않나?”
“저 연약한 팔다리로 저게 가능하다고?”
“역시 나는 쓰레기야….”
자신의 응원이 전혀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에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지….”
모두 자신과의 대련에서 패배한 것이 원인으로 기사들의 멘탈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에린은 마음속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죄악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급하게 멀리서 훈련을 감독하고 있는 은현을 바라보며 소리친다.
“현아! 이대로 있다간 기사님들이 정말로 위험할 것 같아!”
“크윽!”
지독한 훈련 속에서도 멀쩡히 제정신을 유지하면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소녀가 도리어 자신들을 걱정해준다는 것이 기사들의 자존심에 얼마나 많은 스크래치를 내고 있는지, 에린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젠…자아아앙! 해주겠다 이거야! 이까짓 것 즈음!”
“근서어어어엉!”
“다, 다행이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회복되셨어!”
갑작스레 회복된 모습을 보이는 기사들의 모습에 에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봐.”
“네.”
멀찍이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은현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대꾸했다.
기사들 중, 가장 고참 이었던 기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의 교관으로써의 권한을 정말로 소공작과 공작께서 인정하셨다면 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나?”
“그렇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고는, 넓은 너비를 자랑하는 훈련장 전체를 짓누르는 방대한 마력을 개방시켰다.
우우웅
“크…읏!?”
전신을 짓누르고, 숨이 턱 막히게 만드는 밀도 높은 마력에 휩싸인 기사들이 일제히 신음을 터뜨리고 행동을 멈췄다.
“으….”
은현의 마력에 익숙한 에린 조차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은 처음 겪어보는 마력의 격류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을 리가 없다.
“뭐…야. 이거…인간 맞아?”
괴물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훈련장의 모든 기사들의 주목을 일제히 모으게 되자, 은현은 싱긋 웃으며 개방시킨 마력을 다시 거둬들인다.
“여러분들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신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인지 이해도 하고 있고요.”
“…….”
“갑자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자신이 섬기는 가문의 공녀를 채가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것은 그만큼 여러분들이 공작가문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니, 제 입장에서는 이런 대우와 시선이 그렇게 썩 나쁘지만도 않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이곳에선 굴러 들어온 돌과도 같은 신세니까요.”
기사들은 은현의 정체를 모른다.
과거 리오드나 일리아나와 함께 전쟁을 종식시킨 숨겨진 영웅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정말 은현의 지적 그대로, 갑자기 굴러 들어온 남자가 자신들의 훈련을 감독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자신들이 모시는 공녀와 페르닌에서 유명한 마녀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얘기에 남자로서 분노와 질투의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기사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은현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심지어 다짜고짜 대련을 하겠다더니 자신이 나서는 것도 아니고, 어린 여자애 내세우는 걸 보고, ‘뭐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다 있지?’라는 생각을 하신 분도 계실 겁니다.”
“잘 아네. 흡!?”
은현의 말에 한 젊은 기사가 공감을 한다는 듯 무의식적으로 동조하여 중얼거리다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중얼거린 자신의 말이 다른 이들에게까지 들려 모든 시선을 모았기 때문이다.
“…현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묘하게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은현을 변호하는 에린을 보고, 중얼거렸던 기사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의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아, 아니 뭐…속으로만 생각했다고…. 그리고 저 인간도 스스로 인정했잖아.”
“많은 분들이 이해하실 수가 없었을 겁니다. 어째서 저 연약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를 대련 상대로 내세웠던 걸까. 하고요.”
많은 기사들이 에린을 쳐다보았다.
“저 아이는 말이죠. 여러분들의 동료이자, 엘레노아의 호위기사였던 두 분을 죽인 사냥개들의 우두머리를 잡으면서, 왕국에 큰 공적을 남긴 아이입니다.”
“뭐?”
“저 아이가?”
은현의 이야기에 많은 기사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많은 우연과 상황이 겹치면서 만들어진 결과였지만, 그건 틀림없는 저 아이의 노력의 결실이 맺어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죠.”
에린 혼자만의 힘으로는 바론을 이기는 것이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신체적인 차이는 물론, 경험조차도 크게 차이나는 두 사람 사이의 공백을 매울 수 있었던 요인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인외의 힘인 신수의 힘이 크게 작용했고, 더 나아가 그림자 정령으로 각성한 엘빈이 바론의 움직임을 억제하면서, 간신히 이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린의 공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결코 여러분들이 겉으로만 보고 판단했던, ‘연약한 어린 소녀’가 아닙니다. 제가 키워낸 자랑스러운 아이이기도 하죠.”
“으….”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칭찬하는 은현의 행동에 에린이 민망한 듯 기사들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은현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헤벌쭉해져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기사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도리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사냥개들에게 당하면서, 사망하신 두 기사 분들에게는 저도 조의를 표합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분의 죽음이 기사로서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뭐? 이 새끼가?”
“니가 뭔데 그 둘의 죽음에 명예가 있고 없고를 판단해!?”
엘레노아를 호위하다가, 바론의 사냥개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두 명의 호위기사는 공작령에서 그들과 한솥밥을 먹고 함께 훈련을 했던 동료들이다.
기사들은 동료였던 둘의 죽음을 폄하하는 은현의 막말에 분노를 터뜨린다.
“엘레노아가 울었으니까요. 자신을 지키려다가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그…건!”
“자신이 섬기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각오와 결심이 따라줘야 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희생을 모욕할 생각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엘레노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맞이한 희생에 명예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니가 뭘 안다고 우리의 명예를…!”
“모릅니다. 기사의 명예라는 것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고요. 하지만 엘레노아는 앞으로 죽은 두 사람의 이름과 모습을 자신의 가슴 속에 묻고서 살아가겠죠. 그런 여자니까.”
“…….”
은현의 지적에 기사들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은현을 바라보고 있다.
“제가 공작님의 제안을 받아서 여러분들의 교관으로써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딱하나입니다. 저는 똑같은 이유로 엘레노아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두 번 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들이 강해지셔야 합니다.”
“…크!”
은현의 요구는 너무나도 간결하다.
강해지는 것.
“저는 기사의 명예 따위는 중시해본 적도 없는 평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을 강하게 만들어드릴 수 있는 길을 제시해드릴 수는 있죠. 본인들이 자신들의 가슴 속에 가지고 있는 그 명예를 계속 관철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그것을 몸으로 직접 보여줄 수 있을 만큼 강해지시면 됩니다.”
조금씩 적대감을 품고 있던 기사들이 단상 위에 서있는 은현의 연설을 듣고, 조금씩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숭고한 희생을 통해서는 기사로서의 명예를 지켜낼 수는 있어도, 섬기는 주군의 가슴 속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새기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귀환하여 주군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기사가 될 수 있도록 강해지는 것. 제가 바라는 것은 이것 하나입니다.”
패널티의 고된 훈련으로 녹초가 되어 있던 14명의 기사들이 몸에 힘을 실어,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한 가지의 공통된 열망을 눈 속에 품으며 은현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율훈련을 받거나, 14명의 후배 기사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고참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기사들의 마음을 불태우며 은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를 믿고, 따라 오시겠습니까?”
훈련장 안에서 순식간에 오와 열을 맞춰 대열을 형성한 채로, 일제히 모든 기사들이 척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교관님!”
우렁찬 기사들의 목소리가 훈련장 안에 일제히 퍼지자, 에린이 움찔 몸을 떨며 기겁을 했다.
“하하! 좋습니다. 그러면 내일부터 제대로 된 훈련을 시작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일제히 같은 타이밍에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기사들의 행동과 눈빛에는 아까 전까지 심어져 있었던 적대감은 모조리 뿌리가 뽑혀 사라져 있었다.
엘레노아의 남편으로써 공작가문을 위해서 자신들을 성장시켜주고 싶다는 은현의 의지가 기사들의 마음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은현의 실력에 대해서는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진 에린을 키워낸 스승이라는 것과, 아까 전 훈련장 전체를 장악했던 높은 밀도의 마력의 질을 피부로 느낌으로써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린이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거…. 무서워….”
◆ ◆ ◆
“라는 게 이 훈련의 시작이었죠.”
공작령에 오고 아르미타스 기사들의 교관을 맡게 되면서 2주 동안 있었던 장황한 이야기들을 듣고, 유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로 사기꾼 같은거 해본 적 없어요?”
“무슨 실례되는 말씀을. 저 이제는 공작가문의 사위입니다. 도를 넘어선 발언은 자제해주시죠.”
“지금 그 소리를 누구한테 지껄이고 있는지 모르는 건가요? 그쪽이야말로 제가 이 나라의 왕녀라는 걸 알고 계시면 그 무례한 말투는 당장 집어치우시죠.”
“별로 무섭지도 않은데요.”
은현은 피식 미소 지으며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이전에 디아네 왕비의 침소에 숨어들어가 그녀에게 경고의 말을 남기고 유유히 왕궁을 나온 은현이 왕녀의 말 뿐인 위협에 무서워서 벌벌 떨 리가 없다.
“아오! 진짜 저 얄미운 면상 개 때려주고 싶네!”
“…은현. 너무 왕녀님을 놀리지 마라. 왕녀님.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알렉스의 중재에 이성의 끊을 간신히 붙잡은 유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꽉 쥔 주먹을 풀었다.
“‘주인공’이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어요.”
유리아는 작게 심호흡으로 격해진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신의 미래의 지식을 은현과 알렉스에게 털어놓았다.
“…주인공?”
유리아는 살짝 머뭇거리던 표정으로 은현을 바라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래 속에서 이야기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요.”
이미 은현의 개입으로 많은 사건들의 결과가 뒤틀려 버리고,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고, 없었던 사건들이 일어나버렸다.
유리아가 알고 있는 미래와 지금의 현실은 너무나도 크게 비틀어져 버린 상황.
“저는 이것에 대해서 두 분과 상의를 하고 싶어서, 알렉스에게 부탁해 이곳으로 온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