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184. 악마소환의 그림자(2)
[아이는 생각보다 무르구나.]
“무르다고요?”
베르단디의 예상치 못한 평가에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던 은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아이가 그 왕비에게 지금의 직위에서 물러나라고 할 줄 알았다.]
“지금 왕비를 끌어내리면 더 큰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니까요.”
은현은 쓰게 웃으며 베르단디의 의문에 대꾸했다.
아브로스가 군무장관에서 자진해 사퇴를 하자마자,허술해진 페르닌의 경비가 란델의 밀입국을 잡아내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허무할 정도다.
그게 정말이지 개판이 따로 없다고 은현은 생각했다.
“왕비를 내버려둔 선택은 절대로 자비로운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침소에서 피곤에 찌든 표정을 보이며 조금씩 짜증을 드러내고 있었던 디아네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지금의 디아네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한 길을 깔아주기 위해 지지기반 세력들이 되어준 귀족들의 막나가는 행동들과 비리에서 눈을 돌린 결과가 이것이다.
그 업보를 되돌아와 받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디아네 왕비에게는 지금의 왕궁이 지옥과도 같겠죠.”
절대로 은현이 디아네에게 자비로운 처사를 베푼 것이 아니었다.
적대파벌이었던 귀족파벌의 수장이었던 아르미타스 공작이 군무장관을사퇴하고, 자신의 영지인 공작령으로 내려간 사건은 결과적으로 귀족파벌의 세력이 크게 깎였다는 뜻.
최종적으로 귀족파벌과 왕당파벌 간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었던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왕당파벌의 귀족들이 승리를 하였음을 의미했다.
아마도 이 시점을 이후로, 비리에 연루되지 않고 살아남은 왕당파벌의 귀족들은, 디아네 왕비의 위세를 들먹이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국책사업으로 나라를 주무르려 하는 야심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이 나라의 상황에서 이런 파벌싸움의 승리가 도대체무슨 의미가 있을까.
페르니아스의 귀족자제들은 범죄자가 뿌린 마약에 중독되었고, 그 범죄자가 수도로 밀입국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내부적으로 많은 귀족들이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이 사실이 국외, 타국으로 새어나가는 것도 시간문제.
다양한 관점에서 페르니아스 왕국은 큰 문제를 떠안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제가 몰래 왕비에게 린데발트령 사건의 진실에 국왕이 개입했다는 걸 이야기 해준 건,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경고일 뿐이었습니다.”
이제는데미안과 에반 중 누구를 왕세자로 책봉하느냐, 귀족파와 왕당파의 파벌 싸움에서 누가 이겼느냐 등의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전쟁이 끝나고 20년 만에 숨어있던 악마소환의 잔당들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한 상황이다.
앞으로도 많은 위험이 도사리는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국정의 운영에서, 나라 안에서 귀족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현재의 상황이 지속되었다간, 이 나라는 정말로 몰락의 길을 걸을 지도 모른다.
“쯧, 공개재판 때의 내 노력은 허투루 돌아갔네….”
결국 그때 감옥까지 들어가 크라시르 기사단원의 일방적인 폭행을 잠자코 맞으면서까지 짰던 판이 소용이 없었다는 것에 은현이 혀를 찼다.
“등신 같은 것들…. 그렇게 위기의식을 가지라고 해줘도, 결국 정신을 못 차리고 지들 생각만 하니까, 나라가 이 모양 이꼴이 되지.”
[…아이야. 말이 너무 거칠구나. 심정은 이해하지만 너무 상스러운 표현은 자제하거라.]
“…네. 죄송합니다. 그냥 그때의 제 노력이 무용지물이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짜증이 나서요.”
베르단디도 그 부분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구나…. 어째서 저들을 아직도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자기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편향된사고방식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그게인간이니까요.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도 자주 돌고는 합니다. ‘직접 당해봐야 정신을 차린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어떤 위험한 일을 자신이 직접 그 경험을 해보기 전까지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기 때문에 안일하게 생각하고 방치를 해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리라 바라노프라는 서큐버스가 페르닌의 귀족들을 습격하여 정기를 착정했을 당시, 귀족들의 생각과 인식이 이것과 똑같았다.
대전쟁 당시, 하급 악마들을 경험해보지 못한 젊은 귀족들이나, 악마들이 모두 멸하였다고 생각하고 거짓이라 생각하여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밤중에 바깥을 활보했던 귀족들.
설마 자신이 습격을 당할 리가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
또는 자신이 쉽게 당할 리가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스스로에게 가지고 있던 자만심과 안일함이 원인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고치지 않고 있던 것이냐?]
“이 나라가 너무나도 평화로우니까요. 사실 이 나라가 현재 개판이고 내부는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게 맞지만, 외부적으로는 대륙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대국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페르니아스의 국력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봤을 때,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뒤처지지 않는 수준이다.
대전쟁을 종식시킨 리오드가 이 나라의 귀족이고, 리오드와 같은 영웅인 일리아나와 그녀와 같은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인 사이먼이 있다.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칭호를 가진 남자와,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를 둘이나 보유한 전력은 타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의 귀족들은 진짜로 ‘위험한 상황’을 상정하지 못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차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리오드나 일리아나, 궁정마법사단이라는 크게 활약해줄 수 있는 강한 전력들이 있으니까요.”
심지어 무슨 일이 생겨 실제로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 상황을 제대로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이른바 ‘욕받이’의 질 나쁜 역할도 떠넘길 수가 있다.
일리아나의 경우에는국가의 중대사의 경우에만 요청을 할 수 있다는 협약이 있는 상태였지만, 마녀의 이름값만으로도 크게 이득을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여신님. 인간이란 건 말이죠. 욕심이란 게 끝도 없는 생물입니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한 생활을 보내게 되면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더욱 많은 것을 바라게 됩니다. 그 욕심에는 끝도 없죠.”
그것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다.
은현은 그 욕심이 인간들의 사회와 문명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순기능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선을 넘고 악행을 서슴지 않는 이들이다.
“저는 조만간 페르닌에서 일리아나를 데리고 이주하는 것으로 이 나라에 일부러 불안감을 조성하도록 상황을 유도할 겁니다.”
귀족들이 생각하는 그 안일한 생각들을 모두 깨부숴버리기 위해서, 은현이 내린 결정이었다.
“아마도 앞으로 더더욱 힘들어지는 건 이 혼란의 국정을 모두 수습해야 하는 입장인, 왕비에요.”
베르단디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왕비가 앞으로 해야 하는 일들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것은 디아네에게 자비를 베풀어준 다기 보다 더욱 힘든 길이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해주는 경고의 의미가 가까웠다.
[이제는 어쩔 작정이냐?]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베르단디의 질문에 은현은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전력을 보강할 계획입니다. 기껏 신들께서 불카노스의 망치를 내려주시기까지 했으니, 구체적으로 활용하려고요. 전체적으로 에린이나 다른 사람들의 전력을 확인해둘 필요도 있겠네요. 아 그리고….”
[그리고?]
“…일단은 결혼식부터 빨리 날짜를 잡아야할 것 같습니다.”
프로포즈를 한 이후부터, 엘레노아의 관계가 추가되고 자꾸만 문제가 생기면서 미뤄졌던 결혼식을 올릴 틈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참에 일리아나에게 메르비스의 도서관장 자리에서 은퇴하고 자신과 함께 이주를 제안한 이유는 결혼식 때문이기도 했다.
일리아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내린 선택이거 그녀는 은현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은현을 무시했던 페르니아스의 귀족들에게 엿을 먹일 수 있는 기회를 일리아나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은현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현이가 와요.”
“응?”
느닷없는 에린의 중얼거림에 일리아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반문하고, 현관을 바라보았다.
“……?”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어린 소녀는 어떻게 은현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을까.
이윽고 정말로 은현이 집으로 들어와 모습을 보이자, 일리아나의 표적이싹 굳었다.
“현아!”
일리아나의 주택으로 들어오자, 가장 먼저 은현을 반긴 건 에린이었다.
“다녀왔어.”
“헤헤.”
그의 품 안에 몸을 던지고 얼굴을 비비며 냄새를 맡는 행동은 마치 주인의 귀환을 반기는 애완견과도 같았다.
구미호의 모습으로 있었다면 그녀의 아홉 꼬리가 세차게 흔들리며 자신의 기쁜 마음을 강하게 표출해냈을 것이 틀림없다고, 일리아나는 확신했다.
그 행동을 보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생각한다.
‘…어떻게 안 거지?’
명백히 인간의 감각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감각으로 은현의 접근을 알아차렸다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품에 안겨 냄새를 맡고 있는 에린의 머리를 피식 웃으며 쓰다듬어 주던 은현이 일리아나의 미묘한 표정을 읽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나?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왜?”
“지금 네 표정이 너무 이상해서?”
“내 표정이 어떤데?”
“이해 할 수 없는 괴생물체를 조우한 것 같은 표정.”
“…아니야. 아무것도.”
정확한 지적에 일리아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응?”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일리아나를 보고 은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현아! 오빠가! 오빠가 깨어났어! 네가 오빠를 정령으로 만들어줬다면서!?”
굉장히기쁜 표정으로 은현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방방 뛰는 에린의 모습은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기운차 헤실헤실 웃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소녀의말과 반응을 듣고, 은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았다.
일리아나는 흘끗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구슬. 넘겨줬구나?”
“뭐 슬슬 때가 되기도 했고, 꽤나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밀러 가려 해서, 쥐어줬지.”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
“고마워. 오빠를 되살려줘서 정말로 고마워!”
“되살렸다는 표현은 좀 아니네. 지금의 엘빈의 상태는 인간이 아니니까.”
엘빈의 지금의 상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정령의 상태와 가깝다.
하지만 정령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 그가 정령으로써 만들어지는 과정은 자연에서 형성된 마나에 자아를 품어 깨어나는 일반적인 정령들과는 달랐다.
“그래도, 나는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너무 좋았어.”
“이제는 자주 만날 수 있어.”
“응….”
에린은 다시 은현의 명치 부분에 얼굴을 파묻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마워…. 현이는 정말 내 영웅이야….”
에린의 작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은현은 에린을 억지로 떼어놓지 못해 난감한 표정으로 일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일리아나, 슬슬 준비하자.”
“준비?”
“내가 전에 얘기했던 거 있잖아. 이사해야지.”
“아, 그렇네.”
“일단은 리오드와 테레지아님한테 인사부터 하고 오자.”
“그럴 필요 없어.”
“응?”
무슨 소리냐는 듯 은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페르니아스에서 일리아나가 형성한 대인관계는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다.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은이미 아예 페르닌을 떠나 공작령으로 이주했고, 기껏 해봐야 그녀의 지휘 아래에 도서관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이나, 올리비온 후작가 사람들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사하는데 도서관 사람들이나 리오드, 테레지아님한테는 페르닌을 떠난다고 얘기는 해야지.”
“다 알아. 내가 이미 얘기하고 준비도 마쳐뒀거든.”
“뭐?”
“저어, 현아. 사실은 일리아나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은현의 표정을 보고, 에린이 궁정회의장에서 일리아나가 자신의 결혼 예정과 페르닌의 이주 일정을 돌발적으로 발언했던 것을 설명했다.
평소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일을 저질러 버린 일리아나를 보고 은현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왜 항상 이럴 때만 행동력이 넘치냐?”
“그래서 뭐. 불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