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180. 종속 계약(3)
자신을 악마로 만든 란델과 리라는 죽었다.
하지만 그 원흉이었던 이들이 죽었다고 해서, 앞으로의 그녀의 인생이 구원을 받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다.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에게서 배척받는 존재가 흑마법사인 것처럼, 악마는 흑마법사들보다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보통이었으면 은현도 망설임 없이 문답무용으로 악마를 척결하는 쪽을 골랐을 것이다.
“…….”
[아이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냐?]
‘솔직히 그래요. 악마는 모두 없애는 게 옳은 판단이지만….’
릴리의 경우, 그녀는 피해자다.
인간의 이성을 유지하면서도, 변이된 자신의 몸이 악마라는 사실에 깊이절망하고 있다.
앞으로도 더 이상의 밝은 미래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여기서 자살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릴리는 마음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지금까지 자살을 하지 않고 꿋꿋이 버텨왔던 이유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어린아이들 때문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은 모두 란델과 리라의 실험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고, 감옥에 남아있는 어른은 실험 속에서 살아남아 악마로 변해버린 릴리뿐이었다.
이외에는 모두 자신처럼 이곳에 팔려왔으면서, 나이가 어린 아이들 뿐.
은현도 악마인 릴리를 옹호하여 그에게 대들려고 했던 어린 소년의 모습을 보았기에, 어린 아이들 앞에서 릴리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에 일말의 주저함을 보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는 것이냐?]
‘여신님….’
본래 인간이었고, 피해자라 할지라도, 악마의 존재를 눈감아주는 것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문제다.
[나는 상관없다. 그리고…이건 나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방법이지만. 어쩌면 아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방법이요?’
[‘종속계약’을 통해 저 악마를 옭아 매거라.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악마라고 할지라도 아이의 뜻을 거스르고 하계에 해악을 끼치는 행동은 하지 못하겠지. 이렇게 하면 되지 않느냐?]
간단히 말하자면, 악마를 자신의 사역마로 삼으라는 제안이다.
그것을 다름 아닌 자신의 여신이 제안을 했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은현조차도 악마를 자신의 부하로 만들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는데, 베르단디는 어떤 면에서는 은현보다 더 기발하고 터무니없는 발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심이세요?’
[후후, 아이가 망설이고 있으니. 내가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꺼림직 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보는 내가 다 답답해진다. 아이의 고민 중 가장 큰 부분은, 신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더냐.]
‘…여신님은 참 이럴 때는 당당하고 화끈하세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피해자라고는 하지만, 악마를 받아들일 결정을 내리다니 은현은 자신의 여신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칭찬을 해주니 나도 기쁘단다.]
베르단디는 미소 지으며 은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후우….”
“……?”
고민은 마친 은현이 크게 한숨을 내뱉자, 그의 태도의 변화에 릴리가 이상함을 느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제안…?”
“당신과 뒤에 잠들어있는 아이들이 지낼 수 있는 장소를 소개해줄게. 그곳도 환경이 그리 여의 친 않지만, 적어도 춥고 배고프고 척박한 이 감옥보다는 훨씬 낫겠지. 게다가…사정을 설명하면 너를 악마라는 이유로 배척하지는 않을 거야.”
“그, 그게 정말이야?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하지만 나는 악마인데….”
“한 가지만 맹세해. 평생 내 허락 없이,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릴리는 굳은 얼굴로 자신에게 제안을 해오는 은현을 바라보고 그의 말이 농담이나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맹세할게.”
“좋아. 내 앞으로 가까이 와.”
은현의 말을 듣고 순순히 앞으로 나온 릴리와 은현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은현은 곧바로 쇠창살 너머로 손을 뻗어 릴리의 허름한 누더기 옷을 거칠게 붙잡아 찢었다.
“으…!? 이게 무슨…!”
맨살의 새하얀 살결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수치스러운 얼굴로 은현을 노려보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려던 찰나.
은현의 손이 릴리의 가슴을 관통했다.
“읏…!”
이내 자신의 몸 안을 가득 채워나가는 심상치 않은 양의 기운을 느끼고, 허약해져가고 있던 자신의 몸이 점점 이전만큼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서큐버스들은 ‘흡정’을 통해서 흡수한 마력을 자신의 힘으로 치환시켜 강화해나가는 것이 큰 특징이다.
릴리는 자신의 서큐버스로서의 능력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지만, 은현이 직접적으로 그녀의 몸 안에 흘려보낸 마력을 이용하여 몸을 회복시키고, 더 나아가 이전보다 더 강해진 상태를 강제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악마의 몸에 새겨진 본능과도 같다.
“꺄아악!”
은현에게서 마력을 섭취한 것만으로도 빈약하기 짝이 없었던 릴리의 몸에 살집이 붙기 시작하고, 푸석푸석했던 짧은 단발의 머리카락이 선홍빛과 아름다운 윤기를 되찾아가며, 장발로 변해갔다.
서큐버스로서 인간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요염한 몸으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의 몸 상태에 기겁하며 비명을 지른다.
은현이 옷을 찢어버리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체의 중요 부위들을 양손으로 가리면서, 수치심으로 물든 릴리가 빽소리를 지른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몸 고쳐줬잖아.”
“아무리 그래도 제 옷을 이렇게 찢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네 몸에는 관심 없으니까 안심해.”
“이 무슨….”
자신의 옷을 찢어버려 나체의 상태로 만든 것에 일말의 미안함도 느끼지 않고 있는 은현의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성을 유혹하여, 남성의 몸속에 존재하는 정기를 모조리빨아먹기 위해 색정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서큐버스가 수치심에 젖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은현이 헛웃음이 나왔다.
이내 그녀의 머리를 응시하며, 은현이 중얼거린다.
“흐음, 성공했네.”
“네?”
“네 머리. 만져봐.”
릴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은현에게 자신의 성기가 보이지 않도록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머리를 매만진다.
자신의 머리 양옆에 붙어있던 것이 사라졌음을 자각하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뿔이…없어졌어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어린 표정으로 릴리가 은현을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아쉽게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그런가요?”
“네 경우는 좀 특수하니까. 태생이 인간이었던 만큼 내 힘으로 네 일부를 인간으로 되돌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네가 악마종의 틀을 벗어나 완전히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도 없는 상태지. 굳이 말하자면 반인반마(半人半魔)의 상태랄까.”
은현의 설명을 들은 릴리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다.
“당신은…도대체 누구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아까 전, 네가 했던 맹세 기억해?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로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맹세.”
“네.”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맹세를 매개로 너와 ‘주종계약’을 맺었어. 지금 너와 나의 관계를 굳이 설명하자면, 주인과 하인이라고 하는 게 알아듣기 쉽겠네.”
“어쩐지 사기당한 기분이 드는데요. 설마 제 옷을 찢은 건 이 자리에서 저를….”
불안한 상상이 드는 것도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네 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니까. 옷을 찢어버린 건 사과할게.”
“…당신이 범상치 않다는 건 알겠어요. 그러면 만약…제가 맹세를 깨버리고 사람을 해친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 그건 절대로 불가능해. 지금 아까의 그 맹세는 네 영혼에 각인된 거니까. 주인인 내 허락 없이는 절대로 사람을 해칠 수는 없어. 실제로 너는 지금 나를 존대하고 있지?”
“아…확실히….”
도대체 언제부터?
라는 생각이 릴리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처음 감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은현에 대한 적대적인 마음으로 그에게 반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상위의 차원의 존재를 만나고 있는 것처럼, 그에게 적대적인 마음을 품는 것은 일체 불가능하고, 그를 존대하라고 강제적으로 명령이라도 받은 것만 같았다.
그것을 은현이 지적하기 전까지 릴리 본인이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굉장히 꺼림직 한 기분이었다.
아니, 꺼림직 하지 않다고, 오히려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 꺼림직 하다는 것이 옳으리라.
“그것처럼 맹세를 통해 맺어진 주종계약이 각인된 네 본능은 그 맹세를 거스르지 못해. 뭐 본의 아니게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부분에서는 네 자의식이 인간에 대한 악의를 감지하느냐, 마느냐에 따른 부분이니까. 고의적으로 해의를 끼치지는 못하지.”
악마와의 계약은 어떤 면에서는 정령술사들이 정령과 나누는 정령계약과비슷하다.
인간과 계약을 맺고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 다음, 그 대가를 제공받는 방식은 술사의 마력을 제공받고, 정령은 힘을 빌려주는 상호의존의 협력의 관계와도 비슷한 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악마의 경우에는 그 대가가 술사의 마력이 아닌, 계약한 인간의 인생 자체를 대가로 받으니까. 근본적인 부분부터 틀리기도 하지만.’
게다가 지금 은현이 릴리와 맺은 계약은 상호의존의 계약이 아닌, 엄연한 ‘주종계약’이다.
심지어 둘의 관계에서 ‘주’가 되는 부분이 악마인 릴리가 아니라, 은현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살다 살다 악마를 사역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 일단은 저지르기는 했는데.”
은현은 속으로 일리아나와 엘레노아, 에린 이외에도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떠올렸다.
이내 자신의 여신을 흘끗 바라보았다.
‘엘레노아나 일리아나의 설득. 도와주실 수 있나요?’
생각해보니, 일리아나는 아직도 베르단디와 직접적으로 대면한 적은 없었다.
조만간 기회를 가지고 엘레노아처럼 베르단디를 소개할 기회를 가질 예정이긴 했지만, 그것이 이런 형태로 소개가 되는 것은 은현에게도 조금 탐탁지 않은 기분이다.
[물론이다. 내가 허락한 것이니. 나도 아이의 설득을 도울 생각이다.]
악마에게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었거나, 전쟁을 통해서 악마와 적대를 해봤던 사람들이 대다수인 만큼, 릴리의 사정을 설명하고 설득한다면 이해는 해주겠지만 그 과정이 절대로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특히나 에린의 경우에는 서큐버스에게 놀아나 엘빈이 흑마법사가 되기까지 했으니까….’
생각이 잠겨있던 차에, 릴리가 은현에게 물었다.
“전…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아무 짓도 안할 거야. 그냥 아이들을 데리고 내가 소개해준 곳에서 조용히 살아.”
“그게…다인가요?”
너무나도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이야기라 도리어 릴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 꺼림직 하겠지만, 악마의 힘을 다루는 방법은 가능하면 익혀둬. 지금은 내 힘으로 네 악마의 뿔을 감춰두긴 했지만, 이건 임시방편이라 언제 풀릴지 모르니까. 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 정도는 마련해두는 게 낫겠지.”
“알겠어요.”
악마의 힘을 다루는 방법을 익히는 것은 심히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지만, 그 거부감을 제외하면, 은현의 요구 조건 자체는 굉장히 합리적이며, 릴리에게도 나쁠 것이 없는 부분이다.
은현은 흘끗 릴리의 뒤를 바라보며, 바닥에 쓰러져 잠들어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인종은 매우 다양했다.
인간의 수가 제일 많았으며, 수인이나 드워프, 딱 한 명이지만 하프 엘프까지 대략적으로 열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은현은 중얼거렸다.
“인종별로 모아서 실험을 진행하려 했던 건가.”
“…그들의 의도는 모르겠어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실험을 통해서 직접 악마로 변이된 릴리는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양팔을 감싸 안으며 살짝 몸을 떨고 있는 것이 그녀가 얼마나 끔찍한 경험을 당했는지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은현은 검을 소환해 쇠창살을 갈라버렸다.
깔끔하게 절단된 쇠창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디자인의 의복을 머릿속으로 상상한 뒤, 소환하고는 릴리에게 던져주었다.
“입어.”
“고, 고맙습니다….”
평민이 입기에는 너무나도 부드러운 원단의 재질을 느끼고, 릴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일단은 애들부터 옮기고, 뭣 좀 먹이도록 하지.”
“어디로 옮기는데요?”
“내 집.”
“네…?”
뜬구름 잡는 듯 이해할 수 없는 은현의 말에 릴리가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