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179. 종속 계약(2)
“크아악!”
자동으로 발동된 그림자의 방벽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찢어발기고, 은현의 검이 란델의 어깨를 관통했다.
애초에 엘빈의 조영술의 근원이 란델에게서 받은 흑마법서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현이 대비를 세우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비랄 것도 없지만.’
엘빈과의 전투 당시에는 호각을 보여주었지만, 신력을 부여받고 반신의 경지에 이른 은현은 이미 조영술에 대한 대응 방법을 완벽히 준비해둔 상태였다.
제라드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절반의 소모와 피나는 노력의 결실 끝에 이룩해낸, 뇌광의 이빨과 비슷한 경지의 수준.
관통된 어깨가 파열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한 비명이 저택 내부를 가득 채웠다.
굳이 목을 베지 않고, 그의 어깨를 노린 이유는 아직 란델에게 용무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깨를 관통시킨 검을 뽑아내자, 그의 몸에서 피가 솟구치며 은현의 옷은 물론, 바닥과 벽을 적셨다.
은현은 그의 머리를 붙잡고 거칠게 끌어당겨 있는 힘껏 벽에 쳐 박았다.
“커…헉!”
“오래도 기다리게 만들었네.”
“어…떻게 여기를….”
“흑마법사라는 존재를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람펠, 그 양반이었으니까. 설마 너 같은 아들이 있을 거라는 건 생각도 해보지 못했지만.”
엘빈이 조영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마법서는 리라가 엘빈의 손에 넘어가도록 유도했던 것이지만, 그 흑마법서 자체는 인간이 기술한 책이다.
리라가 그 흑마법서를 어디서 얻었는가를 추측하고, 서큐버스였던 리라와의 연관성을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20년 전 은현과 동료들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했던 제국 마법사, ‘람펠 매버’였다.
혹시라도 람펠 매버가 남긴 유산을 누군가가 발견하고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었던 은현은 일리아나에게 자신을 멸망한 제국의 영토로 텔레포트를 해줄 것을 요청했고, 굳이 그곳을 다시 발을 들이밀어 가겠다는 은현을 못마땅해 했지만, 결국 일리아나는 은현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후 은현은 여신의 권능과 감지를 이용하여, 오랜 시간동안 제국 영토들을 돌아다니며 탐색을 하고 다녔고, 그 결과 감지에 탐지된 장소가 결계로 뒤덮여져 있는 이 비밀 저택이었다.
어떻게든 은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는 란델의 복부에 은현이 무릎을 들어 올려, 니킥을 꽂아 넣는다.
“커흐윽!”
“존버도 너무 길었어. 빨리 끝내고 난 퇴근하러 가야겠거든?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은현 고유능력]
[기억견문]
곧장 란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기억을 읽어 들이려 했지만.
‘안 보여.’
마치 희뿌연 안개가 가려져 있는 것처럼, 무언가가 란델의 기억 속을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은현이 무언가가 란델의 머릿속에 수작질을 걸어두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억을 읽어들이는 능력은 은현이 스스로 개척해낸 기술이 아니며, 그 근원은 은현의 여신 중 하나인 우르드의 권능이다.
신의 권능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떠올리는 데는 그리 큰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신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이의 생각이 맞구나. 이건…악마의 권능이구나. 그것도 꽤나 고위 악마의….]
베르단디는 얼굴을 굳히며 은현의 질문에 대답했다.
‘고위급의 악마들은 문 너머의 공허에 봉인되어 아르케나 대륙으로 넘어올 수 없는 거, 아니었나요?’
[본래라면 그렇지. 하지만 간섭 자체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란다. 그…아이에게 광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는 ‘망자의 여왕’도 공허에서 건너온 적도 있지 않느냐.]
육체를 두고, 정신체만으로 아르케나 대륙에 넘어온 것도 모자라, 자신의 부하인 마리우스와 레나트를 데리고 홀연히 사라진 메디아의 존재를 떠올리고 은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메디아처럼 정신체만으로 건너와, 란델을 이용한 것처럼, 대륙의 혼란을 조장하는 것도 고위급의 악마들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20년 전에 제국을 뒤에서 조종하여 아르케나 대륙에 악마소환을 하려했던 것도….’
[으음, 이 고위급의 악마일 가능성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아, 아아아! 아버지! 아닙니다! 전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요!”
“뭐?”
머리를 벽에 부딪치면서 반즈음 정신이 나가 있던 란델이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겁에 질린 시선으로 은현을 바라본다.
‘날 보고 있는 게 아니야. 이건…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
란델은 은현의 얼굴을 통해서 다른 누군가를 겹쳐보고 있었다.
은현은 란델이 경기를 일으키며 입에 담고 있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신경이 쓰였다.
“전 아직 멀쩡해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발! 제발 한 번 만 더 기회를! 끄, 끄아아악!”
은현의 손에 붙잡혀 있는 란델의 머리가 부르르 떨리고, 그의 두 눈이 뒤집어지면서 흰자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은현은 그의 머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황급히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곧장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란델과의 거리를 벌린다.
“크, 크으윽! 벨페고르님! 제발 한 번 만 더…!”
퍼엉!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로 목숨과 기회를 구걸하던 란델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머리가 터지면서 여기저기로 튀는 피가 얼굴에 묻지 않게 얼굴을 가린다.
‘…여신님. 이건 악마의 짓인가요?’
[그런 것 같구나.]
“…쯧.”
란델의 허무한 최후에 은현이 할 말을 잃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고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의 머릿속의 기억을 통해서 정보를 뽑아낼 수 없는 이상,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나마 건진 게 ‘벨페고르’라는 악마로 추정되는 이름이 전부.
자신의 자세한 정보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수족으로 부리고 있었던 란델의 머리를 언제든 터뜨릴 수 있도록 수작질을 해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놈들이 한둘이 아닐 것 같은데.”
아르케나 대륙에 악마를 소환시키기 위해 숨어서 몰래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란델 뿐일 리가 없다.
게다가 란델의 죽음이 자신이 아닌 악마의 수작질로 행해졌다는 사실이 심히 불쾌하다.
[이제는 어떻게 할 것 이냐?]
‘저택의 지하 감옥에 잡혀있는 이들이 있어요. 그리고…다른 존재도 섞여 있는 것 같고.’
은현이 처음 이 비밀저택을 발견하고 몰래 잠입했을 때, 감지를 통해서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인간들의 수는 처음부터 파악을 해두고 있었다.
곧장 그들을 구출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애슈턴과 바르크 사제의 뒤에서 그들을 앞세워 페르닌을 뒤흔들었던 배후를 캐내는 것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정황상 인간들을 실험체로 사용할 목적이라는 것을 파악한 은현은 그들을 내버려둬도 아직은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내린 타산적인 결론이었다.
이 비밀 저택의 주인인 란델이 죽어버린 지금, 은현은 갇혀있는 존재들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지하 감옥으로 향하고 있었다.
드르륵! 철컹!
철제로 된 미닫이문을 밀어버리고 지하 감옥으로 입성한 은현이 쇠상찰 너머의 감옥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다양한 인종들을 은현이 천천히 훑어보았다.
“히, 히익…!”
란델의 피로 얼룩진 검은 코트와 검을 보고, 한 어린아이가 겁에 질려 새된 비명을 내지른다.
“넌…누구야….”
겁에 질린 아이를 뒤에 숨기며 가장 앞에 서서 적대적인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여자를 확인하고, 은현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의 입장에서는 옷과 검에 피를 잔뜩 묻히고 감옥을 찾아온 은현은 자신과 아이들의 목숨을 거두러온 사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자의 머리위에 달린 산양의 뿔은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직설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악마가 인간을 감싸?”
“누나는 악마가 아니야!”
“자, 잠깐만! 소리치지 마!”
묘한 시선으로 중얼거리는 은현의 말에 한 소년이 발끈하며 소리치자, 산양의 뿔이 달린 악마, 서큐버스가 황급히 소년의 팔을 잡아 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긴다.
“…….”
악마가 아이를 보호하려는 것도 모자라, 감옥에 갇혀있는 아이들 또한 그 악마를 옹호하며 지켜주려고 하고 있는 상황은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이해할 수가 없는 광경이기 까지 하다.
은현은 피로 얼룩진 자신의 검을 역소환하고,감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오, 오지 마.”
은현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두 눈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면서도 서큐버스는 가장 앞에서 아이들을 지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 자식을 지키는 어미의 모습과도 같았다.
“살면서 이런 경우는 또 처음보네.”
그리 중얼거린 은현은 감옥과 바깥의 경계인 쇠창살 앞에 서서 마법을 발동시켰다.
[한 자릿수 일반마법]
[슬립]
“어…?”
곧바로 하나 둘씩 바닥에 쓰러지면서, 잠에 빠져든 아이들을 보고, 서큐버스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서큐버스를 제외한 어린 아이들은 오랫동안 척박한 환경인 감옥 속에서 생활하면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고, 제대로 된 영양의 섭취도 하지 못해 체력도 온전치 못한 상태.
아주 작은 규모의 약한 마법으로도 아이들을 잠재우기엔 충분했다.
은현은 차디차면서 딱딱한 돌바닥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우리 얘기 좀 해봐야할 것 같은데?”
“…….”
태연하게 바닥에 앉아 말을 거는 은현의 태도가 너무나도 태평하기 그지없었기에 서큐버스는 더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은?”
“릴리.”
“성은?”
“없어. 난 평민이었으니까.”
마치 악마가 아니었다는, 본래는 인간이었다는 말투다.
“당신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여기는 사악한 흑마법사의….”
“그 흑마법사라면 방금 죽이고 오는 길이야.”
“뭐…?”
정확히는 은현이 죽인 것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벨페고르라는 악마가 수작질을 해놓지 않았더라도, 곧장 은현이 죽일 예정이었기에 크게 변할 건 없었다.
“즉 당신과 아이들은 자유라는 소리야. 하지만 악마인 당신은…얘기가 좀 다르지.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지?”
“…알아.”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이 말하는 바에 순순히 납득했다.
세상은 악마라는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고,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라는 고정된 인식이 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은현도, 당사자인 릴리도 부정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그쪽은 원래 인간이었어?”
“응.”
릴리는 은현의 질문을 시작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릴리는 린데발트령의 주민으로 영주 일가가 이교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처형을 당하고 영지가 몰락한 이후, 노예로 이곳에 팔려왔다고 한다.
이후 이 비밀 저택의 주인인 란델의 실험으로 인간을 인위적으로 악마로 만들어내는 실험체로 쓰여 지면서, 결국 악마종이 되었다고 릴리는 자신의 사연을 은현에게 털어놓았다.
그녀가 인간에서 서큐버스가 되었던 과정에는, 란델과 협력관계를 맺고 페르닌을 습격했던 리라 바라노프라는 서큐버스가 관계되었을 거라고 은현은 추측했다.
“하지만…인간을 악마로 만드는 방법이 존재했던 건가?”
“그 남자는…모든 게 벨페고르님의 은총이라고 이야기를 했었어. 나는…그분의 은총을 받아 수많은 실험체중 유일하게 악마로 진화한 개체라고…. 이딴 괴물…되고 싶지도 않았는데….”
린데발트령이몰락하면서 란델에게로 넘어온 실험체들이 릴리 하나뿐일 리가 없었다.
릴리는 정말로 수많은 실험체들 중 유일하게 악마로 변이가 성공한 개체였다.
[불쌍한 아이구나….]
사연을 들은 베르단디가 허공에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보고 있다.
“자유? 그런 게 나한테 존재할 리가 없잖아. 이제는 인간도 아닌 내가 어떻게 인간들 틈에서 숨어 살 수가 있겠어…?”
악마가 되어버린 릴리는 인간들의 틈에 섞여서 살지 못한다.
감옥에 갇혀 있는 어린아이들이 릴리를 옹호했던 이유는 이 감옥 안에서 릴리가 가장 연상이며 필사적으로 아이들을 다독이고 돌보고 있었던 어른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악마’라는 존재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리분별이 불가능한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었던 것도 있을 것이다.
“…….”
은현은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