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172. 사냥개들(2)
어두운 밤길 아래, 목적지인 글레오르 폐창고를 향해 걷던 도중, 에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니. 아르티아 기사단은 뭣 때문에 그렇게 바빴던 거예요?”
“아, 그건….”
에이라는 조금 난감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최근 이 나라의 정세는 알고 있나?”
“아니요.”
“현재 아르티아의 기사단을 중심으로 과거 레니온 헤르샤의 배임횡령을 공모했던 귀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수사를 진행중이야.”
“아….”
에린은 사망한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되자, 표정을 굳혔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에린에게 있어 레니온 헤르샤라는 남자는 핏줄로 이어져 있는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봉인하고 싶은 학대의 기억들 뿐이었다.
은현의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케어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껄끄럽게 느껴지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정도였지만, 초기에는 심하게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피폐해져 있었다.
에린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안 좋은 감정들을 뿌리치며 에이라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많은 귀족들이 기사단으로 출두하여 취조를 받고 있는 상황이야. 그 과정을 거치고 죄가 확정된 이들은하나도 빠짐없이 왕비가 내린 형벌에 의해 대량의 벌금이 부과되고 있어.”
“그게 뭔가 문제가 되고 있나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범죄를 저지른 것이 세상에 드러나고, 그로인해 벌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부정부패가 가득한 이 나라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에린은 에이라가 말한 것의 어디가 문제가 되고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올바른 방향이야. 하지만 지금은 그 수사가 진행되고, 형이 집행되고있는 과정이니까. 페르닌에 있는 귀족과 지방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의 차이는 알고 있니?”
“네. 지방 영지의 귀족들은 수도가 아닌 타영지를 왕가에서 받고, 그 영지를 다스리는 정치 권력자들이잖아요.”
“그렇지. 때문에 지방 귀족들은 대부분 자신의 영지에서 체류를 하며, 페르닌에 있는 귀족들 대부분은 공작가문이나 일부귀족들을 제외하면, 궁정에 출근하여 맡은바 귀족으로써의 소임을 다하고 있어.”
대표적으로 영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아르티아라는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리오드나왕국의 재정관리를 하는 직책인, 재무장관을 맡고 있는 버나드가 이와 같은 예이다.
비슷한 직책으로 군무장관의 직책을 맡고 있는 아브로스는 궁정귀족이면서, 영지를 가지고 있는 특이한 케이스이다.
소공작이라는 차기 후계자를 양성하여, 두 사람이 적절한 업무분담을 통해서, 공작령을 다스림과 동시에 나라의 군사업무를 보고 있다.
“즉 현재 아르티아의 기사단장이 수사를 통해서 취조하고 있는 비리귀족들은 페르니아스 왕국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귀족들이 대다수라는 뜻이야. 현시점은 실질적으로 이 나라의 행정기관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해.”
“…저는 평민이라서 어려운 얘기는 잘 몰라요.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건데. 그게 어떻게 문제가 된다는 건가요?”
아이테르에 재학중이긴 하지만, 에린은 검술이나 마법 등의 실기에서만 강세를 보일뿐, 사회나 정치, 역사의 분야에서는 바닥을 기는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음, 에린은 은현님의 제자였지?”
“…제자였습니까?”
“……? 아, 네.”
왜 제라드가 놀라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비공식적으로 은현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으니, 제자라는 표현이 맞았다.
“만약 너와 은현님이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고 치자,”
“으음, 네.”
“그런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은현님과 네가 함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겼어. 부족한 은현님의 공백을 매울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여차하면 너 혼자서라도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지.”
“으음….”
“그런 상황에서 너는 은현님의 몫까지 모두 맡아서 일을 할 수 있니?”
“아니요?”
은현의 능력과 자신의 능력을 비교해서 생각을 해보자니 말도 안 된다.
고민할 것도 없이 에린의 즉답이 나오자, 에이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더 간단히 설명하자면, 두 사람 분의 몫을 에린 너 혼자 처리해야 하는부담이 생길 수 있다는 거야.”
“그건…확실히 힘들겠네요. 그래서 지금 페르닌이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아르티아의 기사님들은 비리를 저지른 귀족들을 수사하느라 바쁜 상황이라는 건가요?”
“응. 게다가…공작님이 갑작스레 군무장관 자리를 자진사퇴하시면서 군사 부문도 지금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라 페르닌의 분위기도 많이 어수선하고.”
“아르미타스 공작님이 자진 사퇴를…?”
에린은 전혀 듣지 못했던 소식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자신의 아들이 나라의 명예를 흠집을 내는 중범죄를 저질렀는데, 자신이 어떻게 나라의 중진의 직책을 맡을 수 있냐면서 자진 사퇴하셨어. 그런 공작님을 따라서 군사부문의 중책을 맡고 있던 많은 비리 귀족들도 반강제로 사퇴를 하게 되면서, 군사부문 쪽 인사들이 모두 뒤바뀌었거든.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라,페르닌 전체의 분위기도 지금 엄청 어수선해.”
“그렇군요….”
잘못을 저지르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어찌 보면 에린이 바랬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지만, 잘못은 애슈턴이 저지르고 그에 대한 책임을 핏줄로 이어진 부모이기 때문에 아브로스가 져야만 한다는 결말이 매우 찜찜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비리 귀족들을 수사하던 도중, 귀족자제들 사이에서 이상한 약이 돌고 있던 것도 확인됐거든.”
“약이요?”
“어젯밤에 아버지께서 은현님께 가져다 드리라며, 너에게 맡기려던 물건 기억해?”
“네.”
에린은 전에 리오드가 자신을 통해서 은현에게 전달하려 종이봉투와 편지의 존재를 기억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대체 뭔데요?”
“마약입니다.”
“마약이요?”
대답한 것은 에이라가 아닌, 중간에 끼어든 제라드였다.
“네. 일반적인 시중에서 판매되는 약이 아닌, 불법적으로 제조된 약물을 뜻하죠. 지금 귀족들 사이에서 나돌고 있는 물건은 ‘마나스트림’이라는 불법 약물입니다. 체내의 마나를 강제로 각성시키고, 그로인해 마력의 보유량을 늘리고 신체능력을 향상시켜주는 효과를 지녔지만, 고양되는 감정이 습관적으로 의존 증상을 발생시키고, 최종적으로는 사람의 이성을 무너뜨립니다.”
“어….”
에린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에이라를 쳐다보았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냐는 것을 눈빛으로 묻자, 에이라가 씁쓸한 낯빛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했던 마르바와 건달들의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고, 안 좋은 예상을 머릿속에 품었다.
- 얘기가 틀리잖아! 어째서 전에 얘기했던 금액하고 틀린 거야! 더 비싸졌잖아!
- 그거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니까, 그만큼 경쟁의 수요도 붙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 이게 내가 가진 돈의 전부야….
마르바의 그 다급한 외침과 귀족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건달들의 접근에 강하게 저항하지못했는지, 에린은 그 이유를 생각해냈다.
“설마 마르바는….”
“맞아. 마약을 구하려던 그 상황을, 네가 딱 발견해낸 셈이었지.”
“그자가 사용할 법한 수법이죠. 만만한 나이어린 귀족 자제를 꿰어내어 마약을 중독 시키고, 이후 중독 시킨 그 귀족 자제를 이용해, 주변의 같은 신분이나 친한 이들에게도 접근하여 비슷한 수법으로 중독 시킵니다. 대체로…아이테르처럼 어린 학생들이 집합되어 있는 환경은 어떤 의미로 더더욱 그놈이 날뛰기에 좋은 장소죠.”
마약에 한 번 손을 대고 의존성이 강해져버린다면, 나이가 어려 성숙하지 못한 어린 귀족 자제들은 결국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지고 최종적으로는 마약의 공급책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특권의식에 사로잡히고, 자존심과 허영심만으로 가득 차있는 어리석은 귀족 자제들은 애초부터 사리분별이 똑바로 되었다면 이런 일에 엮이지도 않았으리라.
결국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마약에 중독되어 공급책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자신의 치부를 겉으로 드러낼 수도 없는 귀족 자제들은 부모에게 이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겨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지금 귀족들의 비리를 수사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이 마약 사건에 연루된 아이테르의 학생들과 그 주변 인물들을 모두 심문하는 일 때문에 에린이 가져온 정보에서 직접 나서실 수 없었던 거야.”
수사중인 비리 귀족이나, 마약 사건에 연루된 귀족 자제들, 또는 귀족들까지, 만만치 않은 신분을 가진 이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에, 수사의 지휘자이자, 단장인 리오드는 에린이 가져온 배후의 정보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째서 리오드가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이해가 된 에린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심각한 문제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그 자식이 용의주도하고 구린 생각만을품는 음흉한 놈이라고 해도, 그 놈이 이렇게 활개를 칠 수 있을 만큼 이 나라가 개판인 것도 문제에요. 리오드 형님이 얼마나 개고생을 하고 계신지 눈에 훤합니다.”
“이 나라의 귀족의 딸로서, 정말 부끄러워요….”
제라드의 한숨에에이라가 무겁게 고개를 떨어뜨리며 대꾸했다.
“…그럼 그 마약 공급책인 남자가 제가 얘기한 흑마법사라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란델 매버. 20년 전에 멸망한, 미르바빌라 제국의 궁정마법사였던 람펠 매버의 아들입니다.”
갑작스레 뒤바뀌는 스산한 목소리에, 에린이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 구애를 해왔을 때 보여주었던 한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적을 생각하는 얼굴과 눈빛은 사투를 거쳐 온 전사의 눈빛이었다.
그 진지한 모습은 가끔가다 은현이나 일리아나가 보여주는 듬직한 면모처럼 보였기 때문에 갭의 차이를느꼈다.
‘그냥 변태가 아니라, 진짜로 영웅이었구나…. 변태지만….’
조금은 경계를 푼 에린이 재차 물었다.
“제라드님이 후작님을 찾아오신 건, 이 남자를 쫓기 위해서 후작님께 도움을 요청하러 오신 거였나요?”
“그렇죠. 저는 이 남자의 행방을 추적하던 도중, 3개월 전부터 이곳에 란델과 비슷한 수법으로 마약이 풀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란델을 추적하기 위해 페르닌으로 입국했습니다. 그래서 리오드 형님께 도움을 좀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에휴, 누가 이 나라가 이렇게 개판일 줄 알았겠습니까?”
“어….”
“어떤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현이 형님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하고 조금 기대를 했는데, 결국 현이 형님도 어딘가 중요한 일로 자리를 비우신 상황이고….”
‘뭘까 이 사람….’
에린은 제라드의 말을 들으며, 미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정신이 이상한 변태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짜고짜 리오드, 일리아나와 같은 대영웅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남자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인상은.
‘굉장히 수다스러워.’
말이 너무 많아서 밤길을 걷는 와중에도 일일이 대꾸를 해주는 게 굉장히 피곤할 지경이었다.
“아 참, 현이 형님은 일리아나 누님과 결혼을 하신다는 게 진짜입니까?”
“네? 아, 네. 날짜는 아직도 안정해졌지만, 그럴 예정이에요.”
“진짜였네…. 결국 현이 형님 꼬시는데 성공하셨구나. 그 누님은….”
“응…?”
제라드의 중얼거림을 들은 에린이 물음표를 띄우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서브 마스터.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아, 응. 알았어.”
제라드는 담담히 목적지인 글레오르 폐창고에 도달했다고 보고를 해오는 에밀리아를 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와, 신기하네요. 스스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할 줄 아는 인간형 골렘…. 그러면서도 이렇게 정교한 조형이라니…인형이라고 했던가요?”
“본 개체의 외형을 칭찬하는 발언에 적극 동의하는 바입니다.”
제라드가 자신을 칭찬하고 있다고 받아들인 에밀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표정자체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했지만, 그녀의 반응이 왠지 모르게 기쁘게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라고 에린은 생각했다.
“그럼 저는 이즈음에서 몸을 숨기도록 하죠.”
계획은 특별할 것 없이 간단했다.
에린과 에이라, 에밀리아의 여자만으로 구성된 셋은 방심을 유도하고 경계를 풀기에 딱 좋은 구성.
제라드는 은신을 통해서 따로 행동하면서 에린 일행이 주의를 끈 틈을 타, 이변을 눈치 채고 란델이 도망을 치기 전에, 그를 처리한다는 심플한 작전이다.
“새삼 이렇게 동행하여 오기는 했지만, 두 분은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날카롭게 두 사람을 관통하는 시선에, 에린과 에이라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영웅이 쫓고 있는 범죄자인 만큼, 어린 소녀와 견습기사가 낄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은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는 팩트다.
그럼에도 에린과 에이라는 직접 이곳에 따라온 명확한 목적이 존재했다.
에린의 경우에는 엘빈이 익혔던 흑마법서의 주인이 이곳에 있다는 것 때문에.
에이라는 사적으로도 친한 에린을 홀로 보낼 수도 없었던 걱정 때문이기도 했다.
‘아마 이중에서 가장 약한 건 나겠지.’
그것은 에이라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에밀리아의 전투능력은 자신의 훈련을 에밀리아가 어울려줬던 순간부터 싫어도 깨닫게 된다.
함께 훈련을 받았던 에린 또한 몸속에 가지고 있는 신수의 힘을 활용하여 싸우면서 눈부신 성장을 이뤄내고 있다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에이라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어린 여동생 같은 아이가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굉장히 멘탈이 약해 불안정했던 소녀는 조금씩 성장해나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에이라의 기억 속에는 그때의 불안정한 모습이 잊혀 지지 않았다.
“저희 쪽에는 에밀리아가 있으니까요. 간단히 당하지는 않을 자신 있어요.”
“그 인형이 얼마나 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이 형님과 리오드 형님이 키우신 두 분이시라면 믿고 맡기겠습니다. 부디 무슨 일이 생기시더라도, 죽지 말고 버텨주세요.”
두 여자와 인형을 믿을 수 있는 근거 따위는 특별할 게 없었다.
자신과 함께 해온 두 남자들이 키워낸 이들이라는 것 뿐.
성별도, 연령도 중요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본 개체의 전투능력을 우습게보지 말아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명심하겠다는 에린과 에이라의 반응과 이상한 자부심이 차있는 인형을 보고, 제라드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