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169. 진짜 배후(4)
“구슬 깨기의 악마? 뭐야,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두 단어의 조합은…?”
에린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에린은 남성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로, 남자의 가랑이 사이를 제대로 본적이 없었다.
집안에서 그녀를 학대했던 아버지나, 그녀를 소중하게 대했던 오빠 등 남자가 둘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린의 성지식에 대해서는 거의 전무한 상태.
그렇기 때문에 에밀리아가 이곳에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 모르는 에린은 문지기를 하고 있던 건달이 공포어린 시선으로 도망치며 외친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었다.
“안내하겠습니다.”
“어, 응.”
얼떨결에 대답한 에린은 조용히 앞장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에밀리아를 따라 걸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덩치가 우락부락한 험악한 인상의 건달들이 하나 같이 공포스러운 시선으로 에밀리아를 바라보고 있다.
“진짜네.”
“왜 왔지?”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제발, 제발 그냥 지나가라….”
수근 대는 건달들의 목소리를 들은 에린은 수상쩍은 얼굴로 에밀리아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에밀리아, 도대체 여기서 뭘 한 거야?”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남성의 인생을 끝장낼 수 있는 방법이라며, 전마스터께서 프로그램 해두신 기술을 선보였을 뿐입니다.”
“그게 대….”
‘그게 대체 뭔데?’라며 물어보려던 순간, 에밀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방문 앞에 섰다.
에린의 질문을 다 들을 새도 없이, 에밀리아는 문을 열었다.
노크나 다른 인사도 없이, 마치 제집인양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에밀리아의 행동은 인간의 모습 그 자체였다.
문이열리고 방 안의 책상위에 앉아있던 검은 머리카락의 한 남자가 고개를 올려다보며 열린 문 쪽을 응시했다.
검은 안대를 하고 있는 남자의 매서운 눈매가 방안으로 들어온 에밀리아를 확인하고, 이윽고 그녀의 뒤, 문 앞에서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에린을 보고 인상을 찡그린다.
“그 남자가 아니군.”
“아…그게….”
“그리고 너는…그때 그 소녀인가?”
“……?”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에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기억 속에는 눈앞의 외눈박이 남자의 얼굴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째서 남자는 일면식도 없는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일까.
“…모르는 것 같군.”
에린의 어리둥절한 반응을 본 루난은 잠시 한숨을 쉰 뒤, 자신이 헤르샤 남매에게 해왔던 일을 스스로 그녀에게 고했다.
“나는 루난. 이 정보 길드 흑랑단의 단장이자, 애슈턴 아르미타스의 지시를 받아, 너와 네 오빠를 암살하려 했던 자들의 수장이지.”
“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자백에 에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고 이내 사나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루난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그때 나를 죽이라고 사주했던 암살자의….”
에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분노의 시선을 루난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다다닥
루난의사무실 안으로 점점 바닥을 차며 달려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에린은 본능적으로 뒤를 노리고 들어오는 살기를 감지하고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왔던 레이피어를 뽑아들고 곧장 임전의 태세를 취하려 했지만.
“서브 마스터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감지. 즉시 대응합니다.”
에린을 노리고 달려드는 위협에 더 빠른 반응을 보인 건 에밀리아였다.
에린의 앞쪽에 위치해있던 에밀리아가 몸을 돌려 뒤를 응시하고 에린의 옆쪽으로 다가와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맨손으로 쳐냈다.
카앙!
“아!?”
목에 칼을 가져다대고 에린의 무장을 해제시키려는 행동이 깔끔하게 저지되자, 당황한 여자의 새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단검과 함께 허공으로 튀어 오른팔을 살짝 점프하여 붙잡고 뒤로 꺾어버리며 등 뒤로 단단히 고정시킨 뒤, 남은 한쪽 팔로 습격한 여자의 머리를 붙잡아 허공에 떠 있는 체중에 힘을실어 아래로 내려 찍어버린다.
쿠웅
“크…으윽!”
순식간에 에밀리아에게 공격을 봉쇄당하고, 바닥에 이마를 쳐박힌 상태로 바닥을 기고 있는 굴욕적인 자세를 맛본 여자는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며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에린은 이를 갈며 자신과 에밀리아를 노려보는 시선을 느꼈다.
우드득
“꺄아아악!”
등 뒤에 한계까지 꺾어버린 여자의 팔을 그대로 비틀어버리자, 섬뜩한 소리와 함께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이기 시작한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에밀리아는 아예 위험의 근원을 확실히 제거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여버린 팔을 꽉 붙잡고 잡아당겼다.
“아, 아아아악!”
무표정으로 팔 자체를 뽑아버릴 기세로 뒤로 꺾인 팔을 잡아 뜯으려던 인형의 행동이 너무나도 과격하고 섬뜩하다.
“그만, 그만해! 에밀리아! 멈춰!”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에린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에밀리아의 행동을 제지시켰다.
에밀리아는 팔을 뽑아버릴 기세로 여자의 팔을 잡아당기던 행동을 멈췄지만, 그녀를 봉쇄한 행동 자체를 풀지는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이 여자는 서브 마스터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던 인물. 공격수단인 이 팔을 아예 제거하여 위험 요소를 제거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런 X바알…!”
에밀리아에게 움직임을 봉쇄되어 머리를 바닥에 쳐 박고 있는 후드를 쓴 여자가 거세게 저항하며 인형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에밀리아는 그런 여자의 저항에도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도 사람의 팔을 뜯어버리려는 건 안 돼!”
“…….”
단호한 에린의 목소리에 에밀리아가 뚱한 표정을 짓는다.
에밀리아가 명령 권한을 가지고 있는 에린의 말에도 곧장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상위 명령권자인 은현의 명령과 에린의 명령이 충돌하면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현이 에밀리아에게 내린 명령은 단 한 가지, ‘에린과 일리아나에게가해지는 위협의 근원을 철저히 배제하라.’
그렇기 때문에에밀리아는 주인인 은현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평소보다 과격한 방법으로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최상위 명령권자인 은현이 내린 명령과, 현재 자신 앞에 있는 에린이 최우선으로 내린 명령 중에서, 보통에도 은현의 명령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옳았지만, 왠지 모르게 에밀리아는 에린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에밀리아 자신도 알 수 없는 의문을 느끼며, 행동을 속행하거나 멈추는 애매한 경계선상에 있다.
“라나, 저항을 멈춰라.”
“다, 단장! 하지만 이 여자애는…!”
“멈추라고.”
“크으…으!”
에밀리아의 밑에 깔려, 거세게 저항하던 후드를 쓴 여자는 낮은 목소리에 실린 위압적인 루난의 명령에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몸의 힘을 풀고 저항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군. 다짜고짜 네 뒤를 노리는 공격을 해 와서. 저 아이는 뒷모습만으로 너를 알아보고 네가 복수를 위해서 이곳을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겠지.”
“…제가 말인가요?”
“X발! 이거 놔!”
자세히 후드를 쓴 여자를 바라보니,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귀에 익었다.
- …네 신변을 원하는 분이 계신다. 조용히 따라와 줬으면 좋겠는데?
“아….”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던 끔찍한 기억.
그러면서도 절대로 떠올리고 싶지않았던 당시의 두려움과 절망감을 떠올리고, 에린이 표정을 굳힌다.
“설마, 당신은 그때 옥상에서 오빠의 거짓 정보로 나를 속여 유인했던 그…암살자?”
“그렇다.”
에린의 싫은 추측에 긍정을 한 건 여자가 아닌 그의 상사인 루난 쪽이었다.
“…….”
에린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현이는…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
은현에 대한 알 수 없는 서운함이 그녀의 가슴 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은현에게 보냈던 편지가 정보 길드, 흑랑단의 단장이 보낸 것이라는 뜻은, 뒤에서 두 사람이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사건의 주모자였던 애슈턴을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고, 방치했던 것과는 또 경우가 틀리다.
명백히 엘빈을 암살하려 했고, 자신을 위협했던 이들과 모종의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니까,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어째서…?’
믿고 의존하며 커다란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던 은현의 행동에 한 번도 의문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에린은 처음으로 자신을 이끌어주는 존재에 대한 알 수 없는 의문을 느끼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루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린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태도는 마치 재판장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와도 같았다.
“왜…나한테 이런 말들을 다 해주는 건가요?”
“네가 그 녀석의 제자이기 때문이지.”
“현이가 관계가 있나요?”
“너는 이쪽 음지에서 그 남자가 이번 사건으로 어떤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는 것 같군.”
“…….”
에린은 루난이 언급한 ‘이번 사건’이라는 것이 엘레노아의 납치와 레니온 헤르샤를 앞세운 배임횡령을 주도한 공작 가문의 논란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대략적인 사건과 주모자 중 하나인 애슈턴이 신전에 구금되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지,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언젠가는 애슈턴을 직접 끌어내리고, 그에게서 사과를 받고 싶었던 에린에게는 애슈턴의 자멸이 굉장히 기쁘면서도 복잡한 소식이었다.
“약속하지. 앞으로 너에게 일체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 애초에 이제우리의 목숨은 그 남자와 공작가문에 걸려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섣불리 너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저 사람은 방금 전에 제 목에칼을 들이대고 절 위협하려 했잖아요.”
“내가 대신 사과하지. 라나를 풀어줄 수는 없겠나?”
“…….”
에린은 루난의 부탁에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천천히 다가가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안자, 바닥에 깔려 움직임을 봉쇄당한 라나와 시선을 맞췄다.
여자의 머리에 깊게 눌러써진 후드를 젖히고 감춰진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머리의 위에 쫑긋 세우며 경계의 기색을 띠고 있는 짐승의 귀를 보고, 에린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인?”
“뭘 쳐다봐!”
에밀리아에게 제압당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라나는 표독스럽고 공격적인 태도를 풀지 않았다.
마치 자신에게 위협을 가해오려는 존재에 대해 경계의 태세를 취하고 있는 야생동물과도 같았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나요?”
“…아니.”
“그런데 왜 나를 공격했나요?”
“너는…우리에게 보복을 하러 온 거잖아. 그때 너를 납치하려 했던 우리 정보 길드에 앙심을 품고….”
“아닌데요.”
“뭐?”
에린은 라나라는 이 수인 여자도 애슈턴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린에게 위해를 가했던 전적이 있었던 만큼, 성장하는 에린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며 자신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 상상하고, 성급한 판단을 내린다.
결국 선을 넘어버린 애슈턴처럼 라나 또한 앞뒤 분간을 가리지 못하고 멋대로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에 불과했다.
“그럴 목적으로 온 거 아니라고요.”
“…우리에게 보복을 하러 온 게 아니야?”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들을 용서한 건 아니니까.”
“그럼…!”
우우웅
“지금 움직이면, 정말로 저도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호족요술(狐族姚術)]
[감정왜곡]
에린은 경고의 싸늘한 목소리를 입에 담으며, 그녀의 공격성을 아예 없애버리기 위해 몸속에 있는 요호(妖狐)의 기운을 개방했다.
“으…읏!”
숨이 가빠지고, 입도 뻥끗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짓누르는 압박감을 느끼며, 라나는 신음을 내뱉었다.
‘뭐…야.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