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166. 진짜 배후(1)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페르니아스 왕국에는 겨울이 찾아왔다.
공작가문이 무너질 뻔 한 큰 사건이 끝난 이후, 페르니아스 왕국 전체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첫 번째 이유는 전소공작인 애슈턴의 고발로 인해, 공작가문이 몰락할 뻔 했던 대사건.
두 번째 이유는 베스타 신전의 대주교인 아니에스가 공작가문의 여식인 엘레노아를 자신의 후임으로 삼았음을 궁정회의에서 왕가와 귀족들에게 대놓고 선언한 사건.
세 번째 이유는 그 성녀 후보로 내정된 엘레노아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은현과의 결혼 예정이라는 사실이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인 아브로스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유는 아르티아에서 대대적인 수사를 통해 레니온 헤르샤의 배임횡령에 동참했던 귀족들을 차례차례 잡아들여 그동안 횡령했던 금액들을 모두 토해내게 만들고, 아브로스처럼 벌금형을 내려 징수하는 절차가 이루어지면서, 왕국의 겨울은 매우 소란스럽고, 살벌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서, 검은 마녀와 성녀 후보를 동시에 아내로 맞이하는 은현의 존재가 더더욱 부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은현이 보호자로서 돌봐주고 있는 에린에게까지 영향이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
“일리아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
뜬금없는 한 학생의 질문에 에린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남학생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왜 아무런 대답도 없지? 검은 마녀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아니….”
“돈을 원하는 건가?”
“아니, 그러니까….”
느닷없이 수업 시작 전에 대뜸 자신을 찾아와 몇 번인지 모를 똑같은 질문을 해오는 것이 요 1년 동안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은현에게 구해지고, 일리아나의 저택에서 생활한지, 거의 9개월이 지난 지금, 에린은 아이테르 내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제법 상급생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음에도 이 부분만큼은 바뀌지가 않았다.
어떻게든 일리아나와 연줄을 만들어보려고 에린에게 접근해오는 마법사 지망의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저는 일리아나님의 제자가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평민이나 다름없던 네가 어떻게 그만한 수준의 실력을 갖출 수가 있는 거지? 그분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이룰 수가 없어. 순순히 그 비법을 말하거나, 나를 마녀님에게 소개시켜라. 그렇다면 내가 너를 특별히 나의 파벌에 넣어주도록 하지.”
이런 명령에 가까운 제안을 수도 없이 받아본 에린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
아이테르의 누구도 에린의 성장을 에린의 노력의 결과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일리아나와 은현이 모종의 술수를 부려 그녀의 마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모종의 술수를 캐내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언제나 에린에게 말을 걸어 똑같은 질문을 한다.
그녀의 비약적인 성장의 원인에는 틀림없이 신수의 힘과 은현의 하드한 트레이닝 덕분이었으나, 그 훈련을 견뎌내고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던 것은 틀림없는 에린의 의지와 노력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고생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에린은 이런 귀찮은 반복의 연속에 대해서 은현에게 한 번 푸념을 늘어놓았던 적이 있었다.
-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도르마무 현상이라고 하지.
도대체 도르마무 현상이 무엇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것도 에린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못을 박았다.
“제 성장은 엄연히 제 노력의 성과입니다. 일리아나님의 도움은 일절 받지 않았으며 꾸준한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낸 성장이니, 다른 수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업이 시작하니 돌아가 주세요.”
“감히…!”
에린의 말투에서 자신을 귀찮게 여기고 있다는 감정이 묻어나왔기 때문인지, 남학생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지며, 노기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우웅
그에 맞춰 에린이 기다렸다는 듯 마력을 일으켜 남학생을 압박했다.
“크…윽!”
전신을 뒤덮어오는 에린의 마력에 숨통이 옥죄어오는 감각을 맛보면서, 남학생은 에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에린은 그런 남학생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수업, 시작한다고요.”
그의 숨통을 옥죄었던 마력을 풀어버리자, 후들거리던 남학생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젠…장….”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타인에게, 그것도 평민이나 다름없는 준귀족의 소녀에게 기세로 짓눌려 바닥에 주저앉았다는 사실에 참기 힘든 굴욕감을 느꼈지만, 결국엔 황급히 자신의 몸을 일으키고 강의실을 나가 자리를 피했다.
“후우….”
에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교과서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수업의 준비를 마쳤다.
신수의 힘을 각성시킨 이후, 꾸준한 훈련을 통해서 성장한 에린은 이제는 아이테르 내에서 전 학년을 통틀어도 최상위권의 성적을 차지하는 수준의 무력을 손에 넣으면서, 그녀의 입지는 많이 나아졌다.
더 이상 에린을 괴롭히고 업신여기는 학생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녀를 조롱하거나 비난의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런 것이며, 속으로는 아직도 평민의 핏줄인 자신을 무시하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을 에린은 알고 있었다.
애써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며, 에린은 담담히 수업의 내용을 들었다.
‘마르바는…오늘도 안 왔네.’
에린이 예전부터 자신을 괴롭히고, 업신여기며 무시했던 여학생들 중 우두머리 격에 해당했던 마르바의 모습을 아직도 찾는 것은 거의 습관에 가까웠다.
이제는 그녀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심 같은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과거의 수많은 괴롭힘을 통해서 몸에 배인 습관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더 이상 그녀와 그녀의 무리들에 시달릴 일도 없던 문제지만, 머릿속 한 쪽에 떠오르는 의구심을 떨쳐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 ◆ ◆
“에린, 괜찮다면 함께 저녁식사라도….”
“죄송하지만 바빠서요.”
언제나처럼 남학생들의 권유를 칼같이 거절하고, 학교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에린은 아이테르를 나왔다.
“으음, 광장에 들렀다가 뭣 좀 먹고 들어 가볼까?”
요즘 들어 시간이 갈수록, 운동량이 늘면서 먹성도 좋아진 에린은 광장의 노점에 들러 군것질을 하고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은현이 따로 챙겨주는 용돈도 있고, 훈련을 제외하면 에린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만큼, 통금시간만 지켜준다면 은현도 에린에게 심한 간섭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엘레노아님도 현이랑 결혼을 하게 될 줄은….”
오히려 최근에는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와의 결혼식 준비로, 일정을 맞추고, 장소의 섭외와 의상 준비 등 때문에 은현이 매우 바빠서 에린에 대한 신경을 써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
“결혼…. 좋겠다아….”
요즘의 에린의 훈련은 평소대로의 훈련 매뉴얼을 통해서 에린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행하고 있으며, 에린에 대해서 크게 상관하지는 않았다.
등교부터 하교, 게다가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써주던 초창기와는 매우 다른 대우였지만, 은현이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불만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외롭다면 외롭긴 하지….”
어쩔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쓰게 웃고는 혼자서 노점을 걷는다.
“아저씨! 닭꼬치 5개 포장해주세요!”
“오? 아가씨, 오늘도 왔군? 자, 여기 있다!”
“헤헤, 고맙습니다!”
값을 지불하고 꼬치가 든 작은 봉투를 받아든 에린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흐흐, 아가씨가 맛있게 먹어주니, 나도 기분이 좋지! 또 오라고!”
닭꼬치 가게의 주인의 기운 넘치는 인사를 받으며, 에린은 봉투 안에서 꼬치를 하나 꺼내 고기를 씹으면서 거리를 걸었다.
“응…?”
광장을 걸으며 집으로 향하던 도중, 에린은 입으로 가져다대는 꼬치를 쥔 손을 멈추고, 발걸음도 멈춘 채로 골목길의 한쪽을 응시했다.
“방금…?”
머리카락의 색깔과 모양, 그리고 체구 등 익숙한 실루엣의 소녀의 모습을 확인한 에린이 멍하니 소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마르바?”
다급하면서도 잔뜩 긴장감이 서려있던 마르바의 옆얼굴을 보았던 에린은 미심쩍은 무언가를 감지했음을 느꼈다.
발소리를 죽여 마르바가 들어갔던 골목길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주위에 인기척이 있는지 없는지를 계속 확인하면서 마르바의 기척을 쫓기 위해, 주위에 마력을 전개했다.
“으….”
은현에게서 배운 ‘감지’의 기술을 펼친 에린은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는 대량의 정보에 자연스레 인상을 찡그렸다.
주위 건물들의 구조, 범위 내의 사람들의 숫자, 사람들의 움직임.
전개한 마력을 통해서 자신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정보들을 다 처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약간의 두통을 느낀다.
은현의 반의반도 안 되는 좁은 범위로 전개를 하였음에도, 고운 이마를 찡그리게 만드는 정보의 양을 처리하면서, 새삼 은현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는다.
“찾았다.”
그렇게 두통을 참아가면서 마르바의 위치를 특정한 에린은 감지를 통해서 들키지 않을 위치를 물색하여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르바의 근처의 위치에 숨어 자리를 잡고 머릿속의 두통을 일으키는 감지의 마력을 거두어 들인다음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마르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기가 틀리잖아! 어째서 전에 얘기했던 금액하고 틀린 거야! 더 비싸졌잖아!”
“그거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니까, 그만큼 경쟁의 수요도 붙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이게 내가 가진 돈의 전부야….”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워야하지 않겠어?”
“킥킥킥.”
“당장 데려가자고!”
“가, 가까이 오지 마!”
그리고 낄낄거리는 다수의 남자들의 목소리와 조소가 섞인 대꾸.
다수의 남자들과 마르바의 목소리를 들은 에린이 표정을 굳혔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목소리들만 들어서는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에린은 좀 더 그들에게 가까이 접근하려 한 순간.
“야, 뭐야. 너.”
“읏…!”
어깨가 우악스럽게 붙잡히자, 에린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보다 덩치는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거구, 자신의 어깨 전체를 꽉 쥐는 거대한 손을 가진 험악한 인상의 남자를 확인한 에린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를 바라보고 무심코 중얼거렸다.
“대, 대머리….”
“아? 이 년이 지금 누굴 놀리나!”
안 그래도 많은 칼자국으로 험한 인상을 가지고 있던 남자가 에린의 중얼거림을 듣고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몰텐! 무슨 일이야!”
남자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골목길을 가득 채우자, 마르바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가 에린과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있는 방향을 보며 외쳤다.
에린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있던 남자, 몰텐이 거칠게 에린의 어깨를 움켜쥔 채로 강한 악력을 발휘하여 골목에 숨어있던 에린의 몸을 강제로 끄집어낸다.
“으윽!”
거칠게 끌려나오면서 무심코 손에 쥐고 있던 닭꼬치를 놓쳐버리고 만다.
“아! 내 닭꼬치가!”
에린이 허망한 표정을 짓건 말건, 잔뜩 화가 난 몰텐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 년이 몰래 숨어서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잖아! 심지어 날 보고 대머리라고 했다고!”
“아니, 너 대머리 맞잖아.”
“맞는 말 했는데?”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지며 분노하는 몰텐이라는 남자의 말에, 마르바와 대화를 하고 있던 다른 남자들이 재미있다며 낄낄거렸다.
그리고 몰텐의 손에 붙잡혀 모습을 드러낸 소녀의 모습을 보고, 마르바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을 짓는다.
“…에린?”
“흐음? 아는 사이인가?”
당황한 마르바의 표정을 보고, 그녀의 말에 조소했던 남자가 눈썹을 치켜뜨며 에린의 얼굴과 몸을 훑었다.
“오. 상등품.”
“으….”
자신의 몸을 품평하는 시선에 기분이 나빠진 에린이 인상을 찡그린다.
‘실수했어….’
마르바와 남자들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서, 자신의 뒤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에 에린이 속으로 크게 통탄한다.
아무리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꾸준히 했다 하더라도, 돌발 상황의 대응에 미흡하며 경험이 부족한 에린은 아직도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어쩌지…?’
“저, 저 애는 상관없어! 돌려 보내줘!”
“그럴 순 없지. 여기서 우리들의 대화를 들었는데. 게다가…얼굴하고 몸도 반반하고.”
빈약했던 이전과는 달리, 건강해지면서 발육의 상태도 일반적인 소녀들의 몸과 달리, 에린의 몸은 차원이 틀리다.
자신의 몸을 훑는 음흉한 시선을 느끼고, 에린은 이 남자들이 자신과 마르바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해야 할 행동은 한 가지.
에린은 재빠르게 눈을 굴려 주위를 확인했다.
마르바와 대치한 남자들의 숫자는 셋,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거구의 남자까지 포함하면 넷.
행색이나 인상은 영락없는 슬럼의 건달들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마력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
저항한다면 마르바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안을 텐데, 어째서인지 마르바는 건달들의 강압적인 행동에도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리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럴 바엔.
‘일단 저지르자.’
저항하는 쪽을 선택하고, 고민을 마친 에린은 재빠르게 자신의 몸의 마력을 전개했다.
우우웅
“응?”
“엉?”
마력의 공명음을 들은 건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자신의 신체를 강화한 에린이 행동을 개시한다.
한쪽 발을 들어 올려, 있는 힘껏 아래를 내리 찍는다.
“크아악!”
에린이 자신의 뒤에 서서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거구의 건달, 몰텐의 발을 자신의 발뒤꿈치로 내려찍어버리자, 몰텐이 비명을 지르며 에린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자신의 발을 움켜쥐기 위해 몰텐의 상체가 아래로 숙여졌다.
자신과의 상체의 높이가 맞춰진 틈을 타, 에린은 자신의 팔꿈치를 앞으로 뻗었다가 있는 힘껏 뒤로 내질렀다.
“크헉!”
몰텐의 숙여진 상체, 명치 부분을 팔꿈치로 정확히 가격 당하자, 몰텐의 몸이 뒤로 밀려나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야…뭐야 저년….”
거구의 남자와 연약해 보이는 소녀의 신체적인 격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력의 사용 여부가 그 격차를 우습게 뒤집어버리는 광경을 목격하고 건달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한다.
마르바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대표 격의 건달이 자신의 동료들에게 눈짓을 하고 닭꼬치가 든 봉투를 들고 있는 소녀를 응시하며 외쳤다.
“조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