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164. 화풀이(1)
“그리고…중요한 건 지금부터죠.”
“뭐지?”
“엘레노아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호위 기사 둘이 공녀님을 지키다가 희생되었던 건 말입니다만. 실제로 그때 당시 호위 기사들과 전투를 벌였던 자들과 조우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라.”
아브로스의 표정이 굳어지며 은현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가문의 기사 둘을 죽인 이들이었기에,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수는 스무 명이 넘었고, 그 중 약 다섯 명을 죽이고 도주해야만 했습니다.”
“너에게도 역부족일 정도로 강했나?”
“아니요. 상대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습니다만, 그녀의 몸 상태도 불안정했기에 일단은 그녀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는 것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렇군.”
아브로스는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딸의 안전을 우선시하며 행동한 그의 판단을 뭐라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냥개’라고 칭하더군요.”
“사냥개라….”
“두목의 이름은 ‘바론’이라며 자기 자신을 소개했었습니다.”
“곧바로 수소문해보도록하지.”
“그리고 애슈턴은….”
순간 은현은 말을 끊고 아브로스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다. 얘기해라.”
“애슈턴은 자신의 뒤에 악마가 있다고 저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악마라고?”
“네.”
어두운 밤 시간대였다고는 하지만, 수도의 가도 한복판에서 버젓이 일어난 사건이었다.
“저는 이 사건이 애슈턴 개인이 독단으로 꾸밀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보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 말은….”
“있다는 겁니다. 뒤에서 페르니아스 왕국에 귀족파벌들 간의 진흙탕싸움을 유도하여 혼란을 조장한 자가.”
그것이 진짜로 악마이든, 악마를 자칭하는 인간이든.
“네 녀석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도 당연히 있었겠지?”
은현이 아무런 확신도 없이 이런 말들을 지껄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아브로스와 알렉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현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헛소리라고 치부하지 않는다.
“첫 번째, 엘레노아 공녀님의 호위 기사들을 살해한 자들의 실력은 둘째 치고, 밤중이라고는 하더라도 수도 한복판에서 치열한 칼부림이 난자하는 소란을 주민들이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건 너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발견되었을 당시 두 호위 기사들의 시체는 가도 한복판에 머리가 잘린 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흐음.”
“모종의 수단으로 소리를 지우고, 높은 수준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공작가문의 기사 둘을 죽일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자들을 애슈턴이 고용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실력 있는 자들을 고용하여 일을 벌이고자 한다면, 틀림없이 고용하는 것에만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지도 모른다.
애슈턴과 바르크는 사정은 다르지만 어찌되었건 부모의 위광을 잃고 버려진 낙동강 오리알 신세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거기서 과연 그런 비용을 마련할 수가 있었을까.
현실적으로 무리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은현의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엘레노아 공녀님을 납치하고 이동시킨 텔레포트의 존재입니다. 공작께서도 아시다시피, 페르닌에서 린데발트 령까지의 거리는 절대로 하루 만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죠. 제가 단기간 안에 엘레노아를 구해내고 이곳으로 데려왔던 것처럼, 이 사건을 조장한 상대방도 그런 모종의 수단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 모종의 수단이 텔레포트라는 건가?”
“네. 저와 조우했던 사냥개들은 도주하고 있던 애슈턴을 쫓는 와중에, 제 눈앞에서 텔레포트를 통해 직접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마도 엘레노아를 납치하여 린데발트 령으로 전이시킨 것도 텔레포트겠죠.”
“누군가가 애슈턴과 바르크를 엮어서, 내 집안을 무너뜨리려 했다…라는 건가?”
“제 추측으로는 그렇습니다. 그 배후에 있는 악마라는 존재가 진짜로 악마인지, 아니면 악마를 자칭하는 미치광이인지는 아니에스 쪽의 심문을 통해서 알아봐야겠지요. 단지….”
지난번 마리우스 홀튼이라는 메디아의 제자였던 사령술사의 출신지도 에레니아 신성국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꺼림직 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튼 제 쪽에서 알아낸 정보와 추측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벌금으로 납부했던 백금화 다발은….”
“알고 있다. 성검 복원 이후 남아있던, 우리에게 넘겼던 백금화였다고 엘레노아에게서 들었으니까. 애초부터 네 돈이었다. 너에게 우리 가문과, 공작령의 영지민들이 구해진 거나 마찬가지야. 재차 감사 인사를 전하지.”
선뜻 호의와 함께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숙이는 아브로스의 태도는 명백히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거북함을 느낀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참금으로 생각해주시죠. 그리고…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엘레노아의 마음을 눈치 챈 건, 알렉스 쪽이었다.”
“…너였냐?”
“애석하게도, 가끔가다 너를 바라보는 엘레노아의 표정이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표정보다도 남달랐으니까.”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일리아나와 똑같은 말을 하는 그의 말을 듣고, 은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그러더군.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하고 남의 연애사 듣는 거라고”
‘이런 X발?’
은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신이 이전에 알렉스에게 했던 대사를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이거 네 동생 얘기야.”
“그래서? 날짜는 언제지?”
본래라면, 결혼 전에 공작가문의 고귀한 몸인 엘레노아의 순결을 빼앗은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비난을 받을 각오도 하고 온 것이었는데, 엘레노아를 끔찍이 아끼는 두 사람의 반응이 너무나도 호의적이라, 은현 쪽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결혼 전에 벌써 관계를 가진 것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미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엘레노아에게 모두 들었으니…오히려 그 상황에서 동생을 지켜준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을 뿐이야.”
“…알았어.”
은현은 알렉스와 아브로스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전에 구금된 애슈턴의 건은…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제가 심문할 생각입니다.”
“그렇군. 이제는 완전히 내 손을 떠난 자식이다…. 더 이상 감싸줄 여유도, 마음도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양보로 표현했지만, 양보가 아니다.
허가를 하는 아브로스의 얼굴에는 분노, 실망, 체념, 경멸 다양한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브로스에게 이것은 양보가 아닌, 도피에 가까웠다.
그런 그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은현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 ◆
“가만 보면 넌 사람 빡치게 만드는데, 재주가 참 장난이 아니야. 알아?”
“뜬금없이 뭔 소리야?”
신전의 지하 감옥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아니에스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비아냥댔다.
영문을 모르겠다며 되묻는 은현을 보고, 아니에스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답했다.
“아무리 나라가 지금 개판이라고 해도, 어떤 미친놈이 면전에다 대고 나라의 왕비한테 그딴 식으로 시비를 터냐고. 나도 우리 신전의 교황한테 그딴 소리를 지껄여본 적이 없었는데, 나중에 리오드한테 어떻게 일을 처리 했나 들어보니까 아주 가관이더라?”
“아, 좀 스트레스가 쌓여있긴 했지. 나라고 좋아서 저것들을 지금까지 방치했던 게 아니니까.”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질린 기색을 보이는 아니에스에게 대꾸했다.
엘빈을 배신하고, 에린을 납치하여 일방적인 폭행을 저지른 애슈턴.
에린을 강간하려 했던 아이테르의 학생 둘.
나라의 예산을 빼돌린 귀족들까지.
모두 처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처리 할 수 있었으나, 그로 인해 가져오는 결과는 이 나라의 혼란이다.
게다가 이 나라의 귀족도, 백성도 아닌 은현에게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권한도 구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은현은 지금까지 그들의 잘못을 직접 처단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을 선택했다.
언젠가 성장한 에린이 자신의 가치를 왕국에 증명하면서 그들의 처우를 에린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도록,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이고, 한 번 만 더 스트레스 풀려고 하면 아주 나라도 무너뜨리려고 하겠네. 무덤에서되살아났더니, 너 좀 바뀐 거 알아?”
“바뀌었다고?”
“예전에는 이런 정치싸움이나 문제에 크게 개입 안했잖아. 누가 죽던, 납치당하건,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으면서. 우리가 가자고 의견을 내지 않으면, 철저히 방관했잖아.”
‘그건 너희들의 영웅의 이야기니까.’
엑스트라였던과거, 자신의의사와 행동은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의 은현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국가의 일에 관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은밀하고 조용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도록 뒤에서 꾸미고, 리오드나 아니에스 같은 영웅들이 앞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리오드나 팀원들이 어떤 문제의 해결에 나서자고 은현에게 요청을 할지언정, 은현 쪽에서 팀원들에게 무언가를 요청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은현과 인연을 맺었던 누군가가 은현에게 도움을 요청해 와도, 그것이 리오드를 포함한 영웅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매정하게 그 도움을 거절했던 적도 있었다.
그랬던 자신이 이제 와서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서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역시, 이제 와서 이렇게 나서는 건…이상하냐?”
은현은 쓰게 웃었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효율적으로, 유용하게 내다버리는 방식을 고수해왔던 자신이, 아무리 베르단디가 허락했다지만,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에는 아직도 거부감이 존재했다.
은현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책감, 책임감이 신의 사도로서 부여된 사명에 강제로 씌워진 그의 양심을 콕콕 찌른다.
“뭔 븅신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그런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현을 보며 아니에스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15살짜리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세상에 찌들어버린 어른의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매우 이질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은현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야,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괜히 있냐? 니가 니한테 더 소중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챙기겠다는데, 대체 누가 뭐라 그래. 니가 이 나라 왕이야? 귀족이야? 관계도 없는 일반 백성들을 다 끌어안아서 먹여 살릴 책임이라도 가지고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잘 알지. ‘신의 의지’. 나도 신을 모시는 사제니까 그게 어떤 종류의 제약인지 어렴풋이 알아. 신성력이라는 건, 사제를 사제로 만들어주는 힘이면서 굉장히 까다로운 힘이니까.”
하계의 멸망이라는 운명을 비틀어내어 세상을 구원하라는 사명과 함께 은현의 영혼에 깃든 신의 권능은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따뜻함으로 끌어안아 구원하는 사제들의 신성력과 매우 유사한 특성을 가졌다.
또한 신성력이라는 힘은 굉장히 모순된 특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르칸 같은 쓰레기도 신의 힘을 빌려다 쓰면서 그렇게 자기 배만 불릴 줄 아는 새끼가 있는데,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자기 아들을 끝까지 감싸다가 집안 전체가 망할 뻔한 공작 가문도 있는데. 너라고 신의 힘으로 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야, 너 그거….”
은현은 굉장히 민감한 발언에 인상을 찡그렸다.
“알아. 신성 모독 같은 발언인거. 근데 니가 하르칸이나, 잘못을 저지른 지 자식을 감싼 공작 같은 멍청한 짓에 신의 힘을 쓰고 있는 건 아니잖아. 니가 지금 신의 힘을 사용하는 이유는 네 사람들을 지키고 돕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 아니야? 그게 잘못된 거야?”
“…….”
“좀 융통성을 발휘해봐.병신아. 넌 누구에게나 너무 공평해. 심지어 악인들이나, 너 자신에게도.”
자신을 엿 먹이고,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악인들을 찢어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그 악인들을 살려둬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은현은 그 충동들을 꾹 참아내고 언제나 이성과 효율을 중시하는 선택을 내려왔다.
“난 너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도 모르고, 무슨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 할 수도 없어. 몇 백 년을 살아온 너에 비하면 난 고작 40년 남짓 밖에 안 살았으니까. 그래도 니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왔던 선택들이 다 정답도 아니잖아.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니가 지금 그딴 표정을 지어?”
“…정답이 아니더라도 그 선택들을 골라야만 했던 순간들이 있잖아.”
“그렇지. 그건 사람들의 위에 있는 위정자들이라면 물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 이니까. 근데 너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 감정의 충동에 이성을 잃고 폭주하지 않는 건 네 장점이지만, 그렇게 꾹 참고 계속해서 멘탈이 너덜너덜해져가는 건, 너 자신에게도 안 좋고, 너를 보고 있는 주위사람들에게도 안 좋아. 니가 뒤지기 전에도, 네 그런 부분 때문에 일리아나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모르지?”
“…전혀 몰랐어.”
“적어도 이제부터는 예전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기로 했으면, 그딴 고민은 빨리빨리 해결해야지. 질질 끌면 그게 나아지냐?”
“…뼈가 아프네.”
팩트로 얻어맞는 기분에 은현이 쓴웃음을 짓는다.
400살이 넘는 자신이, 40살 남짓 먹은 아니에스에게 인생사의 고민에 대해서 훈계를 듣는 것은 굉장히 기묘한 기분이었다.
“애인도 둘이나 있는 새끼가 그렇게 븅신 같은 면상을 하고 있으면, 보고 있는 내가 다 숨이 막혀. 그러니까좀 주위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마음잡아.”
아니에스는 은현의 그런 태도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것은 자신의 답답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그의 주위에 있는 두 여자가 더 신경 쓰였기 때문.
“넌 X발, 진짜로 그 X같은 멘탈어떻게 안하면, 앞으로 일리아나는 물론이고 내 후임인 엘레노아까지 마음고생 존나게 할 텐데, 너 때문에 일리아나가 나한테 푸념하러 오는 건 물론이고, 내 후임의 멘탈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꼴은 절대로 못 봐. 니 뒤치다꺼리를, 왜 내가 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어.”
“그, 그래.”
“빨리 마음 다잡고 정리 안하면 니 아가리 속에 옥수수들 다 뽑아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알겠어?”
아니에스가 벌써 괜히 짜증난다는 듯 은현의 다리를 걷어찼다.
일방적인 경고에 가까운 말을 들으며, 쓴웃음을 짓고는 은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두사람은 지하 감옥의 입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