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3화 〉163. 형량협상(3) (163/730)



〈 163화 〉163. 형량협상(3)

“…….”

“그리고 저에게는 저들을 꼭 심문해야만 하는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뭐죠?”

“저들이 납치한 엘레노아 공녀가  후임이기 때문이죠.”

“후…임? 아!”

아니에스의 후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디아네 왕비가 경악한 시선으로 엘레노아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 아니에스의 후임이란 것은 장차 베스타 신전의 대주교, 또는 다음 대의 성녀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이럴 수가….”

“엘레노아 공녀가 다음 대의 성녀…?”

“어떻게 갑자기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이 차례차례….”

너무나도 순식간에, 갑작스럽게 터진, 믿을  없는 사실이었지만, 현재의 성녀인 아니에스 장본인이 내뱉은 말이었기에 그 누구도 거짓으로 치부하거나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소란스러운 회의장의 중심에서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잔뜩 동요한 디아네 왕비를 바라보며 아니에스가 말을 이었다.

“적어도  정도면, 저희 쪽에서 저 둘을 데려가 심문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크윽….”

다름 아닌 다음 대의 성녀를 납치하도록 꾸민 대역죄인 들이다.
이 이상의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하던 디아네 왕비도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떨기만 할 뿐,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럼, 저 두 죄인의 심문은 신전 쪽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덴.”

“예.”

“옮겨.”

“알겠습니다.”

아니에스의 명을 받은 아르덴이 자신의 동료성기사 하나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휘청거리는 애슈턴과 기절해있는 바르크를 연행하며 회의장을 떠났다.

“왕비마마의 배려 넘치는양보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굳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아니에스를 바라보며 디아네 왕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벌레 씹은 얼굴로 표정관리를 못한 디아네 왕비가 이윽고 입을 연다.

“두 안건이 모두 마무리가 되었으므로, 이번 궁정회의를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귀족들의 인사도 받지 않고 기분이 나쁜 티를 숨기지 않으며 곧장 회의장을 나가는 디아네 왕비를 뒤로하고, 회의가 끝난 회의장의 내부의 분위기가 단번에 소란스러워졌다.
소란의 원인은 두 가지, 아르미타스 공작가문 전체에 씌워져있던 배임횡령의 죄가 은현의 백금화를 통해서 깨끗이 지워진 것에 대한 분개.
돌발적으로 등장한 베스타 신전의 대주교의 행동과 그녀가 터뜨린 다음대의 성녀로 엘레노아를 지목한 것에 대한 경악.
이외에도 비리를 저질러 조만간 수사를 통해서 자신들의 죄가 밝혀진다면, 벌금을 토해내야하는 많은 수의 귀족들.
다양한 감정들이 휘몰아치면서 회의장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일어나실 수 있으십니까?”

“벌써 노인취급하지 마라. 아직 건강하니.”

“애슈턴의 일은….”

“됐다. 이제는…포기해야 하는 거겠지…. 신전에서의 심문은 네가 진행할 예정인가?

“네.”

“그렇군…. 알았다.”

아브로스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상황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음을 너무나도 간단히 이해했다.
오히려 자신의 안일한 판단으로 엘레노아의 인생까지 망가질 뻔 했다는 사실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상태.

“곧바로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벌써 사위행세를 하는 건가?”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은현은 쓰게 웃으며 아브로스의 노려보는 시선을 받으며 대꾸했다.

“공작께서도, 알렉스에게도, 엘레노아에게도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공작부인께 안심을 드려야하는 것이 최우선일 테니까요.”

“배려는 고맙군.”

아브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알렉스와 함께 천천히 엘레노아에게로 걸어갔다.
소란스러운 회의장 내부에서 많은 귀족들이 눈치를 보며, 아브로스의 행동을 흘끔거리며 살폈다.

“아버지….”

아브로스는 자신에게 다가온 엘레노아를 차분히 응시했다.

“성검은…차분히 생각하고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겠지?”

“물론이에요. 집에 가서 다 설명해드릴게요. 분명 납득하실 수….”

“그래. 그거면 됐다.”

아브로스는 엘레노아를 품에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잘 돌아왔다. 무사히 잘 돌아와 줬어. 결국  안일한 판단 때문에, 네 인생까지 망가뜨릴 뻔 했구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아….”

강한 힘으로 끌어안아진 엘레노아가 우악스러우면서도따뜻한 아버지의 품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에 눈물을 흘렸다.
정말로 모든 일이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에서 긴장이 풀려 흐르는 눈물에, 엘레노아는 말을 잇지 못하게 작게 탄식했다.
이내 엘레노아도 아브로스를  끌어안으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고맙다. 동생을 데려와줘서.”

“감사의 인사는 받을게. 그것보다….”

은현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할 얘기가 참 많으니까. 조만간 내가 저택으로 찾아뵐게.”

“물론. 성대하게 환영하도록 하지. 이제는 매부라고 불러야하나?”

“그냥 이름 불러, 이 자식아. 소름 돋으니까.”

은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알렉스의조롱에 대꾸했다.

◆ ◆ ◆

“왔어?”

“현아! 왔구나?!”

집으로 들어온 은현을 일리아나와 에린이 동시에 반겼다.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는지, 은현이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음식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혹시나 싶은 시선으로 물었다.

“…누가 만들었어?”

“같이.”

“같이?”

“헤헤, 일리아나님이 말이야.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알려드렸어!”

에린은 자신보다 높은 차원에 존재하는 것만 같은 까마득한 존재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알려주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쁜 모양이었다.
원래부터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던 에린은 아버지의 학대가 존재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꿋꿋이 버티며 성장시킨 자신의 요리 실력이 일리아나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뿌듯했다.

“흐음….”

“머, 먹어봐.”

살짝 긴장한 얼굴로 은현에게 자신이 만든 스튜를 권하는 일리아나의 태도가 웃겼는지, 은현은 피식 웃었다.
접시와 숟가락, 포크를 가져와 자리에 앉은 은현은 국자를 이용해 자신의 그릇에 스튜를 담고 떠먹어보고, 건더기를 입속으로 넣어 씹으며 맛을 음미했다.

“잘했네.”

“…정말?”

“응. 괜찮아. 간도 그렇게 세지 않고, 초보자치고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후후.”

그 말이 기뻤는지, 일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뒤늦게 합류하여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설거지를 마친 뒤, 방에 들어온 은현은 침대에 누워있는 일리아나를 꽉 끌어안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스으으.”

“갑자기  이래? 무슨 일 있었어?”

“그냥…. 네 냄새가 좋아서.”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고는 냄새를 맡는 은현의 행동에 어리둥절하면서도, 피식 웃은 일리아나는 은현의 포옹에 호응해주며 그의 몸을 끌어안아주었다.

“공작 가문하고  몰래, 무슨 얘기를 했던 거야?”

“응? 아~.”

뜬금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던 일리아나는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었어. 그냥…. 공작 쪽에서 부탁했거든.”

“부탁?”

“만약 엘레노아가 너한테 마음을 전하는 상황이 온다면, 적어도 받아들여 줄 수는 없겠냐는 부탁.”

“…너도알고 있었어? 엘레노아의 마음?”

“걔를 ‘공녀님’이라고 호칭을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는  보니 결국은 그렇게 됐구나?”

일리아나는 대강 짐작을 했던 일이었음에도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간 것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 챈지는 좀 됐지. 엘레노아가 너를 보는 표정이 정말 남달랐거든. 그러면서도 너에게 품고 있는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자각하고 너한테 마음을 전할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었어. 아마 공작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나한테 미리 양해를 구했던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지.”

“도대체 언제?”

“너가 성검을 복원시키고 곧장 골아 떨어졌을 때, 너를 눕히고 거실로 나와 보니까, 공작하고 소공작, 리오드 셋이서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있더라. 거기서 부탁을 받았지.”

“…너는 괜찮아? 우리 사이에 다른 여자가 껴도?”

“손대놓고 이제 와서? 내가 싫다고 했으면 엘레노아하고인연을 끊을 생각이었어?”

“…아니. 설득했을 거야. 엘레노아는…내 책임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포기한 거야. 이 책임감 덩어리야. 그리고 너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내가 했던 말도 어느 정도 작용했던 거지? 무사히만 돌아오면, 다른 여자를 만들어서 와도 용서해주겠다는 말.”

“…맞아.”

실제로 은현은 엘레노아를 안아야할지, 말지의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일리아나의 말을 떠올렸고 그것을 통해서 타협하고 엘레노아를 안았다.
일리아나는 피식 웃으며 은현의 상체를 꽉 끌어안았다.

“나도 엘레노아가 딱히 싫지는 않아. 게다가 걔는 너를 이용하고 이득을 취하려는 의도보다, 순수하게 너에게서 받았던 도움에 보답하고, 너를 돕고 싶어 하는 의지가 강하니까. 적어도 너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짜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어. 만약 우리 사이에 낀다고 해도,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기도 했고.”

“넌…정말 대단한 여자야.”

만약 자신과 일리아나 사이에 다른 남자가 끼어든다고 생각한다면,은현은 과연 참을 수 있을까?
은현은 확신할  없었다.
필사적으로 일리아나가 자신을 설득해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자신은 저질러 놓고, 일리아나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쓰레기같은 마인드와도 같지만.
그렇기에 선뜻 자신이 일을 저지르기 전부터,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아브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일리아나의 마인드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실감했다.

“네 그분도 별 말씀 없으셨지?”

“사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해해주셨지.”

“그럼 내 쪽에서도 별다른 불만을 제기할 수도 없잖아.”

베르단디의 의향을 묻는 일리아나의 말에 대답해주자, 일리아나는 쓰게 웃었다.

“결혼식, 본의 아니게 셋이서 하게 됐네.”

“그건 진짜로 뜻밖이다.”

일리아나는 킥킥대며 은현의 말에 대꾸했다.

“아, 일리아나.  가지 확인해보고 싶은  있어.”

“확인? 뭔데?”

“사실은….”

은현은 엘레노아와 관계를 가졌던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엘레노아가 베르단디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된 사실을 전했다.
순간 두 사람이 벌써 관계를 가졌다는 것에 눈썹을 꿈틀거리기는 했지만, ‘여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엘레노아가  여신님을 볼 수 있게 된 계기가 너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가설은 그래.”

“흐응….”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일리아나는 이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자신의 네글리제를 벗어던졌다.

“지금 당장 해보자. 그럼.”

◆  

“몸은 좀 어떠십니까?”

“평소랑 별 다를 것도 없지. 애초에 심한 고문이나 그런 받은것도 아니고, 단지 피로에 몸이 노곤했을 뿐이다.”

“다행이군요.”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브로스와 알렉스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임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음.”

“가장 먼저 성검을 헌상한 건에 대해서 입니다만.”

“그건 이미 엘레노아에게서 들었다. 꽤나 악질적인 방법이더군.”

“정말로…잘도 그런 생각을….”

은현이 순순히 디아네 왕비에게 듀란달을 헌상한 이유는 성검의 특성 때문이었다.
성검은 의지를 가진 검으로 자신을 사용해줄 주인은 성검 스스로가 고른다.
즉 아무리 공작가문이 듀란달을 왕가에 헌상했다 하더라도, 듀란달이 데미안 왕자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사용하지도 못한 성검을 떠맡은 왕가의 입장에서는 그저 벽에 장식해두는 미관용 검처럼 장식만 화려한 극히 일반적인 검으로 애물단지가 되어버리는 셈.

“성검이 데미안 왕자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최악의 사태는 생각하지 않은 건가?”

“그거야 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디아네 왕비가 싸고도는  왕자의 인격에 대한 소문은 이방인에 가까운 저에게도 들립니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재목을 가진 현명한 왕자였다면, 공작께서 이렇게 반대하시고, 2왕자인 에반 왕자를 희망으로 생각하여 왕세자로 밀어 붙이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은현이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보인다.

“…….”

“그리고 상상해보세요. 기껏 헌상한 듀란달을 코앞에 두고 데미안 왕자가 성검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떡하니 에반 왕자가 성검의 인정을 받아 주인이 되고, 어쩔 수 없이 강제적으로 듀란달을 탈취당하는 상황을.”

은현의 예상대로라면, 결국엔 데미안 왕자는 성검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굳이 공작가문에서 성검을 헌상해봤자,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애물단지 취급을 받으리라는 것은 뻔한 결말.

“하지만 그렇다고 왕비가 공작가문이나 에반 왕자에게성검을 다시 하사할 것 같지는 않은데?”

알렉스 또한 뻔한 예상을 입에 담아 은현에게 의견을 구했다.

“거기부터는  분이 노력하셔야죠. 말했잖습니까. 저는 누가 성검의 주인이 되던 관심이 없다고, 성검 자체가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이라면, 저는 크게 불만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론…에반 왕자의 앞으로의 행보가 굉장히 궁금하네요.”

“하.”

아브로스는 은현의 의도를 알아채고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시험과도같다.
일부러 왕당파벌에 성검을 넘겨주고, 스스로 쟁취하여 성검의 인정을 받는 존재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것은 에반 왕자일 수도 있고, 은현의 눈앞에 있는 공작가문의 차기 후계자인 알렉스가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면 그 이외의 전혀 다른 제3의 인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까운 미래에, 디아네 왕비를 비롯한 왕당파벌의 귀족들에게 큰 엿을 먹이는, 제가 상상한 상황이 펼쳐졌으면 하는 마음이 굉장히 크네요.”

상상만 해도 통쾌할 것만 같은 장면에 알렉스 또한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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