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161. 형량협상(1)
칭칭 감겨있던 붕대가 조금씩 붉게 물들어 가면서 애슈턴의 비명이 궁정회의장 안을 가득 채운다.
폭력적인 것을 넘어, 상처를 가차 없이 짓밟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디아네 왕비는 물론, 다른 귀족들까지 눈살을 찌푸렸다.
“흐으, 흐으….”
은현이 체중을 실었던 자신의 발을 풀고, 바닥에 누운 상태인 애슈턴의 옷깃을 끌어당겨 강제로 일으켰다.
그리곤 그의 귀에 작게 속삭인다.
“만약 거짓말을 하면. 알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애슈턴의 몸이 흠칫 떨렸다.
처음 자신의 어깨를 투창으로 꿰뚫고, 창대를 사정없이 헤집으면서 심문했던 매정한 목소리를 느끼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공포심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마, 말할게…말할 테니까, 그만둬!”
“무릎 꿇은 채로 몸을 일으켜.”
“크으윽!”
몸을 움직일 때마다, 지금까지 마취로 잊고 있었던 어깨의 관통상의 통증이 전신을 덮쳤지만, 애슈턴은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는 생존본능에 따라, 은현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저 사람….”
너무나도 잔인하고 매정해보여서, 은현의 그 모습을 본 엘레노아가 가슴을 졸이며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지금껏 보여주었던, 자신을 놀리는 장난스럽고 가벼운 태도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망자의 여왕, 메디아와의 일전에서 보여준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감정을 띄운 모습도 아니다.
엘레노아가 가장 먼저 비슷한모습으로 떠올렸던 것은 공개재판 때의 모습이었다.
목숨에 무게와 가치를 매기고 효율만을 추구하는, 거기에 사적인 감정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는 ‘이타’만이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
“그때보다 더 심해….”
공개재판 때는 스스로의 목숨을 재판 위에 올려두면서도 여유와 가벼운 태도를 잃지도 않았으면서, 지금의 은현은 더더욱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다른 느낌이다.
마치 감정 자체가 배제되어 있는 ‘이성의 괴물’을 보는 느낌.
그의 변화를 눈치 채고 있던 것은 리오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금 예전으로 돌아갔군.’
약간의 걱정도 들었지만, 리오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를 제쳐놓고 조용히 이 청문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리오드 뿐만이 아니라, 공개재판 당시의 은현을 알고 있는 귀족들 모두가 화술로 귀족들을 도발하고 농락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그의 모습에 표정을 굳히고,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황급히 회의장에 난입한 은현을 제압하려던 근위기사단원들까지, 아까전의 은현이 보여주었던 이형환위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은현의 위압감을 느끼고 은현과 일정의 거리를 두며 대치했다.
꿀꺽
알 수 없는 위세에 짓눌려 한 기사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옆에까지 들릴 지경.
분위기가 진정되고, 혼란스럽던 회의장의 내부가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자, 은현이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뭐지?”
“애슈턴….”
“성은?”
“아르미타스.”
“레니온 헤르샤의 배임횡령을 공모하고, 주도했던 자가 맞나?”
“…그렇다.”
순순히 인정하는 애슈턴의 태도를 보고, 긴장감이 흐르는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귀족들이 조금씩 웅성대기 시작한다.
“그 배임 횡령에는 ‘공작가문의 의지’인가? 아니면 네 ‘개인의 의지’인가?”
“…내 독단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애슈턴의 자백을 들은 한 귀족이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자신의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하나의 수첩을 높이 들어올리며, 크게 외쳤다.
“이 장부는 그동안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을 포함해, 같은 파벌의 귀족들이 오랜 시간동안 이 나라의 세금을 얼마나 빼돌렸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아르미타스 공작과 소공작의 이름도 들어가 있죠! 저 자는 지금 공작가문을 살리기 위해 전소공작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 꼬리를 자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속으시면 안 됩니다!”
“아아, 그거요?”
‘증거’를 들이밀며, 애슈턴의 자백을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한 귀족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불구하고, 은현은 심드렁한 표정을 보이며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지적을 해온 귀족에게 은현이 물었다.
“그 장부. 어디서 입수했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 이것은…비밀리에 입수한 정보로 정보 제공자의 신원이 노출되면 되려 위험을 사게 될 가능성이 있어, 밝힐 수 없습니다!”
예상했던 답변이 나오자, 은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애슈턴. 저 장부를 네가 작성한 기록이라는 걸 증명해.”
“무, 무슨….”
“6페이지 두 번째 줄….”
페이지의 내용, 해당 귀족의 이름과 얼마를 횡령하였는지, 기술되어 있는 내용들을 애슈턴이 자세히 읊자, 장부를 증거로 제시했던 귀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핵심 내용을 모두 듣고, 그 내용이 자신이 증거로 제시한 장부의 내용과 똑같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그 장부를 작성한 것이 애슈턴이며, 당신들에게 흘러가도록 상황을 유도한 것도 바로 이 놈이기 때문이죠.”
“……?”
“정보 길드를 너무 맹신했군요.”
“크윽!”
정보 길드를 통해서 애슈턴이 작성한 장부를 넘겨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귀족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귀족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은 은현은 품속에서 귀족이 쥐고 있던 수첩과 똑같은 생김새의 수첩을 꺼내어 높이 들어 올려 궁정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진짜 장부는 여기 있습니다.”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은현의 말을 들은 일부 귀족들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 이유는 은현이 손에 쥐고 있는 장부가 정말로 배임횡령을 공모했던 귀족들의 리스트가 적혀있다면, 그 일부 귀족들의 이름도 들어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애슈턴은 배임횡령의 공모자로 파벌을 가리지 않고 돈에 욕심이 있는 귀족들을 모두 끌어들이는 것으로 횡령의 사실이 철저히 숨겨지고,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도록 공동의 책임으로 이루어지게 일을 꾸몄다.
그렇게 배임횡령에 동참했던 왕당파의 일부 귀족들이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을 추궁하는데 이 조작된 장부를 이용한 이유는, 그 왕당 파벌 귀족들의 이름이 모두 빠져있어, 공작파벌을 압박하기에 최적의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 조작된 장부가 이용되기 쉽도록 일부러 배임횡령에 참여한 왕당파벌의 귀족들의 이름을 빼버린 애슈턴의 수작 때문이며, 그의 복수심이 오로지 아브로스에게만 향해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그것이 진짜 장부라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하, 이 장부를 기록한 장본인이 이 자리에서 증언한다고 해도믿을 수가 없습니까?”
“지금 우리 수중에 있는 장부도 조작된 것이라면! 그것 또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예상한 답변이 술술 흘러나오는 것에 은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걸 판단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닙니다. 이 장부를 진짜 장부로 판단할지 아닐지는 이 회의를 이끌어나가시는 디아네 왕비마마께서 내리실 결정이지요.”
“…….”
그러면서도 은현은 일부 귀족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눈웃음을 지었다.
차례차례로 쭈욱 훑어보는 것이 아닌, 명백히 의도를 가지고 일부 귀족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귀족들이 하나같이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알고 있다.’
자신이 배임횡령에 공모했다는 사실을.
은현의 비릿한 웃음에서 몰래 배임횡령에 공모했던 왕당파벌의 귀족들이 그 의미를 깨닫는다.
“자, 진짜 이 장부는 증거물로써 디아네 왕비마마께 제출하도록…”
“움직이지 마라!”
디아네 왕비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경계의 태세를 취한 크라시르 근위기사 둘이 은현의 앞에 가로막아 서서, 그의 접근을 막았다.
“이거 전해드려야 하는데요?”
은현이 웃으며 손에 쥔 수첩을 흔들어 보이자, 그의 앞을 가로 막아선 두 기사들의 인상이 찡그려진다.
“나에게 넘겨라. 내가 직접 왕비마마께….”
“됐습니다.”
“왕비마마…?”
“다른 분들의 의견대로, 증거로 나온 장부가 전 소공작에 의해서 조작되어 의도적으로 이 궁정회의장에 흘러들어온 것이라면, 그 내용에 대한 신빙성도 자연스레 떨어지겠죠. 따라서 그대가 제시하는 그 진짜 장부라는 것의 내용도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증거로서 의미가 없으니,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디아네 왕비는 황급하게 은현이 제시한 장부를 증거로서 채택하는 것을 거부했다.
저 장부가 진짜라면, 그 내용 속에는 공작파벌과 왕당파벌의 경계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귀족들의 이름이 들어있다.
아브로스를 포함한 공작파벌들에는 형벌을 내려 목줄을 채울 생각이었지만, 자신 파벌의 귀족들의 이름이 포함되어있다면, 제 무덤을 파는 격이나 마찬가지다.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은현이 디아네 왕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저 귀족분이 가지고 계신 조작된 장부에 기록된 아르미타스 공작과 소공작의 이름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두 사람의 혐의가 벗겨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
재차 물어보는 은현의 질문에 디아네 왕비는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부서질 듯 꽉 쥐며 은현을 노려보았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작 가문의 책임이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네. 물론입니다.”
은현은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디아네 왕비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배임횡령의 공모자가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 전체’가 아닌, ‘애슈턴 아르미타스’라는 개인으로 규모가 축소되었을 뿐, 공작가문의 소공작이었던 애슈턴의 범죄 사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자신의 배임횡령 공모 사실을 자백한 순간부터, 이미 공작가문의 위신은 크게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은현이 고개를 돌려 뒤돌아서서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브로스를 바라보며 발언권을 넘겼다.
“…물론입니다. 소공작의 지위를 박탈했다고 하나, 엄연히 공작 가문의 이름을 짊어진 자가 행한 일. 응당 책임을 질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하시네요.”
“왕비마마께 한 가지 간청을 드리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리오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디아네 왕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씀해보세요.”
“이 나라의 세금을 횡령한 이들은 사망한 레니온 헤르샤와 애슈턴 아르미타스 이 둘 뿐만이 아닐 겁니다. 이 사건을 수사하여 배임횡령에 동참한 모든 귀족들을 밝혀내고 합당한 처벌을 내릴 수 있도록 저에게 수사권을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음.”
리오드의 요청을 들은 주위의 귀족들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이 지당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 대다수가 재무장관인 버나드를 포함하여 배임횡령과 무관한 이들.
반면 횡령에 연루된 소수의 귀족들이 사색에 잠겨 디아네 왕비를 바라보았다.
나라의 돈을 횡령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는족속들을 그대로 둬서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디아네 왕비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실제로 자신이 일궈낸 왕당파벌의 귀족들 또한 자신과 데미안 왕자의 위세를 빌려 자신의 입맛대로 맞는 국가사업을 추진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릴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디아네 왕비가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에는 왕권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라의 존속마저도 위험해질 수도 있다.
언젠가는 쳐내고 버려야할 귀족들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나, 아직 자신의 아들인 데미안이 왕세자로 책봉되기 전인 지금은 시기가 너무나도 적절치 못하다.
하지만 이를 갈면서 거부할 수 있는 구실이 없는 정당한 리오드의 요구를 마지못해 승낙한다.
“…좋아요. 아르티아의 단장인 올리비온 후작은 이 횡령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빠짐없이 모두 체포할 수 있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디아네 왕비는 은현과 리오드의수작질에 놀아난 것에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면서, 어떻게든 지금까지 일궈 내온 왕당파벌의 배임횡령을 저지른 귀족들을 버리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위안이 되었던 것은.
‘공작파벌의 귀족들 사이에도 엮여있는 숫자가 적지 않다는 것과 그 주모자인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게 되었으니까….’
어떻게든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을 옭아맸다는 것을 성공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야만 했다.
본래라면 나라의 예산에 손을 댄 가문 전체를 싸잡아 공작위의 위계를 강등시키고, 그의 세력을 와해시켜 치명타를 가할 생각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애슈턴, 전소공작의 범죄를 밝히고 처벌하는 것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저 자가 또 난입해서…!’
또 다시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상황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흐름을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어내는 은현을 보며디아네 왕비가 이를 갈았다.
“후우….”
이내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디아네 왕비가 입을 연다.
“배임횡령에 동참했던 귀족들에게는 모두 범죄 사실이 확정된 시점으로부터 1년 이내에, 백금화 100닢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와, 왕비마마!”
“그것은 너무 과한 처벌이…!”
“뭐가 과한 처벌이란 거죠? 왕국의 예산을 빼돌리는 범죄 행위는 중범죄입니다. 그대들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이건 왕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그것은….”
“게다가 처벌에 대해서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혹시 그대는 이 배임횡령 사건에 동참 했나요?”
“그,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될 것도 없지요.”
항변 끝에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일부 귀족들이 이를 바득 갈며 이 상황의 원흉이나 다름 없는 은현을 노려본다.
배임횡령에 동참한 귀족들이 횡령으로 지금까지 이득을 본 금액이라 봐야 백금화 한 닢에서 많아봐야 다섯 닢 정도.
이것도 개인이 쥐기에는 굉장히 큰돈이며, 수십 명이 가담되어 있는 이 비리에는 왕가의 1개월 운영예산의 근 20%에 달하는 금액들이 매달 꾸준히 빼돌려져왔다.
일개 말단 공무원을 앞장세워 어마어마한 양의 예산을 빼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 비리에 많은 귀족들이 가담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결국 자신이 이득본 금액의 10배도 아닌 100배에 가까운 금액을 토해 내야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비리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상황임이 분명하다.
‘참자. 참아.’
그런 귀족들의 썩어가는 면상을 보고 있자니,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폭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아 은현은 필사적으로 이빨을 꽉 깨물며 미소를 유지했다.
이윽고 디아네 왕비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만신창이가 된 애슈턴을 응시했다.
“전소공작, 애슈턴 아르미타스의 레니온 헤르샤 배임횡령 공모 사실을 자백했음에 따라,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주인인 가주, 아브로스 아르미타스에게도 벌금형을 선고하겠니다.”
이것으로 법률의 기준의 한계에 달하는 아슬아슬한 금액과 기한을 부과하여, 공작령을 포함한 공작가문을 압박하고 조금씩 그 위세를 갉아먹을 수 있게 된 것 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결과적으로 공작가의 재산을 국고로 몰수시킬 수 있고, 동시에 공작가문을 재정난에 빠뜨리면서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도록 아브로스의 목에 보이지 않는 목줄을 채우는 것과 같다.
“전 소공작이 이 배임횡령의 주모자인 것을 감안하여 가중처벌로,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은 6개월 이내로 백금화 300닢을 납부할 것을 명합니다.”
아브로스는 이를 꽉 물며 머릿속에 차오르는 화를 꽉 누르면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6개월 안에 백금화 300닢.
가중처벌이라고는 하지만 아까 전, 다른 귀족들의 1년 안에 백금화 100닢과는 차원이 틀린, 디아네 왕비의 노골적인 의사가 느껴졌다.
절대로 불가능한 금액은 아니다.
공작령의 한 분기의 운영 예산과 맞먹는 금액인 백금화 300닢은 마련하려고 노력한다면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다.
단지 영지민들에게 걷는 세금을 더 올리고, 더 열악한 영지의 정비와 운영을 한다면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 대신 그 힘겨운 시간들을 견뎌야하는 것은 자신 뿐 만이 아니라, 공작령의 영지민들이다.
아브로스는 디아네 왕비가 자신이 영지민들을 독촉하여 세금을 쥐어짜내고, 채찍질을 동반한 폭정을 통해서 민심을 악화시키고, 그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는 것으로 공작가문 뿐만이 아닌, 공작령까지 집어 삼킬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힘겹게 살길을 모색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자신과 공작가문의 앞길에는 참담한 가시밭길이 놓여있는 셈.
하지만 별다른 방법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기에, 아브로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 왕비님 가차 없으시네요. 그런데 너무 공작가문을 싫어하시는 거 아닙니까? 조금만 깎아주시죠.”
“저, 저…!”
“어찌 저런 무례한!”
비웃는 듯 가벼운 웃음을 보이며 말도 안 되는요청을 해오는 은현을많은 귀족들이 경악스러운 눈빛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