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152. 가문의 위기(5)
“우,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이 여자를 당장…끄아아악!”
전형적인 인질 패턴을 은현이 상정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형환위로 순식간에 엘레노아의 곁으로 접근한 뒤, 엘레노아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목에 붙잡고 힘을 주었다.
손목의 주인인 건달이 비명을 지르며 엘레노아의 목을 놓칠 수밖에 없게 됐고, 그의 다리를 걷어차 바닥에 넘어뜨린다.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콰직!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운 건달의 머리를 있는 힘껏 짓밟자, 썩어버린 나무판자의 바닥 아래로 건달의 머리가 박히면서 움푹 들어간다.
“이 새끼가!”
엘레노아의 양팔을 구속시키고 있는 베스타상을 수십 명의 남자들이 둘러쌌다.
하지만 깡마른 몸매와 빈약한 체구로 제대로 된 근력도 갖추지 못한 슬럼가의 깡패들을 상대로 은현이 위축되는 모습을 보일 리도 없다.
엘레노아를 등 뒤로 보호하면서 사방에서 날아오는 건달들의 주먹들을 대응하는은현의 모습은 너무도 여유로웠다.
“응? 뭐야. 이 꼬마는.”
뒤늦게 건달 쪽으로 도착한 에밀리아가 가장 바깥쪽에 있던 건달의 다리를 움켜잡았다.
건달의 말을 들은 에밀리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더니, 소녀의 입에서 고운 미성이 흘러나온다.
“본 개체는….”
양 손으로 건달의 다리를 움켜쥔 채로 너무나도 쉽게 건달의 몸을 허공으로 들어올린다.
“어, 어어어어!”
“꼬마가 아님을 명시하는 바입니다!”
마치 야구 배트로 스윙을 하듯 건달의 다리를 움켜잡고 다른 건달들에게 휘두른다.
“끄아아아아!”
볼링공을 맞은 볼링핀 마냥, 차례차례로 에밀리아의 인간 배트 스윙에 휘말린 건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쓸려나갔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얼추 건달들의 정리가 대강 될 낌새가 보이자, 은현은 단검을 하나 소환하여 엘레노아의 양 손목을 구속시킨 수갑을 깔끔하게 절단시켰다.
허공에 구속된 손목이 자유로워지면서, 몸에 힘이 빠져있던 엘레노아의 몸이 스스륵 쓰러지며 은현의 품에 안겼다.
“하아…하아….”
“……?”
자세히 보니, 은현은 엘레노아의 몸 상태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거친 숨결을 내뱉는 불규칙적인 호흡, 홍조를 띄우면서 잔뜩 달아오른 얼굴, 이상하리만지 다리를 오므리며 몸을 배배꼬는 행동은 평소 엘레노아가 보여주던 모습과는 명백히 다른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이내 적나라하게 오픈된 젖가슴에서 딱딱하게 발기되어 있던 유두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간 은현은 곧바로 로브 하나를 소환하고는 엘레노아의 몸을 덮어주었다.
“제,젠장…!”
애슈턴이 상황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던 것에 긴박함을 느끼고 도주를 하기 위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잡으려고 은현이 엘레노아를 바닥에 눕히고 추적을 하려했지만.
“가지…가지 말아요….”
“……?”
엘레노아의 손이 은현의 손을 붙잡으며 제지한다.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로 맞잡은 엘레노아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아까의 상황에 진정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은현은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맞잡아주고는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에서 떼어놓았다.
“금방 갔다 올게요.”
“아….”
“리아, 저거는 포박시켜. 살려서 왕국으로 데려가야 해.”
“명령을 수락합니다.”
은현은 바닥에 기절해 있는 바르크를 가리키며 에밀리아에게 명령을 하고는 순식간에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도망친 애슈턴을 잡으러 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옳은 판단이며, 해야만 했던 판단이다.
엘레노아는 이성으로는 은현의 행동을 이해하면서, 가슴 속으로 사무치는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건달들의 추잡한 시선으로 자신의 전신을 훑어보고 한껏 노출된 자신의 젖가슴을 응시하면서 아랫도리를 불룩하게 세운 그것들을 보았을 때.
엘레노아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마치 전신에 벌레가 기어 다니고, 온 몸을 더듬고 능욕하는 치욕스러운 감각을 맛보았다.
그러면서 미약으로 인해 그 감각이 점차 쾌락으로 바뀌어 갔다.
온 몸이 달아오르고 발정이 나버리는 자신의 몸이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분해서 화가 났다.
그 분노와 발정의 기운이 은현의 몸에 안긴 순간, 안심에 빠지면서 본인도 모르게 은현이 계속 자신을 품어줄 것을 마음 속 깊숙이 원해버렸다.
자신을 지켜주면서 안심을 시켜주기를 바랐지만, 자신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던 은현에게 알 수 없는 서운함이 가슴 속에 피어오른다.
“흐으으….”
뜨거운 교성을 내뱉으며, 미약으로 인해 한껏 음탕하게 젖어버린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직시한 엘레노아는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무의식으로 은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 ◆ ◆
[브류나크 창술]
[껍질 꿰뚫기]
아르키스 대미궁에서 선보였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자랑했던 기술이었지만, 이번 공격은 마나가 전혀 실리지 않은 일반적인 투창이다.
그 투창은 마치 자로 잰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도주하고 있던 애슈턴의 어깨에 박혔다.
“크아아아아악!”
그대로 낙후된 건물에 투창이 박히면서 자연스레 애슈턴의 몸도 투창에 박힌 채로 붕 떠올라, 건물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밀착된 형태가 되어버린다.
“끄으으윽!”
몸에 박힌 창을 억지로 뽑아내려고 했지만, 어깨가 관통되어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반대쪽 팔 하나만을 이용하여 창을 뽑아내기에는 그의 신체적인 쇠약이 발목을붙잡고 있었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벽에 얼굴을 파묻어 밀착된 애슈턴에게 다가온 은현이 주먹을 쥐고 창대를 있는 힘껏 세게 때렸다.
창대가 거세게 진동하면서 어깨에 박힌 관통상을 더더욱 헤집어놓기 시작한다.
“크아아악!”
“널 그냥 진즉에 죽였어야 했나, 후회하고 있어.”
“크으윽….”
“언젠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염두 해두고 있었어. 그럼에도 죽이지 않고 살려뒀지.”
하려고만 했다면, 구미호에게 모든 마력을 빨려 기절했을 때, 그냥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현이 애슈턴을 살려뒀던 이유는.
“네 아버지가 부탁을 했기 때문에.”
- 모두 자식교육을 잘못시킨 나의 잘못이다. 한심한 부탁인 것은 안다. 하지만, 부디 죽이진 말아주지 않겠나.
결국 그놈의 핏줄이라는 것 때문에.
은현은 가능성을 염두 해두면서도 애슈턴을 살려두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엘레노아는 강간을 당해 누구의 씨앗인지도 모를 아기를 뱃속에 배어 원치 않는 임신을 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
배다른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비뚤어진 복수심으로 가득 차서, 자신의 여동생을 건달들에게 던져놓고 그 광경을 재미있다고 웃으면서 보는 쓰레기를.
“살려둬야 할 가치가 있을까.”
“사…살려어….”
이 와중에도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꼬락서니가 우습지도 않다.
가증스럽다.
하지만 아직 죽이는 건 안 된다.
“누구야. 누가 너한테 이걸 제안했지?”
“끄으윽….”
“바르크까지 엮여 있는 걸 보면, 너 혼자 이 일을 꾸몄을 것 같지 않은데. 애초에 너는 이런 일을 꾸밀 수 있는 그릇이 아니야. 말해. 네 뒤에 누가 있어.”
이제는 버려진 영지, 린데발트 령은 2년 전, 린데발트 자작이 이교도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베스타 신전의 성기사들에게 붙잡혀 참수형을 받았다.
하지만 그 린데발트 자작 일가가 이교도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었고, 그 어떤 사실 관계가 밝혀지지 않아 지금에 와서도 많은 의문이 남는 사건이었다.
그 이교도 숙청을 주도했던 자가 바로 하르칸이였기 때문에 하르칸이 파면을 당한 지금 와서 재조명을 받는 사건이기도 했다.
아마 엘레노아를 납치하고 이곳으로 이동시킨 이유도 왕국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르칸의 아들인 바르크가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확신이 선다.
바르크는 아버지인 하르칸이 파면당하기 이전부터 엘레노아에게 홀딱 빠져있었고, 자신과의 정략혼을 거부한 엘레노아에게 심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심지어 아버지의 파면의 이유에 엘레노아가 관계되어 있다고 추측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르크와 애슈턴을 구슬려 한데 모으고, 지금의 상황을 유도한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이야기.
“악마…악마가….”
“…악마라고?”
애슈턴이 입 밖으로 꺼낸 단어에 은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나도…나도 몰라…! 자신을 악마라고만 소개했어! 나한테 나를 버린 가문에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그리고 바르크에게는 엘레노아 공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꼬드기고?”
“그래…. 그렇다고! 그러니까 어서…”
우우웅
“……!”
은현은 갑작스레 느낀 마력의 파동을 감지하고 본능의 위협을 느낀 야생동물이 털을 바짝 세우듯 전 방위에 감지를펼쳤다.
‘실체는 없다. 그냥 마법만? 아니, 이건….’
마법은 발동하고 있는데, 마법을 사용하는 주체는 보이지 않는다.
은현은 다른 장소에서 지금 은현이 있는 장소를 간섭해오는 마법이 발동되고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파지직!
요란한 스파크를 튀기며 생성된 동그란 원형의 마법진의 중심에서 하나 둘씩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텔레포트.”
일리아나의 텔레포트보다는 명백히 느리고 마력의 파동이 크다.
하지만 공간과 공간에 간섭하여 사람을 포함한 물체를 전이시키는 특성의 마법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설마, 엘레노아를 이곳으로 옮겨다 놓은 건…텔레포트?’
그렇다면 적어도 상대 쪽에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 또는 텔레포트의 마법을 담은 무식하게 비싼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
아직 아티팩트에 텔레포트의 고위 자릿수 마법을 담아내본 경험도 없었던 은현이었지만, 그 가능성을 완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내 텔레포트 마법이 끝나고 주위를 바라보던 한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은현과 그의 발밑에 깔린 애슈턴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넌? 쟨 또 왜 저러고?”
“이름을 묻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해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은현이 담담한 대꾸로 응수하자, 은현에게 질문을 했던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순간 벙 찐 표정을 짓더니, 이내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푸하하하! 재밌는 새끼네? 상황파악 안 되냐?”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하자, 20명 가까운 각각의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의 무기를 손에 거머쥐었다.
자신들은 20명 이상, 하지만 상대는 단 한 명 뿐, 얕보이고 비웃는 것도 당연하다.
은현은 빠르게 갑작스레 나타난 그 집단들의 인상착의를 눈으로 훑었다.
무기의 종류도 다양, 성별도 다양, 외양적으로보이는 나이의 분포도 다양, 입고 있는 복장도 다양하며, 하나같이 통일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집단들.
“흐음, 너…그래도 보통 놈은 아니네?”
전혀 동요하지 않고 빠르고 냉정하게 자신들의 집단을 훑어보며 분석하고, 머릿속으로 판단을 내리는 은현의 눈빛을 본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흥미로운 표정을 띄운다.
이내 씨익 미소를 짓더니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고는 은현을 향해 겨누며 입을 열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내 이름은 바론! 지금부터 너를 죽일 남자지!”
은현을 바라보는 바론의 눈빛이 약자에 대한 조롱과 비웃음에서 강자를 대하는 호승심으로 바뀌어간다.
“…은현.”
“은현? 특이한 이름이군. 고대인인가?”
“그래.”
은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애슈턴의 어깨에 관통되어 있던 창을 거칠게 뽑았다.
“크아아악!”
창을 뽑자마자 비명을 지르는 애슈턴의 등을 강하게 짓밟으면서, 은현은 창날에 잔뜩 배인 애슈턴의 피를 털어내기 위해 창을 흔들었다.
한 남자가 보법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은현을 지나쳐, 자신의 뒤, 엘레노아가 있는 폐쇄된 신전으로 향하려했지만.
푸욱
“크으윽!”
은현이 남자의 허벅지에 창을 꽂아 넣자, 바닥에 주저앉고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오?”
“너희는 이 쓰레기에게 입김을 불어넣은 놈의 부하인가보지?”
“큭큭, 그러는 넌 저 뒤편의 신전에 있는 여자를 지키는 기사라도 되나보지?”
엘레노아의 존재를 알고 있다.
은현은 이것으로 애슈턴과 바르크에게 입김을 불어넣은 흑막이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기사치고는, 내 행색이 너무 초라해서 말이야.”
“야, 방금 공격, 넌 보였냐?”
“보이긴 했지만….”
저 상황에서 자신이 대응을 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하는 투.
“그때죽인 그 여자의 호위 기사들보단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너희들이었구나. 페르닌의 가도에서 대놓고 기사 둘을 죽이고 머리를 가져간 게.”
엘레노아의 호위 기사 둘을 죽이고, 그녀를 직접적으로 납치한 실력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데?”
“조장, 혹시…놀아도 됩니까?”
“그래! 오랜만에 만나보는 실력자다! 한 번 놀아보자!”
“와아아아아아아!”
“사냥개는 사냥개답게!”
“사냥감을 물어뜯는다!”
검을 들어 잔뜩 열띤 목소리로 호령하는 바론의 목소리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천진하기 까지 하다.
환호하는 그의 부하들의 함성소리가 넓게 퍼지면서, 주위의 분위기가 일변한다.
일 대 다수의 불리한 싸움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론과 그의 부하들은 전혀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기색이 없다.
오히려 은현의 실력의 일부를 짧게 본 순간부터, 그들의 눈빛에 알 수 없는 희열이 맴돌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보스를 눈앞에 두고 목숨을 건 전투를 즐기는 감각과 비슷하다.
그들을 보고 은현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싸움에 미친 전투광, 또는 사냥개’.
그 ‘보스’가 된 은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에 쥔 창을 꽉 쥐었다.
“미친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