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150. 가문의 위기(3)
판자건물 내부의 주점은 참혹한 장례식장의 분위기와도 같았다.
“…크, 크흠.”
이 분위기와 상황은 결코 은현이 의도했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원인이나 다름없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은현이었기에, 주점 안의 건달들은 모두 은현과 에밀리아를 공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악독한 새끼….”
“악마….”
“지옥에나 떨어져버리라지….”
“어떻게 같은 남자이면서 그걸 깨버릴 생각을….”
건달들은 차라리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목을 베어 죽였으면 죽였지, 이토록 참담한 다른 의미의 죽음을 맞이한 거구의 남자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가랑이에서 철철 넘쳐 흘러나오는 피를 어떻게든 지혈시키는 것이 고작인 거구의 남자는 이미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실신한 상태였다.
‘저 기분, 또 내가 잘 알긴하지….’
이전에 이미일리아나에 의해서 저 기분을 맛본 은현은 애석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그나마 여신의 권능으로 복구를 시킬 수 있었지만, 남자의 경우는 아니다.
‘…신전에 부탁이라도 해볼까?’
아니에스라면 절단된 팔다리의 결손부위를 복구시키는 것도 가능한 치유 마법을 구사할 수 있으니, 가랑이 사이의 구슬이 터진 것즈음은 복구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은현은 일단은 지금의 공기가 완전히 자신 쪽으로 넘어 온 지금의 기회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건 내가 신전에 얘기해서 치유 마법으로 치료해주도록 하지.”
“저, 정말입니까?!”
“오, 오오오오!”
방금 전까지 사탄의 후예인 마냥 은현을 바라보던 건달들의 시선이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 마냥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
자신의 구슬이 깨진 것도 아닌데, 자신의 것인 양, 기뻐해주는 건달들의 반응이 어이가 없어 하마터면 실소가 나올 뻔했다.
자신쪽으로 넘어온 분위기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던 은현은 가까스로 표정을 참고, 가장 가까이 있는 건달 하나를 지목했다.
“거기, 너.”
“예, 예?”
“위로 안내해. 만약 또 비웃거나 거부하면…알지?”
은현이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무표정으로 서있는 에밀리아를 흘끗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무슨 뜻인지 의미를 알아들은 건달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 아유!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당장 안내해드립죠! 야! 이분 지나가시게 당장 길을 비켜드려!”
자신의 구슬을 지키고 싶었던 건달은 파리를 내쫓듯 손짓을 휘휘 저으며 주위 건달들을 물러서게 만들었고, 은현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기 때문인지, 건달들은 아무도 은현과 에밀리아에게 덤빌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쪽입니다요.”
건달의 안내를 받아 위층으로 올라간 은현은 거침없이 나무판자로 만든 허술한 문을 열었다.
끼이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짙은 살기가 은현을 덮쳐온다.
카아앙!
“……!”
문 뒤의 벽에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던 여자가 은현의 목을 노리고 단검을 휘둘렀으나, 가볍게 점프하여 단검을 맨팔로 막아낸 소녀의 기행에 암살자 여자가 눈썹을 꿈틀거린다.
자신의 움직임을 눈치 채고 재빠르게 대처했다는 것보다도, 맨팔로 막아낸 소녀의 팔에서 금속음이 났다는 것이 더더욱 이질적이었다.
“하는 짓이 여전히 뻔하네. 루난?”
“또 무슨 일로 찾아왔지? 우리의 거래는 그때 아르미타스 공작가에게 그 에린이라는 소녀의 행방을 전달해준 걸로….”
“알잖아. 내가 왜 찾아왔는지.”
“으…읏!”
흘끗 암살자 여자를 바라보는 은현의 표정이 번뜩이더니, 붉은 눈동자 속에 내포되어 있는 짙은 살기에 암살자 여자의 숨이 옥죄어졌다.
“…우리가 아니다.”
“알아. 아무리 니네 수준이 뛰어나고 프로이고, 사람의 발길이거의 끊긴 밤 시간대라고 하더라도, 수도 안의 가도에서 그렇게 대놓고 사람을 죽이는 미친 짓거리는 안하지.”
게다가 아무리 루난의 정보길드 소속의 암살자들, 검은 늑대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공작가문의 실력 있는 두 호위 기사가 허무하게 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너희가 아예 관계가 없는 건 아니잖아?”
“…….”
“레니온 헤르샤의 배임횡령을 공모했던 귀족들의 리스트, 거기에 아르미타스 공작과 소공작의 이름을 끼워서 정보를 판 거. 너희 길드 짓이지?”
“…그렇다.”
레니온 헤르샤의 배임횡령 사건의 전말에 엮여 있는 것은 그때 당시의 인물들 뿐 만이 아니었다.
애슈턴의 수작질로 엘빈에게서 금화를 넘겨받는 것과 동시에 엘빈을 죽이려 했던 암살자들이 검은 늑대였다.
사라진 엘빈의 행방을 찾지 못해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에린을 납치하려 했던 움직임 또한 검은 늑대.
에린의 행방을 수소문한다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흘려, 미끼의 역할이었던 에이라를 습격한 것 또한, 검은 늑대.
사실상 애슈턴의 명령을 받고 사건 속에서 몰래 상황을 휘젓고 다녔던 이들이 바로 은현의 눈앞에 있는 검은 늑대들이었다.
조금만 파본다면, 흑랑당의 루난이 도대체 애슈턴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안해하고 독단행동을 감행했는지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했을 것이다.
은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일부러 방치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터져버릴 사건이라고 생각했고, 은현 자신이 이렇게 사사로운 감정을 우선시하고 아르미타스 공작가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의 그 선택을 지금 와서은현은 후회하고 있었다.
“역시 그때그냥 다 죽여 뒀어야 했던 걸까….”
“…읏!”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는 살벌한 말에 자연스레 그에게 공격을 했다가 실패한 암살자 여자가 작게 몸을 떨었다.
“말해. 누구한테 정보를 팔았고, 왜 지금, 이 타이밍에 이 정보를 판 건지. 그리고 아르미타스 공작과 소공작의 이름을 자연스레 끼워 넣은 것은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겠지?”
굳이 날것의 정보에 거짓을 섞어서 파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의도가 섞인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 흑랑당은 왕당파의 파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아르미타스를 포함한 공작파벌의 권력을 깎아내릴 수 있는 정보라면 그 무엇이든, 비싸게 사주었으니까. 이 관계는 애슈턴 소공작이 의뢰를 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고 있었다.”
“애슈턴, 그 멍청한 새끼는 결국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해서 너희를 이용한 거였는데, 어차피 끝에는 너희를 통해서 그 자식의 배임횡령 공모 혐의는 왕당파의 귀에 들어갔겠군.”
“그럴 예정이었다.”
결국에는 호랑이굴로 제 발로 들어간 격이 아닌가.
끝의 끝까지, 이렇게 민폐만 끼치는 남자가 따로없다.
“그래서? 그 배임 횡령 공모자 리스트에 아브로스와 알렉스의 이름을 추가한 건 누구의 계략이지?”
공작가문의 힘과 명성을 깎아내리는 것이라면, 그냥 날것 그대로의 정보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굳이 아브로스와 알렉스의 이름을 거짓으로 추가해서 정보를 팔도록 유도한 것은 공작 가문을 아예 몰락시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끌어내리고 싶다는 강한 악의가 존재했다.
“…그 남자다.”
“그 남자?”
“…애슈턴 아르미타스. 그 남자가 의뢰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가문에 복수를 하고 싶다면서.”
“…뭐?”
◆ ◆ ◆
정보길드와 슬럼가를 빠져나와, 은현과 에밀리아는 곧장, 베스타 신전으로 향했다.
아니에스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본 개체는 마스터에게 질문이 있습니다.”
“뭔데?”
“어째서 저들을 내버려두시는 겁니까?”
“저것들을 심판하는 건 내가 아니야. 공작가문에서 판단해야할 문제지. 물론 엘레노아가 무사하지 못하다면, 그때는 내가 저것들을 죽일 거야.”
“이해할 수 없는 판단입니다.”
“나도 최근엔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은현은 엘레노아가 잘못된다면 망설이지 않고 감정을 폭발시켜 저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베고 죽이는 살인귀의 모습이 아닌가?
명백히 인류의미래를 멸망이 아닌 생존으로 이끌어야하는 사도가 보여야할 모습이 아니다.
인간들의 생사에 관여하지 않고 그들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신들이 자신에게 걸었던제약일진데, 베르단디와 일부 신들이 그 제약을 풀어주면서, 은현은 자신의 마음 속 무언가가 조금씩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치 그동안 꾹 참아왔던 감정들이 하나둘씩 스멀스멀 올라와 주체할 수 없게 된 것만 같다.
일리아나와 베르단디와 관계를 가지면서 억제할 수 없어진 성욕이 그렇고, 엘레노아를 위험에 빠뜨린 저들에게 끓어오르는 살의를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조금씩 쌓여가는 감정의 폭풍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성을 놓고 멋대로 날뛰게 되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고 은현은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금은…일단 공녀님을 구하는데, 집중하자….’
은현은 그렇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불안감을 억지로 구석으로 밀어 넣고, 에밀리아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본래 베스타 신전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본산의 교황 아래, 대주교라는 직함을 가진 아니에스는 은현처럼 아무런 신분도 가지지 못한 어중이떠중이가 함부로 알현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니에스는 마치 은현이 자신을 찾아올 것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미리 사람을 시켜 은현을 자신이 있는 방으로 유도하도록 언질을 해둔 상태였다.
아니에스의 언질을 받은 신선 사람의 안내에 따라 아니에스의 방에 도착한 은현은 거두절미 할 것도 없이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도움이필요해.가능해, 불가능해?”
그것이 엘레노아의 구출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아니에스는 이해한 표정을 지으며쓰게 웃었다.
“진짜 미안. 난 지금 손이 모자라거든.”
“베스타님의 명으로 엘레노아 공녀님을 팍팍 밀어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랬지. 그런데 지금 우리가 벌려놓은 일이 있잖아. 그 후속처리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지경이야. 평소에 일 안 하고 살다가 오랜만에 하려니까 두통이 더 아프게 느껴지나 봐.”
엘레노아는 하르칸 주교를 파면시킨 장본인이다.
덕분에 현재 페르닌의 베스타신전은 우두머리가 공석인 상황이며, 자연스레 아니에스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신전의 후속처리를도맡아서 해야 할 이유가 있어? 이 신전에도 하르칸 주교 이외에도 사제는 많잖아. 아래 직위의 사제들이 아예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그렇기는 한데. 웬만하면 상황을 지켜보려고. 나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니까, 내가 수습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하르칸, 자칫 잘못 해서 그 자식의 아래에서 작당 모의를 통해 헤쳐먹은 자식을 후임으로 내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하르칸 주교의 비리들이 은현에 의해서 낱낱이 파헤쳐 지면서, 하르칸 주교의 파벌에 속하여 그와 같은 수준의 비리와 착취를 일삼아온 신전의 고위관리자들도 대규모의 숙청이 이루어지면서 매우 어수선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은 벌려놓고, 수습을 맡겨 놓은 다른 놈이 속으로 딴마음을 품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 후임으로 올 때까지 그냥 내가 책임을 지고 수습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덕분에 대량의 일거리들이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아니에스에게 몰려오고 있었으며, 새로운 주교직이 선발되고 어수선해진 신전의 내부 기강을 다시 잡기 전까지는, 아니에스는 은현에게 손을 빌려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후임이 될 예정이었던 엘레노아의 경우에는…쯧.”
그럼에도역시 이 상황에서 나설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머릿속에서 ‘페르닌의 뒷수습’과 ‘차기 성녀의 구출’에 관해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를 저울질 했던 아니에스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차기 성녀가 될 내 후임의 납치건은 네게 맡길게. 베스타 신전의 대주교가 직접 지명하는 의뢰야.”
“네가 나서지 않고 엘레노아의 구출을 나한테 부탁하는 그 판단의 근거는 뭐야?”
“엘레노아의 구출 쪽은 내가 아니라 너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현재 페르닌의 신전의 안정화는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믿고 맡길 수 있는 아랫대가리도 없고, 그렇다고 낮은 직위의 사제를 주교의 자리에 앉힐 수도 없으니까. 게다가 너, 나한테 구출에 관해서 도움을 요청하러 오긴 했지만, 내가 없는 편이 더 편하지?”
“…….”
“신전 쪽에 명분을 챙겨주려고 한 거잖아. 비공식적으로 내정된 성녀 후보의 구출을 신전 쪽에서 나선 것이 아니라, 전혀 연관도 없는 외부의 인사에 맡겼다는 잡음을 피하게 하려고.”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의뢰라는 것으로 어느 정도의 명분은 챙길 수 있었지만, 사제인 엘레노아를 구출하는데 신전 쪽의 인사가 껴있지 않았다는 것은 잡음의 생길 여지가 충분히 존재했다.
그것은 왕국의 귀족 가문의 여식이기도 한 엘레노아의 직업이 사제이기 때문에, 왕국과 베스타 신전 사이의 관계에서 미세하게 틀어질 수 있는 여지가 존재했던 요소다.
“그래도 나도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 자, 받아.”
“이건?”
은현은 아니에스가 내민 금색 보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정체를 물었다.
“백옥의 인도”
“…대량의 신성력이 내포되어있네.”
“맞아. 너라면 알아볼 줄 알았지. 이건 엘레노아의 신성력을 담은 아티팩트야.”
“…아티팩트라고?”
“신전에서도 나랑 다른 대주교, 그리고 교황만이 가지고 있는 소모품이지. 사제의 전용 아티팩트인데, 담겨진 신성력의 주인이 있는 위치를 표시해주거든. 흔히들 사용하는 추적용 아티팩트의 사제용버전이지. 그런데 그 효과는 마력으로 추적하는 아티팩트와는 차원이 틀려. 대상의 위치와 백옥의 인도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반드시 대상의 위치를 감지해내거든. 설령 던전과 대륙의 경계가 가로막혀 있더라도. 그게 마력과 신성력의 차이니까.”
“이런 귀한 소모품을 엘레노아의 신성력을 담아서 사용했다고?”
사제라는 직업은 대륙에서 가장 존귀한 대접을 받는 직업군이며, 반대로 가장 이상한 모략과 위험이 수반되는 직업군이기도 했다.
귀한만큼 많은 이들이 특출 난 사제를 독점하고 차지하기 위해 다양한 계략과 술수를 짜내어 함정에 빠뜨리고, 그것은 정치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인 문제였다.
베스터 신전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교황과 두 대주교는 누구나가 존중하고, 우러러 보는 고귀하고 훌륭한 자리다.
반대로 언제나 다양한 위험에 놓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된 아티팩트가 바로 아니에스가 은현에게 넘긴 ‘백옥의 인도’다.
아니에스는 양어깨를 으쓱이며 웃어보였다.
“말했잖아. 팍팍 밀어주겠다고, 이 사태를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엘레노아가 내 후계를 잇는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이런저런 준비는 해두었어. 애초에 이 나라나 신전에서도 내 몸에 생채기를 낼 수 있는 인간들은 그리 많지 않잖아. 나한테는 있어봤자 필요 없는 물건이었으니까. 마침 딱 좋은 타이밍에 사용처가 생겨서 곧바로 엘레노아의 신성력을 담아두었지.”
“…….”
“이건 너한테 맡길게.”
“괜찮은 거야? 정말로?”
“난 엘레노아를 구하러 갈 수 없잖아. 그리고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쪽도 지금 난리가 난 것 같더라? 공작가문은 지금 조사받으면서 풍비박산이 나기 직전이고, 리오드도 이리저리 바쁜 것 같고, 맡길 구석이 결국엔 너밖에 없잖아.”
결국엔 이번 엘레노아의 구출은 은현의 단독 행동이 되었다.
일리아나는 이번 자신의 일에 동행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일리아나가 이 나라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은 국가적인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의 경우뿐이다.
페르닌을 습격한 서큐버스의 사건이나, 사령술사의 사건이 그러했다.
은현이 요구한다면, 일리아나는 흔쾌히 은현과 함께 동행하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일리아나의 입장이 정치적으로 꼬투리를 잡힐 만한 건수를 주는 것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엘레노아의 행방을 찾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것은 아무런 신분과 제약도 옭아 매이지 않은 은현뿐이었다.
“…그렇네.”
은현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가게?”
“찾을 수 있는 수단이 생겼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당장 출발할 거야.”
“흐음, 말은 이렇게 했지만, 결국엔 혼자 가는 거야? 이쪽에 손이 남는 사제 하나를 붙여줄까?”
“아니, 괜찮아. 전력이라면 충분해. 리아를 데려갈 거니까.”
“이 꼬마 인형?”
“본 개체는 꼬마가 아니라고…으브읍.”
은현은 에밀리아의 입을 틀어막고는 억지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아, 그래. 그래. 아무튼 난 너만 믿는다?”
“그래.”
은현은 몰래 들어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나옴으로써 신전을 빠져 나왔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아니에스의 아티팩트 속에 신력을 불어넣어 활성화시키자, 은현의 주머니가 부르르 떨며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거지같네. 진짜.”
은현은 루난에게서 들은 정보를 종합하고, 백옥의 인도가 머릿속으로 울려대며 가리키는 수도 밖을 바라보았다.
엘레노아가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은 어젯밤부터 정오가 지난 새벽사이.
반나절 사이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아마 모종의 이동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알맞은 추측일 것이라 생각했다.
“리아. 시간이 없으니까 빠르게 이동하자. 이번에 제작한 그거 꺼내.”
“본 개체는 아직 시범 운행도 하지 않은 장비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이 됩니다.”
“이건 속도가 생명이야. 시범 운행을 신경 쓸 겨를이 어디에 있어.”
“…명령을 수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