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148. 가문의 위기(1)
“오랜만에 맛보는 일상이네.”
“그러게.”
성검의 복원도 마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메르비스의 도관장실에는 펜을 사각거리는 소리와 두 사람 사이의 짧은 대화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서관 입고 예정인 마법 서적 리스트는?”
“거의 다 끝났어.”
“다음 달 것도?”
“지금 하고 있는 게 다음 달 거야. 이번 달 거는 저쪽.”
손가락으로 가리킨 서류더미의 산을 보고 책상에서 서류들을 확인하고 있던 일리아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이거.”
“어쩔 수 없잖아. 다음 달 예정 것까지 모두 처리해야 하니까. 안 그러면 우리 결혼식이고 신혼여행이고 아무것도 못 간다고.”
“아, 진짜짜증나. 왕국에서 이 자리를 주겠다고 받아들인 거, 지금 처음으로 후회하고 있어.”
평소라면 이렇게 일거리가 몰릴 일이 없지만, 은현과 일리아나는 다음 달의 일정이 적혀있는 중요한 결재서류들까지 모두 확인하느라 서류의 산과 모두 처리해야만 했다.
웬만한 것들은 비서와 새로 뽑은 부관장에게 일거리들을 넘길 수도 있었지만, 현재시점에서 도서관장인 일리아나의 결재와 판단이 필요한 서류들은 모두 미리미리 끝마쳐두자는 은현의 강력한 주장에서 시작되어 쌓여버린 서류의 산들이었다.
모든 것은 두 사람의 결혼식의 준비를 하기 위한 시간을만들기 위해 시작된 일이었던 만큼, 일리아나는 시작부터 보기 드물게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조금만 쉬었다가 하자.”
그 의욕의 불길이 3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꺼져버렸다는 것이 매우 큰 문제였지만.
“밥 좀 먹고 할까?”
“응. 그러자.”
은현의 그 제안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마냥 기뻤던 탓인지,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죽은 눈을 하고 있던 일리아나가 고개를 들어 올려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내가 뭣 좀 만들어올게. 조금만 기다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벌써 기대하는표정을 일리아나가 짓던 찰나.
똑똑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일리아나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굳이 이 타이밍을 맞춰서 손님이 찾아올 건 또 뭐람, 이라며 일리아나는 작게 투덜거리고는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에게 물었다.
“들여보내. 현아. 빨리 용건을 듣고 보낼 테니까, 바로 준비해줘.”
“그것이….”
비서는 일리아나가 아닌, 은현을 흘끗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일리아나님이 아니라, ‘수은’님을 찾아오신 손님이십니다.”
“현이를?”
“저를요?”
비서가 언급한 ‘수은’이라는 단어는 최근‘검은 마녀’의 애인이자 결혼할 남자로 밝혀지면서 소문이 자자한 은현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공개재판 당시에 빛을 받으면 새하얗게 빛나는 백은발의 머리카락과 은현이 당시의 귀족들을 대상으로 퍼부었던 폭언이 그의 이명이 붙여지게 된 계기였다.
‘수은의 뱀’이라는 ‘은색 독을 품은 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명이 달라붙은 것을 시작으로 많은 귀족들 사이에서 은현을 지칭하나는 하나의 수식언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
자신의 남자를 깎아내리는 불쾌한 단어의 뜻을 일리아나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정작 은현이 피식 웃으며 재미있는 이명이라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해프닝이었다.
“네….”
도서관의 직원들은 이전부터 은현을 서먹서먹하게 대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공개재판을 이후로 더더욱 은현을 대할 때마다 긴장하고 겁을 먹기 일 수였다.
그것은 지금 손님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하러온 비서 또한 마찬가지.
자연스레 은현의 붉은색 눈동자를 본 것만으로 자연스레 몸을 움츠린 비서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의 물음에 대답했다.
“들여보내주세요.”
그 반응을 보고 쓰게 웃은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찾아왔다는 손님을 맞이했다.
그리고 비서의 안내에 따라 도서관장실을 찾아온 한 명의 노집사가 고개를 숙이면서, 정중하게 격식을 차린 인사를 은현과 일리아나에게 건냈다.
“…아르미타스 공작님 저택의 집사장님 이시군요.”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들어 올린 집사장의 얼굴은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초조함과 당황, 다급함 등의 긴박한 감정들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런 집사장의 분위기를 본 은현과 일리아나는 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짐작과 함께 자연스레 인상을 찡그렸다.
“집사장님이 직접…? 공작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기신겁니까?”
“…….”
집사장은 곧바로 입을 열려 했지만 도서관장실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비서를 흘끗 바라보고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타인에게 쉽게 발설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눈치 챈 비서가 한두 번 겪어본 일도 아니었기에 눈치 빠르게 일리아나와 은현에게 인사를 하고는 도서관장실을 나갔다.
일리아나와 은현을 개인적인 용무로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나라나 귀족들이 엮여 있는, 밝혀선 안 되는 비밀스런 용건이 대다수였기에, 비서는 깔끔히 물러났다.
“공작님께서…은현님을 급하게 찾으십니다. 부디 바로 공작저택으로 와주 실 수는 없겠습니까?”
“무슨 일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아가씨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은현과 일리아나의 인상이 단번에 찡그려진다.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저택과 가문의 일을 관리하는 총괄 책임자 중 하나인 집사장이 ‘아가씨’라고 지칭하는 인물이라고 해봐야, 단 한 인물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어째 더럽게 불길한 기분이 드는데.”
일리아나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집사장의 입이 다시 열렸다.
“엘레노아 아가씨께서납치되셨습니다.”
“…….”
은현의 침묵도 잠시, 곧바로 일리아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의향을 살폈다.
“갔다 와…. 아무래도 한가롭게 점심 메뉴를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으니까.”
“미안해.”
“됐어. 두 가지만 약속해. 결혼식 준비 일정, 안 바꿀 거니까, 빨리 끝내고 와. 그리고 다치지 말고.”
“노력해볼게.”
“한 번이라도 절대로 안 다치겠다는 확답을 주는 적이 없어. 진짜.”
“난 이미 한 번 너한테 큰 거짓말을 했잖아. 그런데도 믿어?”
- 살아서 듣는다고 했잖아…. 내 말 꼭 들어준다고 했잖아!
이미 한 번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은현의 말을 일리아나가 과연 다시 한 번 믿어줄 수 있을까.
은현은 의문이 들 수밖에없었다.
일리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을 흘겨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현의 멱살을 붙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츄읍.”
순식간에 일리아나 쪽으로 은현의 얼굴이 끌어당겨지고 그대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어 혀를 집어넣는다.
더진득한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일리아나는 자제를 하고 그의 얼굴에서 입술을 떼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치지 말고 살아서 돌아만 와. 그러면 다른 여자를 만들어서 와도 다 용서해줄 테니까.”
“…넌 가끔 진짜로 무서운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 그러다가 진짜로 내가 다른 여자랑 바람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나는 절대로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이것은?
은현은 살짝 질린 기색을 내보이며 흘끔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집사장의 눈치를 봐야했다.
급박한 상황임에도, 집사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은현과 일리아나의 작별의 시간을 존중해주고 있었던 것에, 은현은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돌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기습적인 것 좀 하지 마. 안 부끄러워?”
“너야말로 나이는 다 먹을 대로 먹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체면을 차리고 있는 거야. 엄밀히 말하자면 너 저 집사장보다…읍.”
“그만.”
황급히 일리아나의 입을 틀어막아 말을 끊어버리고는 이내 그녀의 입에서 손을 뗐다.
“아무튼 내 말 알겠어? 무사히, 살아서만 돌아와. 그러면 다 용서해줄게. 오케이?”
“…알았어.”
은현은 그렇게 일리아나를 뒤로하고 집사장의 뒤를 따라 걸으며 메르비스 마법도서관의 건물을 나왔다.
공작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마차에 올라타자, 집사장은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았다.
마차 속에서 은현은 많은 생각을 했다.
엘레노아를 납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몸값일까, 아니면 공작 가문에 대한 원한일까, 단순한 쾌락을 추구하는 무차별 범죄에 엮인 것일까.
현재로서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나도 적고 반면 떠오르는 상상들은 무수히도 많았기 때문에, 생각만 많아지고,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고민만 쌓여간다.
그러던 와중에 떠오른 한 가지, 현 시점에서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카드들이 무엇들이 있는지를 점검해나갔다.
대강의 생각을 마치자, 공작가문의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정문을 지나 저택의 앞에서 멈추고 문을 열어 정중히 은현을 모시는 태도를 취하는 집사장의 태도에 은현은 송구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마차에서 내렸다.
똑똑
“공작님. 은현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라.”
곧장 집사장의 안내를 받아 아브로스의 집무실 앞으로 안내받은 은현은 허가가 떨어지자 집사장의 인도에 따라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의 테이블에는 아브로스와 그의 아내이자 현 공작부인인 루네스, 알렉스의 세 사람이 침중한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은현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살며시 얹고 고개를 숙이며 루네스에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부인. 아르미타스 공작님과 개인적으로 협력관계를 가지고 있는 은현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당신이…듣던 대로 매우 젊어 보이는군요.”
“애석하게도 이 외모 때문에 의도치 않는 오해를자주 받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아들이나 딸에게나, 자주 듣고 있었어요. 이제 와서 당신의 존재를 오해할 요소도 뭣도 없지요. 딸은 오히려 당신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일이 굉장히 많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말도 자주 했지요.”
“…공녀께서 그런 말씀을?”
“일단은자리에 앉지.”
“알겠습니다.”
계속 서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적절한 타이밍에 아브로스가 은현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고, 곧바로 본론을 물었다.
“집사장님께는 공녀님이 납치당하셨다는 말씀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를찾으셨다고요.”
“그렇다.”
“…어째서입니까?”
“엘레노아에게 붙여두었던 호위기사 둘이 당했다.”
“…그때 리오드의 원정에 참여했던 두 기사님들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지만, 아브로스가 앉아있는 소파의 팔걸이의 모서리 부분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손의 떨림이 그의 속심정이 어떤지 잘 표현해주고 있다.
“레노라는 기사님이군요.”
“너와는 불편한 인연이었겠군.”
이전 엘레노아를 속여서 낚아 올렸을 때, 자신을 죽이려는 레노를 너무나도 간단히 제압했던 그때의 일은 은현에게 그리 불편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싫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죠. 언젠가 저에게 다시 도전하겠다고 말씀하셨던 분이었으니까요.”
“그런가….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자정이 지난 새벽, 레노와 다른 호위기사의 시체가 도로의 중심에 널브러져 있었다.”
“새벽에 말씀이신가요?”
아브로스는 고개를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최근에는 신전에 들러서 수양과 기도를 하고 저녁 늦게 귀가하는 일이 많아졌지. 그래서 호위 둘을 붙이는 것을 조건으로 사제의 소양을 기르기 위한 미사를 허락했다. 하지만 평소를 비롯해서 어제처럼 저녁시간이 지나, 자정이 지날 때까지 들어오지 않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상한 것을 느낀 아브로스는 정오가 되기 전인 오후 10시즈음부터 공작 가문 소속의 기사들을 출동시켜 엘레노아를 찾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공작 저택에서 신전까지 향하는 길목을 모두 수색하는 과정에서 기사들이 발견한 것은 엘레노아의 호위를 전속으로 수행하고 있던 두 기사의 시체였다.
“호위 기사 둘 다, 머리가 잘려 몸만 남아있는 상태였지. 머리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딸의 흔적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짜내듯이 말하는 아브로스의 목소리에는 분함, 분노, 슬픔 등의 다양한 감정들이 묻어나왔다.
“공녀님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공녀님을 납치한 것일지가 문제인데…금전이나 요구사항이 적힌 투서 같은 건 전달된 게 없었습니까?”
“없었다.”
“저를 찾으신 이유는…”
“이미 이쪽에서 믿을 수 있을 만한 기사 둘이 당한상황이다. 게다가 아무런 흔적이나 추적에 특화된 기술을 가지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중에 떠오르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네 녀석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정보길드에도 거금을 쏟아 부어 엘레노아의 행방을 찾는 의뢰를 넣어두었다고 아브로스는 말했다.
쓸 수 있는 수는 모두 써서라도되찾아야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발휘한 아브로스가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은 은현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대가는 그 어떤 것이라도 치르겠다. 엘레노아만 찾을 수 있다면….”
-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 시끄럽다!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한 간절한 아버지의 부탁을 저택 내부의 소란스러움에 묻혀버렸고, 이내 노크도 없이 집무실의 문짝을 세차게 열어젖히고 난입하는 무뢰한의 등장에 아브로스와 알렉스가 자리에서일어났다.
“무례한!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아르미타스 공작과 소공작! 두 사람을 연행하도록 하겠다!”
“…뭐?”
“뭐라고?”
공작저택에 무단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곧장 집무실로 직행하여 난입해온 기사, 왕실근위기사단 크라시르의 단장, 월터 오르시아스는 품에서 꺼낸 서류를 펼치고는 아브로스에게 들이밀었다.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의 당주인 ‘아브로스 아르미타스’와 그 후계인 ‘알렉스 아르미타스’를 전 소공작인 ‘애슈턴 아르미타스’와 함께레니온 헤르샤의 배임횡령에 가담한 공모자로서 두 사람을 체포하겠다! 지금부터 저항할 시, 반역으로 간주하여 가중처벌이 적용 될 것이며, 범죄자 둘은 얌전히 투항하도록 해라!”
왕가의 옥새의 문양이 새겨져있는 서류는 명백히 왕가의 명령으로 발부된 체포영장이다.
범죄를 저지른 귀족들을 체포하고 심문한 뒤, 죄가 확정된다면 처형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가장 효과가 확실한 수단이다.
“이런…말도 안 되는….”
체포영장을 받은 아브로스는 서류에 찍혀 있는 페르니아스 왕가의 옥새의 문양을 확인하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것은 아르미타스의 공작가의 사람들 뿐 만이 아니었다.
‘이런 X발….’
은현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