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138. 여신들의 회의(1)
지구가 멸망한 뒤, 공허의 시대가 끝나고 종말이 찾아온 세상에 새로운 인류의 씨앗을 싹틔우고 세상을 재창조시킨 일곱 여신들은 다음과 같다.
쥬노, 결혼의 수호신
비너스, 창조와 출산의 수호신
프로세르피나, 죽은자들의 세계, 명계의 수호신
시어리즈, 곡식의 수호신
다이아나, 사냥과 달의 수호신
미네르바, 지혜와 공예의 수호신
베스타, 가정과 신전의 수호신
아르케나 대륙에는 일곱 여신이 축복을 내려 하루를 가져 ‘여신의 이름’을 내리고 ‘여신의 이름’을 가진 하루들을 모아 일주일을 만들었다는 창세신화.
첫째 날에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둘째 날에는 가정 속에서 출산을 통해 새 생명을 창조시켜,
셋째 날에 새로운 생명에 삶과 운명을 부여한다.
넷째 날에는 생명들에게 곡식의 축복을 내리고
다섯째 날에는 사냥과 가축의 축복을 부여한다.
여섯째 날에는 생명들이 더욱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지혜와 공예의 재능을 내리고
마지막 날에서는 풍족한 가정과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휴식을 명했다고 한다.
일주일 중 마지막 날인 베스타디아에는 왕국의 공직에 종사하는 시녀나 일반 병사, 기사와 마법사들 또한 왕궁에 남아 최소한의 일처리를 해야 하는 최소인원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적인 하루의 휴가를 받는다.
때문에 휴가를 받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연인,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수도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런 이들을 손님으로 맞이하여 장사를 하는 수도의 상점가에는 매주 휴일인 베스타디아마다 활기가 감돌았다.
‘세상에 내가 이 분들을 직접 만나게 되는 날이 오다니….’
인간으로써 신의 존재를 믿을지언정, 그 존재들을 직접 영접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들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어쩌면 치느님도 영접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야…. 집중하거라.]
“아, 죄송합니다.”
황급히 머릿속으로 들어온 잡생각을 떨쳐버린 은현은 베르단디의 좌석의 뒤편으로 다가와 가만히 서있었다.
회의실의 원탁에 배치된 의자들은 널리고 널렸지만, 불규칙적인 배열로 곳곳이 따로따로 앉은 일곱 여신들의 위치를 보고, 의자들이 모두 각자의 주인이 존재하는 신의 의자였음을 직감했다.
멋대로 앉아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에 베르단디의 뒤편에 서서는, 베르단디의 양 옆의 자리에 앉아 있는 우르드와 스쿨드를 보고, 작게 인사를 건냈다.
“두 분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도의 권능을 내려주신 이후론 처음 뵙네요.”
[…그래.]
[그렇네요.]
한 여신은 시큰둥하게, 한 여신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은현의 인사를 받아주었고, 은현은 다시 시선을 원탁의 중앙으로 옮겼다.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번 회의에는 사도로 임명된 인간과 인간의 감독역인 노른의 세 여신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이의가 있는 신은 지금 손을 들어주길 바란다.]
진중하고 강압적인 목소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여신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이번 창세 회의의 시작을 선언하도록 하겠다. 첫 번째 안건은 필멸자들의 영혼을 가지고 멋대로 농락한 ‘사령술사’라는 존재에 대한 처우다. 프로세르피나, 대륙을 어지럽힌 ‘사령술사’와 ‘연금술사’라는 존재들은 현재 어떻게 됐지?]
죽은 인간들의 영혼들이 모이는 장소, ‘명계’를 관리하는 신의 부인인 여신이 이 회의를 이끌어가고 있는 쥬노의 질문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그 두 영혼은 명계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사망하지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그 ‘망자의 여왕’이라는 초월자가 아직 그 두 영혼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군. 결국에는 소생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고.]
[분하지만 그렇네요. 명계에만 그 영혼들이 도착한다면, 정화의 과정도 없이 곧장 소멸시키는 강수도 취할 수 있겠지만…영혼들이 하계에 묶여 있는 이상, 저나 남편이 손을 쓰는 건 불가능해요. 하계에 대한 간섭은 정말 뚫기가 어려우니까요. 애초에 그 존재는 정말로 규격 외의 존재에요. 명계에 간섭하여 영혼을 강제로 끄집어가는 존재라니….]
자신들은 어떻게 제약을 걸 수도 없는데, 상대 쪽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쪽의 영역에 간섭하여 원하는 것을 취해온다.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신’이란,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로 묘사가 되지만, 현실은 ‘신은 하계에 간섭할 수 없다.’라는 단 하나의 제약 때문에 너무나도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신들의 입장에서도 메디아의 존재는 정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골치 아픈 문제인 듯 했다.
[…현재로선 어쩔 수 없군. 어쨋든 악마들과 함께, 그 초월자가 마계에 봉인되어 있는 이상, 당분간 위험한 상황은 나오지 않겠지.]
[애초에 그 초월자가 정신체만이라도 하계에 현현한 이유는 저 인간 때문이 아닌가?]
근본적으로 메디아가 하계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오랫동안 염원했던 은현과의재회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을 한 여신이 지적하자, 베르단디가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이아나, 그것이 어째서 내 아이의 잘못이라는 거지? 내 아이는 아르케나에서 많은 생명들을 구했고, 이번 사건에서도 많은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어째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이냐!]
[흥, 그럼 저 인간이 그 초월자가 나타난 인과관계에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말할 수 있나?]
은현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사랑한다며 속삭이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떠났던 메디아는 오로지 은현을 만나고 싶다는 일념하나로 등장했고, 볼 일을 마친 뒤 아무런 미련도 없이 하계를 떠났다.
[그 초월자만 난입하지 않았다면, 지금 즈음 그 사령술사와 연금술사는 처리하고 하계의 위협이 될 존재의 씨앗도 처리하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초월자가 난입해서 그 두 인간을 구출하고 보란 듯이 사라졌지. 차라리 그 자리에 저 인간만 없었다면, 상황은 쉽게 정리되었을 수도 있다.]
[아뇨.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에요.]
[…내 의견이 틀리다고 생각하는 건가, 미네르바?]
눈썹을 꿈틀거린 다이아나의 말을 부정한 미네르바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사령술사로 인해 몇 천, 일 만이 넘어갈 수 있는 인명피해를 몇 백 명으로 축소시킨 건, 저 아이의 덕이 커요. 명백히 본래의 운명의 흐름을 비튼 결과죠.]
[몇 천이던, 몇 만의 인간들이 죽어나가던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제일 문제가 되는 건 하계의 멸망을 초래할 운명을 가진 씨앗들을 없애지 못하고 놓쳤다는 거지!]
신들에게 있어, 인간들의 생명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인간은 세상을 유지시키고 순환시키는 소모품과도 같은 존재이며, 필요하다면 세상을 창세시킨 것처럼,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인간다.
그런 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계의 관리’이며 하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생명들의 죽음은 세계의 순환의 일부로 본다.
명백히 인간과 신 사이의 가치관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은현은 새삼 이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되니, 속이 쓰라린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뭔가 불만이 있나. 인간?]
은현의 표정을 본 다이아나가 눈썹을 치켜뜨며 은현에게 물었다.
“아뇨. 없습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할 말이 있으면 해보도록.]
“없습니다.”
은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딴 표정을 지어놓고?]
“제가 무언가를 말씀드린다고 바뀌는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신께서는 제 말을 이해할 수없으십니다. 저는 한낱 인간일 뿐이니까요.”
여신이 인간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두 존재 사이에는 태생이 다르고, 역할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다.
[…뭐라고?]
“하지만, 저는 여신님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공감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은현은 신들의 사고방식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400년 동안 저 사고방식에 맞춰오며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죽이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선택’해오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이해를 바라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것 뿐, 은현은 이미 신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지겹게 시달려온 시점에서 실망했고, 체념을 하고 있었다.
그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에 베르단디가 미안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인간 따위가 신인 나와 말장난을…!]
[그만!]
[크…!]
회의를 이끌어가고 있던 쥬노의 노호성이 터지자, 다이아나가 입술을 깨물며 은현을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300백 년 전, 우리 일곱 여신이 대륙을 창세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 사령술사 마녀를 죽여 수많은 인명피해를 막은 저 아이의 업적을 나는 존중한다. 이 자리는 저 아이에게 책임을 묻는 자리가 아니다. 다이아나, 자리에 맞지 않는 불필요한 말은 삼가도록.]
[크…으! 알겠…습니다….]
분한 표정을 지으며 다이애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모욕감을 안겨줬다는 생각에 분노로 몸을 떨며 은현을 노려보았다.
은현은 여신의 분노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담담히 서있었지만, 오히려 은현의 팔을 잡아끌며 자신의 의자 뒤로 숨기고, 다이아나의 눈초리에서 은현을 보호하는 베르단디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신님. 저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다.]
은현이 베르단디의 행동이 고마워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두 번째 안건은 이번에 노른의 세 여신의 아이인 저 아이에 대한 보상이다.]
‘뭐요?’
뜬금없이 자신이 화제에 오르게 되자, 은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베르단디의 표정을 살폈다.
[후훗.]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여신의 표정을 보고, 양 옆의 우르드와 스쿨드의 표정을 살폈지만, 두 여신은 베르단디와는 달리,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고, 은현과 눈을 마주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두 여신의 반응이 ‘너는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라는 것을 긍정해주는 것과도 같았기에, 은현은 뭐라 형용할 수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따라서, 나, 쥬노는 ‘노른의 아이’에게 ‘불카누스의 망치’를 수여할 것을 건의하는 바이다. 이에 대한 찬반의 투표를 실시할 예정이며, 사도의 감독역인 ‘노른의 여신’ 셋은 이 투표에 참여할 수 없다. 동의하는가?]
[동의합니다.]
세 여신 중 가장 맏이에 해당하는 우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하는 것으로 투표는 시작되었다.
결론은 찬성 5, 반대 2으로 은현에게 ‘불카누스의 망치’가 수여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반대를 한 두 여신 중 하나는 당연히 다이아나였으며, 투표의 결과에 잔뜩 불만을 토로하며 씩씩거리던 다이아나와는 달리, 또 다른 여신은 묵묵히 은현을 바라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투표의 결과, 찬성 5의 과반수로 노른의 아이에게 불카누스의 망치를 수여하도록 하겠다. 아이는 질문이 있느냐?]
“…망치?”
[인간인 아이에게는 신들의 무구를 보는 것은 처음이겠구나.]
쥬노는 원탁의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은현에게로 다가왔다.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손바닥을 보이자, 그 위에 새하얀 불꽃이 떠다니기 시작한다.
“이건. 아….”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은현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가슴속에 성염(聖炎)을 밀어 넣자, 자연스레 은현의 몸이 쥬노가 만들어낸 불꽃을 흡수하여 몸 안에 받아들였다.
신기하게도 몸 안이 차분해지고, 그러면서도 포근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명백하게 성염이 들어오기 전과 후의 차이가 크게 드러나는 것을 느끼며 은현이 신기하면서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망치’를 상상해 보거라. 그냥 망치가 아닌, 대장장이로서의 네 모든 기술의 정수를 담아낼 수 있는 최고의 망치를.]
쥬노의 조언을 받아들이며 실행에 옮긴 은현의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이 일품인 대장장이 망치가 쥐어졌다.
“이게…신의 무구…입니까?”
[그렇다. 정확히는 아이의 영혼 속에 직접 불카누스의 무구를 각인시킨 것이지. 신의 무구에는 형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의 역량과 바람에 따라 알맞은 형태로 만들어질 뿐이지.]
반대로 사용자인 은현의 역량이 부족하고, 바람과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한 명확한 의지가 없다면, 신의 무구를 완전히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 뿐 만이 아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 신의 무구를 영혼에 새긴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몸 안에 신력이 깃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건…확실히 굉장하네….’
언제나 베르단디에게서 신력을 공급받아 빌려 쓰는 식으로 사용했던 은현에게 있어서는 자신만의 신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은현은 신의 무구를 전달해준 쥬노 뿐만이 아니라, 투표에 참가를 해주었던 여신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번째 안건도 마무리가 되었으니, 이것으로 ‘창세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다.]
쥬노의 선언이 끝남과 동시에, 용건을 마친 여신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 너는 적당히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밝은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놓이네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심한 우르드와는 달리, 스쿨드는 베르단디처럼 은현의 정신이 망가져가고 있었던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또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할게요.]
“네. 들어가세요.”
그렇게 우르드와 스쿨드도 사라지자, 은현은 베르단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신님. 그럼 저도 이제….”
[얘.]
“예?”
은현은 베르단디와 작별의 인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이내 자신을 부르는 한 여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기다란 은색머리카락을 가진 여신이 눈웃음을 지으며 은현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를 건 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