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136. 성녀 후보(1)
“…이게 무슨 소리지?”
기분이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아브로스의 인상이 단번에 찡그러지며 아니에스에게 되물었다.
자신의 딸인 엘레노아를 베스타 신전의 수작질에서 지켜주기 위해 큰 도움을 주었던 아니에스가, 신전의 하르칸 주교와 비슷한 의도로 엘레노아를 포섭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어 자연스레 인상이 찡그려 진다.
아브로스와 알렉스의 표정이 단번에 굳는것을 보고 아니에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엘레노아를 신전 쪽에서 어떻게 포섭을 해보려는 검은 속셈 같은 건 추호도 없어. 그런 걸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렇다면 어째서지?”
“그냥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의사야. 아니 여신님의 계시가 포함되어있으니, 내 개인의 의사라고 하기는 것도 뭐한가? 아무튼 신전과는 관계가 없어. 베스타 여신님께서 엘레노아를 눈여겨보고 있으니까.”
“여신께서 저를…말씀이 신가요…?”
“응. 정확히는….”
아니에스가 흘끗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엘레노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흠?”
그녀의 시선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던 은현은 잠시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녀의 말을 끊어 방해하지않고 잠자코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 사태만큼은 은현도 상정하지 못했던 전개였기에, 지금은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우선시하기로 정한 것이다.
“여신께서는 엘레노아를 내 다음 대의 ‘성녀’로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더라.”
“뭐라고?!”
“그게 무슨….”
아니에스의 말을 들은 아브로스와 알렉스가 경악에 찬 시선으로 엘레노아를 바라보았다.
당혹스러운 것은 여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엘레노아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리오드의 집무실 안에 있던 리오드와 테레지아 부부 또한 같은 반응이었다.
일리아나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다과를 입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고.
“흐음….”
오직 은현만이 자신의 턱을 손으로 감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런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현을 본 아니에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넌 전혀 동요하지 않네.”
“아니, 뭐….”
“오히려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
확신에 찬 표정으로 묻고 있는 아니에스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는 것을 감지한 사람들이 조용해져, 집무실 안을 침묵으로 가득 채웠다.
“예전부터 넌 그랬어. 네가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그걸 이야기 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우리도 묻지 않았었지. 하지만 이번 일 만큼은 예외야.”
자신이 모시는 베스타 여신이 관계된 일인 이상, 그것이 은현과 연관이 되어 있는 이상, 아니에스는 은현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알아야만했다.
“말해. 너 베스타 여신님하고 무슨 관계야?”
“베스타 여신하고 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그럼?”
“20년 전에, 대전쟁에서 내가 한 번 죽었다는 건 알지?”
“그렇지. 우리가 친히 니 시체를 묻어주기까지 했는데. 그래서 일리아나가 날 찾아와서 너랑 결혼한다고 했을 때, 쟤가 드디어 미쳐 돌았나 생각했던 거고.”
“내가 어떻게 되살아났을 거라고 생각해?”
“…신이 너를 되살렸다는 얘기야?”
“맞아.”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은현의 말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제국의 황제를 죽이고, 은현의 시체를 친히 묻어주었던 세 명의 영웅들은 그때의 은현의 희생을 아직까지 잊지 못하고, 머릿속에 깊은 죄의식이 박혀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되살아나서 페르닌을 찾아왔을 때, 가장 기뻐해주었던 것도 리오드와 일리아나였다.
“신이라….”
너무나도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입에 담으며 리오드가 곱씹었다.
“너의 그 ‘환상세계’라는 능력이나, 허공에서 무기를 소환해내는 능력,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은 그 신의 힘이라는 것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가?”
“응. 어느 정도 제약은 존재하지만 대강 그래.”
“그랬군.”
지금껏 보여주었던 이상한 능력들이 ‘마법’이 아닌 신의 능력의 일부였다는 것에 리오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베스타 여신님과는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창세했다는 일곱 여신 중 한 명이라는 얘기야?”
“아니, 그쪽 계열의 여신도 아니야. 이름을 말해 봐도 모를 테니, 그 얘기는 넘어가자.”
지구가 그나마 존재했던 시절에는 베르단디를 포함한 운명의 세 여신, ‘노른’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신들이 존재했다.
지금은 멸망한 세상을 재창조시켰다는 창세 신화 속의 일곱 여신들을 제외하면, 잊혀져버린 마이너한 신들이나 다름이 없다.
베르단디가 은현의 이런 생각을 알았다면, 내심 서운한 표정을 지었으리라.
“일곱 여신 이외에도 신이 있다고?”
“사실 신화 쪽의 책이나 신전에서 말로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어도 감이 잘….”
사람들의 회의적인 시선이 오가는 것도 그리 이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을 재창조 시켰다는 일곱 여신들 중에서도 인간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구원을 하고 있는 것은 베스타 여신이 유일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아르케나 대륙의 종교는 거의 베스타에 대해 ‘유일신’ 같은 입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만큼 대륙에서 베스타 신전의 입지는 매우 굳건했다.
새삼 생각해보니 하르칸 주교는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신전 세력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리오드에게 그렇게 배짱을 부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계시’의 내용이 정확히 뭐였어?”
“…저 아이를 성장시키고 자신의 힘을 품을 수 있도록 키워서 세상의 고통 받은 어린 양들을 구원하라.”
“대놓고 밀어주겠다는 의미네. 그래서 거기서 내가 왜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 거야?”
“이 타이밍에, 이 나라에서, 너와 관계된 사람을 여신께서 점찍었는데, 그걸 어떻게 너랑 연관을 안 지을 수가 있겠어?”
무슨 인과로 은현이 되살아났고, 은현이 있는 페르니아스 왕국에서, 은현이 강제적으로 위계를 끌어올렸던 사제를 직접 지명했다.
은현도 이것이 그냥 정해진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런데 당최 무슨 의도이신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은현이라고 신들의 생각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복잡한 생각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은현은 슬쩍 자신의뒤편의 허공을 바라보았지만,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던 은현의 여신은 현재 신계로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신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어도 제대로 된 방법이 존재하지 않자, 그저 한숨을 내쉬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왠지 이 자리에서 저는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얘기들이 오가는 것 같군요….”
“신경 쓰지 마. 이런 건 고민해봐야 더 복잡해져. 어디 가서 발설만 안하면 되니까.”
“언니가 너무 태평한 거예요….”
아무리 남편과 남편의 친구들이 세상을 구한 영웅들이라지만, 지금껏 개념이 모호한 진짜 ‘신’의 존재에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에 테레지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평범한 귀족 여성에 불과했던 그녀로서는 너무 감당하기 버거운 사실들이었다.
“뭐, 네 표정을 보니 정말로 모르긴 한 것 같네. 그래도 고마워. 네 비밀의 일부를 털어놓아 줘서 ”
“아니, 뭐. 지금이니까 얘기해줄 수 있는 거야. 이제는 어느 정도 날 옭아맸던 제약들이 사라졌으니까. 20년 전에 물어봤다면, 난 대답하지 못했어. 공작님, 알렉스, 저와 공녀님, 그리고 아니에스가 관계된 ‘신’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이 사실이 밝혀진다고 믿어줄 사람도 거의 없겠지만…그래도 밝혀서 좋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이 되네요.”
“…알았다.”
“알았어.”
무겁게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공작가문의 두 사람도 딸이자, 여동생인 엘레노아가 관계된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은현이 죽다가 되살아났다거나, 신의 힘의 일부를 이어받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 따위는 전혀 믿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엘레노아의 이야기와, 일반적인 범위를 벗어나, 이해를 초월한 힘과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은현이었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에게 직접적으로 간청을 드려 주교의 신성력을 거두어들이게 만들었다는 아니에스가 있었기에, 더더욱 부정할 수 있는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아니에스는 시선을 돌리고 은현을 따라 아브로스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공작.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세히 설명해줄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제안은 신전이나 교황 등의 고위직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오히려 당신의 딸을 내 다음대의 성녀로 앉히겠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대외적으로 이 사실은 비밀로 부칠 거야. 공표되는 순간 많은 논란과 위험에 노출될 테니까. 당연히 엘레노아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책임을 지게 할 생각도 없어. 그런 건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지게 되는 거야.”
“…으음.”
“아버지.”
고민하고 있는 아브로스를 알렉스가 조심스레 불렀고, 엘레노아에게 눈짓했다.
“엘레노아,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저는….”
질문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엘레노아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갑자기 현 베스타의 성녀의 뒤를 잇는 자리를 제안 받은 것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도 부족함이 많은 사제일 텐데, 자신보다 위계도 높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하고, 뛰어난 사제들이 많을 텐데,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자리가 온 것일까.
순간 그녀는 아니에스가 했던 말을 번뜩 떠올리고 조심스레 은현의 얼굴을 응시했다.
조용히 엘레노아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던 조용한 집무실 안에서, 엘레노아의 시선을 받은 은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 이 타이밍에, 이 나라에서, 너와 관계된 사람을 여신께서 점찍었는데, 그걸 어떻게 너랑 연관을 안 지을 수가 있겠어?
‘생각해보면 이 상황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이 사람 때문이잖아.’
그와의 첫 만남은 그리 좋지 못한 관계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때 엘빈이라는 흑마법사에게서 자신을 구해낸 은현은 어찌 보면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싫어하면서도 자신의 요청을 받아주어 오라버니인 알렉스를 구조하기 위해 아르키스 대미궁에도 함께 가주었다.
은현이 자신의 가슴 속에 성물을 박아 넣음으로써 신성력의 위계를 강제적으로 끌어올려졌다.
‘책임’을 져주겠다는 것으로 그의 도움을 받아 끔찍이도 싫었던 혼담도 무산되게 만들어주었다.
은현의 인맥인 아니에스가 그의 도움 요청에 응하여 나타나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
은현에게서 받았던 많은 은혜와 복잡한 감정들을 느끼면서 엘레노아는 생각한다.
‘어쩌면 베스타 여신님은…?’
조심스레 그런 계시를 내려 아니에스가 자신에게 다음대의 성녀의 자리를 물려줌으로써 자신을 성장시키려는 여신의 의도를 추측한다.
‘이 사람을 도우라고 나를 선택하셨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신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하고 결론을 내린 엘레노아는 결심을 굳히고 아브로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할게요.”
“…정말이냐?”
“엘레노아, 이건 굳이 네가….”
“아니요. 오라버니, 여신께서 제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제시해주시기 시작하신 거예요. 저는 이 일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해요.”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굳게 결심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아브로스는 더 이상 말려 봤자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정말 어머니를 닮아서 고집이 세.”
“후,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
두 사람의 허락이 떨어지자, 엘레노아도 안심한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내 아니에스를 바라보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묻는다.
“저는…이제 뭘 하면 되나요?”
“응?”
“아니, 대주교님의 뒤를 이으려면…대주교님만큼 강해져야하는 거 아닌가요? 저도 그…싸움을 배운다거나….”
“엘레노아. 그건 아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아. 그건 아니야.”
은현의 ‘환상세계’를 통해서, 아니에스가 무차별적으로 하르칸 주교를 폭행했던 것을 떠올린 아브로스와 알렉스가 표정을 굳히고 황급히 부정했다.
엘레노아가 그런 아니에스처럼 된다는 것을 상상하고 그녀처럼 변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탓이 컸다.
“으음,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는 나처럼 될 수 없어.”
“네?”
“애초에 내가 이런 싸움방식을 하게 된 건, 내 신성력으로 바뀐 체질도 있지만, 이 놈 탓이 거.”
아니에스가 손가락으로 은현을 가리키자, 엘레노아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또 이 남자인가요?”
“뭡니까. 그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은 상처 받는데요.”
“나는 신성력을 부여받아 사제가 된 순간부터 육체의 성장이 멈춤과 동시에, 질병이나 상처를 잘 입지 않고 신성력으로 보호받는 체질로 변했거든. 기본적인 신체의 스펙만 놓고 본다면, 내가 리오드보다 훨씬 높아.”
“그, 그게 정말인가요?”
“근데 신체의 스펙만 높지 공격능력은 영 아니었던 지라…. 성장이 멈춰서 팔다리도 더럽게 짧고, 검이나 무기도 다룰 줄 모르고, 결국엔 성질을 못 참고 전선에 나서서 싸우고 싶다고 이놈한테 땡깡 좀 부리니까 날 훈련시키더라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됐지.”
“…어떤 훈련이었는데요.”
은현이 에린과 에이라를 어떻게 훈련시켰는지, 알고 있던 엘레노아는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정권지르기 100번 하고 기도 한 번. 팔굽혀펴기 50개하고 기도 한 번, 윗몸일으키기 50개 하고 기도 한 번, 이런 식으로 개수와 세트를 정해 놓고, 클리어 할 때마다 신께 기도를 드리는 식으로 10번의 기도를 채우는 거야. 이걸 하루 3시간 내로 채우는 짓거리를 계속 하다보니까. 이렇게 되더라. 근데 이게 또 하다보니까 적응이 돼서 요즘도 자주해주고 있어.”
“…….”
이제는 추억이 됐다는 듯 피식 웃는 아니에스를 보고 인상을 찡그린 알렉스가 은현을 보며 중얼거렸다.
“미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