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134. 인파이터 사제(2)
“조만간 페르닌 지부의 새로운 주교의 선출이 있을 예정이니, 그렇게 전달해. 불만이 있으면, 날 찾아오라고 전하고. 문제 있어?”
“전혀 없습니다. 대주교님.”
“이 소란이 났는데도 신전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고위직 관계자들이라면,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았거나, 내가 왔다는 얘기를 접하고 같잖은 핑계를 대며 내려오지 않았거나 대강 그런 등신 같은 이유겠지. 그딴 것들도 나중에 싹 다 처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성기사의 태도는 아니에스에게 검을 들이댔던 아까 와는 전혀 딴판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마치 성인(聖人)을 모시는 듯 경건한 자세로 짧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신실한 성기사의 표본과도 같았다.
아까 전까지 두들겨 맞으며 일방적인 폭력에 굴복한 성기사가 도대체 무슨 감성으로 아니에스에게 심취하게 된 것인지, 엘레노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 내 쪽에서 할 말은 다 끝났고, 따로 할 말이 없으면 이만 가봐. 난 오랜만에 본 내 친구랑 얘기 좀 나눠야 할 것 같으니까.”
“대주교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돈으로 갑옷은 좀 바꿔, 일단은 내 공격으로 그렇게 된 거니까 좀 그렇네.”
“아닙니다! 대주교님의 권격을 맞은 이 갑옷은 제 평생의 가보로….”
“아, 가보로 삼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새 걸로 좀 사 입으라고! 그렇게 찌그러진 갑옷을 입고 다니면서 베스타 신전을 욕보일 생각이야? 당장 바꿔!”
“아, 알겠습니다….”
인상을 찡그리며 짜증을 내는 아니에스의 태도에 성기사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너 이름은?”
“아르덴, 아르덴 베르스입니다.”
“흐음, 좋아. 아르덴. 이름 기억해둘게.”
“감사합니다!”
아니에스의 말 한마디에 시무룩해졌던 성기사의 얼굴이 아니에스의 말 한마디에 또 다시 밝아지는 것을 보며, 엘레노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꼬리라도 있다면 세차게 흔들 것 같은 표정이 커다란 대형견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아르덴…. 너 취향이….”
자신과 같은 학년으로, 아이테르에 입학하고 같은 시기에 졸업하여 엘레노아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남자 인맥 중 하나의 성향을 확인한 엘레노아는 살짝 질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르덴은 오히려 엘레노아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엘레노아님. 저는 오늘 진정한 사제님을 만난 것 같습니다.”
“아, 그러세요….”
저 감성에 엮이고 싶지 않았던 엘레노아는 존댓말을 섞으며 아르덴과의 정신적인 거리감을 형성했지만, 아르덴은 전혀 개의치 않고 아니에스만을 보고 있었다.
“됐어. 이제 가봐.”
“예. 대주교님.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라도 저에게 말씀을 해주십시오. 모든 일을 제쳐두고 곧바로 달려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그럼.”
고개를 숙이고 문이 없는 출구로 걸어가 주교실에서 나가는 아르덴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아니에스는 리오드와 은현을응시했다.
“흐음, 진짜로 살아났네. 이거?”
“못 믿겠지만, 진짜다.”
그녀가 은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리오드에게 묻자, 그의 확인을 받고는 다시 은현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한다.
“살이나 피가 흐르는 육체는 명백히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니까, 언데드는 아닌데…. 신기하네. 진짜로.”
그런 아니에스의 시선을 받으며 쓰게 웃은 은현이 중얼거렸다.
“이거라니. 오랜만에 봤는데, 너무하네.”
“니가 너무 인간 같지 않은 부분들만 보여줬으니까 그렇지. 아, 칭찬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것보다, 신전 밖에서 일리아나가 기다릴 테니까, 빨리 이동하자.”
“그러네.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은현의 제안에 일행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신전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던 은현 일행이 신전의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리아나와 마주쳤다.
“뭔 짓을 하고 있던 거야? 건물 전체가 울리던데.”
“신전 안이 너무 개판이라서 교육 좀 시켜주고 왔지. 그래서? 얘기는 어디 가서 할 건데?”
“내 집으로 가도록 하지.”
“그러고 보니, 소식만 듣고 네 결혼식에는 참석도 못했었네. 미안해. 그리고 뒤늦게나마 축하한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상관없다. 성국 쪽도 바빴을 테니.”
“아, 나 그럼 잠깐 집에 좀 들렀다가 갈게.”
리오드를 선두로 그의 저택으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용무가 생각난 듯 일리아나가 이탈의 의사를 보내왔다.
“무슨 일이지?”
“아니, 그냥…테레지아한테 선물 해주고 싶은 게 있어서.”
“…선물이라고?”
일리아나의 묘한 어투에 리오드가 살짝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최근, 은현을 통해서 일리아나를 부추긴 것이 테레지아라는 것을 들은 순간부터, 리오드는 아내인 테레지아와 일리아나가 사적으로 자주 만남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여자들이 그렇게 사적인 만남을 가지는 것은 리오드 뿐만이 아니라, 은현에게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난 잠깐 ‘선물’만 챙기고, 곧장 너네 집으로 갈게.”
“…알았다.”
무슨 선물을 주겠다는 건지, 리오드는 매우 신경이 쓰였지만, 아내들 사이의 일을 굳이 캐묻는 것도 뭐했기에 집요하게 추궁하지는 못했다.
‘저걸 진짜 주려는 건가…X됐네…. 뭔가 진짜로 미안하다. 리오드….’
반면, 은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기 때문에, 리오드는 은현에게 물었다.
“너는 일리아나가 테레지아에게 주려는 선물이 뭔지 알고 있는 건가?”
“…어.”
“도대체 뭐지?”
“말 못해.”
“…어째서지?”
“모르는 게 좋아. 아니, 언젠간 알게 되겠지만…후작부인이 알아서 하겠지. 위험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너무 크게 걱정하지는 마.”
“…일리아나가 순수하게 호의로 선물을 하려는 것은 알고 있다. 일단은 그렇게 알도록 하지.”
“그래.”
차마 ‘니 아내에게 우리 부부가 자위 도구를 선물했다.’라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은현은 애써 잘 둘러대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나는 알렉스와 공작님을 모셔오도록 해볼까.”
“아버지를요?”
“공녀님의 혼담 소식도 깔끔히 무산됐다고 보고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앞으로의 일도 논의해야 하는 만큼, 그냥 한 자리에 모아두고 처리하는 게 더 효율적이죠.”
“그러면 차라리 저희 저택으로….”
“이미 공작께는 연통을 넣어 두었다. 업무를 마치는 대로, 소공작과 함께 내 저택으로 오실 예정이시니, 굳이 갈 필요 없어.”
“아, 그래? 알았어.”
“왜 저만 몰랐던 건가요?”
“깜빡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 진짜…. 깜빡할게 따로 있죠!”
“아, 죄송하다고요.”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리오드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은현을 보며 엘레노아가 분한 듯 이를 잔뜩 갈며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흐음?”
“대주교님? 왜 그러시나요?”
두 남자의 대화를 가만히 들으며 뒤를 따라가고 있던 아니에스가 흥미로운 소리를내자, 함께 걷고 있던 엘레노아가 물어보았다.
“아니, 저 녀석. 이제는 생각보다 여유가 있어보여서.”
“여유…? 저 남자가 말씀이신가요? 저 사람은 평소에도 저런 태도가 아닌가요?”
“아니, 뭐…딱히 뭐라고 표현은 못하겠는데, 꼭 뭐에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항상 뭔가에 얽매여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다 내려놓은 것 같은 표정이네.”
“…….”
“뭐, 등신 같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자 마음도 모르고 살다가 이제 와서 결혼할 마음이 생긴 걸 보면, 되살아나고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지도 모르지. 그리고…이전보다 몸 안에 품고 있는 신의 힘의 밀도가 더 높아졌어.”
“신의 힘….”
엘레노아는 사룡의 브레스를 막아낼 당시, 그의 몸을 감쌌던, 신성력과 비슷하면서, 수준이 다른 힘을 느꼈던 때를 떠올렸다.
“대주교님은…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모르지. 그래도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 저기, 저 놈도 되살아났잖아.”
은현이 죽다가 최근에 다시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전의 엘레노아였다면 그런 것 따위는 말도 되지 않는다며 부정했겠지만, 은현의 몸 속에 품고 있는 ‘신의 힘’과 함께 대전쟁을 누볐던 영웅들의 반응을 본다면 은현이 한 번 죽음을 경험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생각했다.
“저 놈이 항상 지껄이는 말이 있는데. ‘이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 따윈 없다. 일어날 수 있는 일들만 일어난다. 네가 불가능하다고 다른 이들도 그것이 불가능할 거라고 단정 짓지 마라.’라는 말을 자주 했거든. 솔직히 다른 이들 입장에서 보면, 저 놈 뿐만이 아니라 육체의 시간이 멈춰있는 나나 일리아나도 불가능한 존재나 마찬가지야.”
“…….”
“난 말이지, 어렸을 때, 베스타 여신의 간택을 받아 막대한 신성력을 몸에 받아 들였지. 그게 16살 때야. 그때부터 내 몸은 이 상태 그대로야.”
어떤 이유에서인지, 은현은 나이를 먹지 않고 있다.
일리아나는 마녀의 피를 이어 받아, 그녀의 몸속에 있는 어마어마한 마력들이 그녀의 육체의 노화를 멈추게 만들었다.
아니에스는 막대한 신성력을 기반으로 최강의 육체를 손에 넣어, 맨손으로도 마수들을 찢어버릴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로 육체의 성장이 멈췄다.
지금의 아니에스의 모습은 16세 나이 때의 육체 상체 그대로이며, 그 나이대의 소녀들 사이에서도 매우 왜소한 체구의 소녀였다.
“나에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대로 불가능한 일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아요.”
메디아라는 여자 또한 그렇다.
그녀는 인간의 몸으로 많은 인간들을 학살함으로써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갈취하고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끝에는 자신의 영혼에 저주를 걸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몸에 따라붙어 있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제거했다.
말도 안 된다, 불가능하다, 있을 수 없다.
많은 이들이 그런 말을 떠들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모순을 깨부수고 당연하게 존재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자신의 상식을 깨부순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뒷모습을 천천히 응시하며, 엘레노아는 조용히 뒤따라 걸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후작 저택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많은 시종들과 하녀들이 나열하여 길을 만들고, 중앙에 서 있는 테레지아가 귀족 부인의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방문한 손님들에게 예의를 차린 인사로 맞이했다.
“와, 와아….”
테레지아의 정중한 인사를 받은 아니에스가 입을 떡하니 벌리며 멍을 때리고는 순식간에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리오드의 옷을 붙잡아 끌었다.
그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너무 큰 신장차이가 그것을 방해했기 때문에어쩔 수 없이 팔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만 했다.
“야! 너 어디서 저런 여자를 만났냐? 무지 예쁘잖아!”
“남의 아내를 두고 경박하게 품평하지 마라.”
“하! 얼탱이가 없네. 진짜, 은현 저것도 일리아나랑 결혼한다고 하고, 아주 선남선녀들만 있어서 눈꼴셔 죽겠네, 진짜?”
“후후, 칭찬 감사드립니다. 그이의 친구 분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항상 새로운 기분이 드는군요. 이번엔 굉장히 활기차신 분이시네요. 네 분 모두 개성이 굉장히 강해서 신기할 따름이랍니다.”
“확실히….”
조용히 가장 뒤에서 테레지아의 말을 듣고 있던 엘레노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르미타스의 부자 분들께서는 이미 도착하셨습니다. 먼저 저녁 식사를 대접해드릴 예정이니, 어서 위로 올라가시죠.”
“그렇군. 바로 올라가도록 하지.”
우우웅
“테레지아, 나 왔어.”
“어머나, 언니. 오셨군요.”
“…언니?”
“뭐라고?”
텔레포트를 통해서 후작 저택 내부에 나타난 일리아나를 부르는 테레지아의 ‘언니’라는 호칭에 두 남자들의 몸이 우뚝 굳어 섰다.
리오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일리아나의 양 팔에 안겨 있는 상자에게로 옮겨갔다.
“그게 ‘선물’이라는 건가?”
“넌 빨리 올라가. 이건 여자끼리 나눠야할 얘기야.”
“여자끼리?”
일리아나의 발언에 아니에스가 흥미를 보이며 귀를 기울였다.
“…리오드, 올라가자.”
“…알았다.”
상황을 눈치 챈 은현이 급하게 리오드를 재촉하며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테레지아는 재빨리 홀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과 하녀들에게 업무로 돌아가도록 지시했다.
넓은 홀에 일리아나와 테레지아, 그리고 흥미가 동한 아니에스 세 사람만이 남자, 테레지아는 일리아나에게서 받은 상자를 받아들였다.
꿀꺽, 침을 삼키고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한 테레지아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어머나….”
이내 홍조를 띄우고는 기쁜 목소리를 냈다.
“이, 이게 뭐야…?”
일리아나가 가져온 선물의 내용물을 확인한 아니에스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정말 망측하고 상스러운 모양이네요. 후후.”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언젠가 이것을 사용해보고 싶은 욕구가 가득 피어오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