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130. 원치 않는 혼담(1)
“꺼져라.”
“…….”
“고, 공작!”
“하르칸 주교께 어찌 그런망발을…!”
사령술사의 처리를 보고하고, 지방 영지와 소규모 마을들의 피해를 파악하여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궁정회의에 베스타 신전의 페르닌 지부를 관리하는 주교가 참석하면서 아브로스의 분노는 시작됐다.
“웃기지도 않는군. 내 딸을 데려가겠다는 요구를 그렇게 당당하게 하고도 내가 담담히 그것을 허락할 거라고 생각했나?”
베스타 신전 페르닌 지부의 주교, 하르칸 게렌이 아브로스에게 제시한 것은 엘레노아와 하르칸 주교의 아들의 정략적인 결혼, 그 대가로 하르칸은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에 막대한 양의 신전기금을 기부의 형태로 전달하고, 왕국의 곤란한 사건에 무조건적인 사제의 지원을 약속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어찌 보면 왕세자 책봉의 경합에서 헬레나 후비와 에반 왕자의 지지 세력을 단단하게 다질 수 있는 카드로서 신전의 지원은 두 손 들고 환영할수 있는 제안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딸을 대가로 바라는 하르칸 주교의 검은 속내만 아니었다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노기를 띤 음성과 얼굴로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해온 베스타 신전의 주교를 당장이라도 죽일 기세로 살기를 내뿜는다.
하지만 그런 아브로스의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페르닌의 베스타 신전을 관리하고 있는 하르칸 주교는 비릿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공작께서 그리 반응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공작, 아시지 않습니까. 엘레노아 공녀께서 가지신 사제로서의 재능은 정말 뛰어납니다. 그런 훌륭하신 분을 어찌 저희 신전에서 모른 척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저희는 엘레노아 공녀님을 베스타 신전에서 맞이하고 더더욱 훌륭한 사제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도록 지원해드리고 싶은 마음 뿐 입니다.”
“그렇다고 하르칸 주교의 아들과 내 딸을 결혼시키겠다고? 얼토당토 않는 소리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네놈의 검은 속내를 알고 있으니까. 네놈의 아들에게 내 딸을 내줄 바에, 차라리 귀족도 아닌 평민 남자에게 시집을 보낼 것이다.”
아브로스의 직설적인 모욕의 발언에 궁정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주위의 귀족들을 흘끔거리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정작 그 모욕을 들은 하르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비릿한 미소를 유지할 뿐이었다.
하르칸의 속셈은 너무나도 뻔했다.
위협적인 마수들의 등장과 토벌을 위해서 편성 원정대이자, 기사단의 단장인 리오드에게서 사제의 지원요청을 받은 하르칸 주교는 정작 중요한 인력은 하나도 파견을 시키지 않고, 구색만을 갖춘 형태로 수준이 낮은 사제들을 네 명 파견시키는 것으로 매우 성의 없는 태도를 보였었다.
‘이번 원정은 실패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소식을 접한 신전의 사제들은 이미 자기보신을 위해서 너도나도 발을 뺀 상황에서 결국에는 아르티아의 지원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었던 하르칸 주교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중위, 하급 사제 넷을 파견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실패를 예상했다.
하지만 아르티아의 원정은 중상자는 있을지언정, 사상자가 없는원정으로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고, 원정기간 동안, 베스타 신전의 사제들이 해왔던 것은 전투가 끝난 이후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관리하는 것 뿐 이었다.
전투에서 활약을 했던 사제는오직 엘레노아 뿐이었으며, 엄청난 수의 축복의 기도로 원정대원들 전원에게 축복을 걸어주며 강화시키고, 사기를 단숨에 끌어올렸던 사제로서의 능력은 같은 사제들이 경탄할 만한 수준.
게다가 마지막 순간, 정화의 주문을 통해서 모든 인간형 키메라들을 정화시켰던 당시의 전장은 완전히 엘레노아의 독무대였다.
‘이건 기회다!’
원정에서 복귀한 신전의 사제들의 보고를 통해서 엘레노아의 위계를 짐작해보았던 하르칸 주교는 자연스레 욕심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젊은 나이에 상위 사제의 위계도 노려볼 수 있는 양질의 신성력을 몸속에 품은 ‘페르닌의 꽃’이라는 여성을 손에 넣고 싶다고,만약 자신의 아들과 정략결혼을 통해서 엘레노아를 정식으로신전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대로 엘레노아가 성장하여 더욱 활약을 해준다면 자연스레 자신의 지위와명성이 올라가는 것도 당연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르미타스 공작이 자신의제안을 거절 할 수 없도록,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필요 없다. 내 딸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후회하실 텐데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공작님을 협박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단지 지금 드린 제안을 거절하시고 나중에 공작께서 크게 후회하실까봐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좋게 이야기할 때 신전 측의 지원을 받고 엘레노아를 신전에 넘겨라.
그 의미를 알아들은 아브로스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감히 네놈이 이 나라의 공작가문의 주인인 나를 협박하고 있군.”
“고, 공작!”
“안 됩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거칠게 내려치자, 몇몇 귀족들이 화들짝 놀라며 아브로스를 말리기 위해 자리에서 덩달아 일어났다.
“조용!”
마치 정말로 하르칸 주교를 한 대 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디아네 왕비가 소란스러워진 궁정회의를 진정시켰다.
“하르칸 주교. 이곳은 왕국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삼가도록 하죠.”
“이런, 저도 모르게 자리에 맞지 않는 주제를 입에 담았군요. 이 건은 공작께 ‘개인적’으로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는 하르칸 주교의 말에 디아네 왕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신의 아들인 데미안을 왕세자로 책봉시켜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는 디아네 왕비의 입장에서는 헬레나 후비와 에반 왕자를 지원하는 아르미타스 공작가가 베스타 신전세력과 인연을 맺어 지지기반을 다지는 상황은 좋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굳이 그 사실을 자신의 앞에서, 아브로스에게 당돌하게 엘레노아와 아들을 정략결혼을 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하르칸 주교의 속내는 도대체 무엇일까.
디아네 왕비는 하르칸 주교가 결코 청렴한 이미지와 선행으로 지금의 주교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정치적인 이해득실을 철저히 따지고 손해를 보는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생각해보고, 그의 의도를 파헤친다.
‘주교의 입장에서는 이 나라의 왕세자가 누가 되던 관심이 없을 테니, 정말로 에반을 왕세자로 지원하고 싶었으면 이 자리에서 굳이 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겠지. 저건…나에게 하는 제안, 협박이기도 한가.’
하르칸 주교가 이번 인간형 키메라의 사건을 통해서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한 엘레노아를노리고 있다는 것은 디아네 왕비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자신이 엘레노아를 손에 넣게만 해준다면, 약속했던 지원이고 뭐고 디아네 왕비를 도울 수 있는 구실도 만들 수 있다는 의향이, 하르칸 주교의 음흉한 두 눈웃음을 통해서 디아네 왕비에게 전해진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하르칸 주교를 노려보던 디아네 왕비는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입을 열었다.
“공작. 이 건은 차분하게 생각해보도록 하세요. 중요한 건 나라에 도움이 되는 가, 아닌 가입니다.”
“…알…겠습니다.”
디아네 왕비의 말을 듣고 대놓고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여 왕비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던 아브로스는 이를 갈며 힘겹게 대답했다.
이후의 궁정회의는 흑마법, 사령술로 인해 발생한 피해들을 보고하고 피해가 발생한 지역에 어떠한 대책을 세우는지,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후우….”
“괜찮으십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퇴실하는 아브로스의 뒤를 따라와 리오드가 말을 걸었다.
“안 괜찮지. 수작을 걸어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정략결혼을 들고 오다니, 기분이 정말 거지같군.”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내 쪽에서 따로 움직일 생각은 없네. 어차피 그 남자가 벌인 일이기도 하니, 알아서 수습하겠지.”
“…꽤나 신용하시는 군요. 은현을.”
“책임을 지겠다고 나에게 호언을 장담한 그 자신감을 믿어 보기로 했을 뿐이다.”
리오드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날 찾았다고요?”
“네.”
“…무슨 일인데요?”
알렉스의 안내를 받아, 비밀리에 왕궁을 빠져나와, 아르미타스 공작 저택을 방문한 유리아는 공작 저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은현을 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소공작이 된 알렉스가 겉으로는 평민의 신분인 은현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다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왕녀님께선 이번 사건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계셨습니까?”
“…은현? 그게 무슨 말이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알렉스가 표정을 굳히고 되물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야. 왕녀님. 제가 알고 싶은 건 단 하나입니다. 왕녀님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그 ‘예지’ 속에 이 사건은 존재했습니까?”
“예…지…?”
“예지라고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아르미타스의 두 남매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유리아를 바라본다.
남매의 시선을 받은 유리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암묵적인 약속을깨고 자신을 배신한 은현을 노려보았다.
“이봐요. 이 얘기는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기로….”
“이제는 숨기는 것보다 사실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해야할 때입니다. 아니면 왕녀님께서는 알렉스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그가 믿음직스럽지 못합니까?”
“그런 게 아니잖아요! 이런 황당무개한 이야기를 도대체 누가 믿어….”
“왕녀님.”
“아, 알렉스….”
차분하게 자신을 부르는 알렉스의 목소리에, 유리아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습니다. 저는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왕녀님의 말씀을 비웃거나, 거짓이라고 치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에게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왕녀님께서 가지고 계신 비밀을.”
알렉스는 이제 유리아의 기사가 아니다.
애슈턴의 몰락과 함께 공작 가문의 새로운 후계자가 된 알렉스에게 크라시르의 단원으로써 유리아를 가장 가까이서 호위할 수 있는 일과 가문의 업무를 동시에 병행시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가문을 이어받기 위해 기사단을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리아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알렉스는 유리아를 마음에 두고 있으며, 그가 자신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의지해주기를 아직도 바라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은현이 다리를 놓아준 지금 이 순간이 알렉스에게는 기회였다.
“…절대로, 절대로 비웃으면 안 돼요. 그리고…이 이야기를 남들에게 이야기해서도 안 돼요.”
“물론입니다.”
“명심할게요.”
“후우우….”
심호흡을 한 유리아가 결국 입을 열고, 평생 밝히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비밀들을 아르미타스의 남매의 앞에서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구라는 다른 세계의 개념이나, 웹소설이라는 두루뭉술한 이야기는 빼놓고서, 은현이 제시한 ‘예지’라는 키워드에 어울리도록 각색해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의 줄거리들을 늘어놓았고, 알렉스와 엘레노아는 유리아의 ‘예지’의 내용들을 경청하며 들었다.
“고대인 시절의 전생의 기억….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미래의 장면들…. 그리고 자신의 운명까지…. 왕녀님은 그래서 그때 아르키스 대미궁의 원정을 계획하셨던 겁니까? 다른 나라의 귀족에게 시집을 가는 운명을 막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성장해서 공적을 쌓고 정당하게 자유를 요구하려고 했어요. 그것도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유리아는 한때의 자신의 안일한 생각과 실수로 알렉스 일행을 죽음으로 내몰 뻔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씁쓸한 자조의 웃음을 지었다.
“으음….”
“역시…믿기 힘든 얘기인가요?”
“아뇨. 확실히 다른 사람이 이야기했다면, 믿지 않았을 테지요. 지금은 이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조금 생각 중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담담…하네요…?”
비웃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심각한 얼굴로 고심하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도리어 유리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왕녀님의 이 말을 믿었던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
침묵하며 조용히 유리아의 설명을 듣던 은현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왕국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아르키스 대미궁의 위치를 알고 있었던 것. 두 번째는 에린의 미래를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때문이었지.”
“에린의 미래인가요? 그게 무슨….”
“에린은 원래 그 귀족 습격 사건에서 악마의 꾐에 넘어가서 페르닌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예정이었거든요.”
“뭐, 뭐라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터무니없는 사실을 내뱉은 은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엘레노아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알렉스는 그때 에린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을 습격했던 서큐버스가 에린에게 접근해 어떻게 그녀를 꼬여내려 했는지 기억을 떠올렸다.
- 나와 함께 가자. 엘빈을 그렇게 만든 이 나라에 복수하는 거야.
자신의 오빠에 대한 감정을 부추기고 그것을 복수심으로 승화시켜 나라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도록 에린을 세뇌시키려 했었다.
에린의 잠재된 힘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의문은 제쳐두고서라도, 정말로 에린이 악마의 꾐에 넘어가 이 나라에 복수를 하려 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충분히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 나를따라와. 내가 너에게 길을 제시해줄게.
그리고 그 미래의 가능성이 누구에 의해서 뒤틀렸는지도, 알렉스는 이해하고 은현을 응시했다.
- 나한테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은 네가 아니야.
에린은 서큐버스의 세뇌를 뿌리치는 것도 모자라, 도리어 그녀의 목을 꿰뚫고 그녀를 없애기 까지 했으며, 에린에게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준 것은 다름 아닌 은현이었다.
은현은 이야기를 마친 유리아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원리나 현상은 설명할 수 없어도, 왕녀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단편에 대한 정보들을 알고 계시죠. 아르키스 대미궁과 에린에 대한 것까지,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유리아는 조용히 침을 삼키며 은현의 말을 기다렸다.
“왕녀님의 예지 속에, 사령술사에 대한 사건이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