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126. 망자의 여왕(3)
“잠깐, 일리아나, 한가지 처리해야할 문제가 있어.”
“…뭔데? 빨리 말해.”
은현의 제지가 일리아나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그녀의 재촉에 대답을 한 것은 은현이 아닌, 리오드였다.
“마을 사람들을 데려가야 한다. 적어도 구호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난민으로 저들을 받아들여야해.”
“뭐? 아, 그렇겠네. 알았어.”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이미 마을사람들의 대피는 완료하여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거대한 고룡의 시체가 허공에서 떨어지면서, 작은 규모의 마을의 건물들은 완전히 대파된 상태였다.
심지어 마수들의 난동의 여파로 키우던 농작물들까지 엉망이 되어버렸으니, 마을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집을 잃고 식량을 잃은 셈이니,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일리아나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의 인원수는 어떻게 되지?”
“약 마흔 명 정도다.”
“어때? 남은 마력으로 될 것 같아?”
“아슬아슬하게. 싹 다 한꺼번에 데려가자.”
“공녀님이 나서서 마을사람들을 설득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말인가요?”
“네. 사제시니까 마을사람들에게서도 신뢰를 받기 쉬우실 겁니다. 회복의 기도도 사용해주실 수 있다면, 마을사람들에게 사용하면서 경계를 풀어보도록 하죠.”
“간단한 회복 마법 정도라면 못할 건 없어요.”
“좋습니다. 바로 움직이죠. 그리고 공녀님. 알고계시겠지만, 메디아에 관한 이야기는 비밀입니다. 대외적으로는 그냥 사령술사를 처리했다는 것만 공표하도록 꾸밀 생각이에요.”
“…어째서죠? 저런 정신 나간 존재를 그냥 방치하자는 건가요?”
“알린다고 해서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의 여자가 아닙니다. 300년 전에 혼자서 국가 하나를 멸망시킨 미친 여자에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아무런 이름도 남기지 않았던 거죠?”
“제가 없앴습니다. 사령술의 흔적과 함께 그 여자가 남긴 흔적 모두를 없애버렸어요. 처음부터 ‘망자의 여왕’이라는 여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가 메디아라는 실존인물이 존재했다는 역사속의 사실을 통해서, 사령술이라는 흑마법을 찾아 헤매고 사령술을 배워서 제2의 메디아 같은 인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은현은 그 작은 가능성조차도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령술에 대한 단서들은 모조리 지워버리고 다시는 그런 재앙이 다시 대륙에 나타나는 것을방지시키기 위해 행동해 왔다.
메디아의 재앙이 다시 대륙에 나타난다고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 은현은 온 몸을 부르르 떨렸다.
그 원인에는 메디아가 은현에게 보이고 있는 집착도 있었지만,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이 죽인 인간들을 자신의 종복으로 만들어 군단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메디아의 사령술에는 인간이나 마수의 카테고리의 분류가 의미가 없다.
그녀의 영혼에 종속된 사령들은 모두 여왕의 앞에 무릎을 꿇는 충직한 종복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능적인 영혼의 계율(悸慄)로 새겨진 순종이었다.
“그런데…설마, 본인 자체가 살아나다니…. 젠장, 예상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되살아나도록 본의 아니게 돕고, 일조한 게 자신이라는 사실과, 그 사실로 메디아라는 미친 여자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은현의 사랑을 확인하고 행복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사실이 은현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다, 당신의 탓이 아니잖아요….”
“맞아. 니 탓아니야. 자책하지 마. 안 어울리게 왜 이래.”
언제나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모든 상황에서 포석을 깔고 뒤통수가 맞지 않도록, 뒤통수를 치는 것을 일삼았던 은현이 유독 평정을 이루지 못하고 치를 떨고 있었다.
[아, 아이야. 이제는 괜찮다. 내가 있지 않느냐.]
‘여신님…. 안 그래도 부탁드릴 게 있어요.’
[그 문을 만들어낸 그 연금술사를 말하는 것이냐? 그것이라면 조만간 신계로 올라가 알아볼 생각을 가지고 있단다.]
‘아마…안 죽었겠죠?’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은현은 레나트라는 여자가 본능적으로 자신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목을 자르고, 심장을 찌르고 팔다리를 달라 부활을 조금이라도 성가시게 만들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되살아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은현 또한 한 번 죽었다가 되살아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해볼 수 있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레나트가 고룡의 시체를 소환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공의 거대한 문은 일반적인 마법이 아닌, 자신이 사용하는 여신들의 권능처럼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권능이라는 것은 은현의 추측과 더불어 베르단디의 확신까지 얻었다.
그렇다면 가장 떠오르는 의문은 ‘대체 누가 그 여자를 사도로 삼고 권능을 하사하였는가?’ 였다.
게다가 레나트의 뒤에 그녀의 파트너처럼 보였던 마리우스에게 사령술을 가르친 메디아라는 미친 스토커가 있다는 것이 더더욱 은현을 신경 쓰이게 만든다.
‘어쩌면 메디아라면, 마리우스라는 그 남자의 영혼도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 사령술사와 연금술사에 대한 것은 신계에서 내가 알아보도록 하마. 아이는 지금 사태의 수습에 집중해라.]
‘후우, 알겠습니다.’
은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리오드와 엘레노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 가죠.”
“그래.”
“네.”
◆ ◆ ◆
마을주민들의 설득은 굉장히 손쉽게 이루어졌다.
리오드와 엘레노아가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있던 점이나, 엘레노아의 신성마법을 통한 주민들의 치료를 통해서 조금씩 경계를 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겉보기에 거대한 고룡의 시체를 은현 일행이 쓰러뜨린 것으로 보여 마을사람들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차지한 은인처럼 보였던 것도 큰 공헌이었다.
왕국 측에 난민수속 절차와 마을의 재건 복구에 큰 힘을 실어주겠다는 두 귀족의 약속을 받은 마을 촌장은 고심 끝에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왕국 내부에 난민으로 자신들을 받아들여줄 것을 요청했다.
마을주민들은 난민수속을 위해 리오드를 따라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엘레노아는 곧장 자신의 아버지인 아브로스에게 보고를 하고 휴식을 취하겠다고 했다.
“에린은 오늘까지 우리 쪽에서 맡아두지.”
은현과 일리아나는 둘 다 리오드의 배려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쓰게 웃음 짓는 은현과 달리, 일리아나는 쓸데없는 배려라며 짜증을 내고는 은현의 팔을 붙잡고 거리를 걷는 것으로 파티는 해산되었다.
저녁노을이 밝게 뜨며 점차 수도의 활기가 식어가고 있었다.
빛이 사라지는 밤중에는 많은 활기를 띄우는 노점들도, 손님들도 사라지며 한산해진 광장을 은현과 일리아나가 손을 마주잡고 걸었다.
“괜찮아?”
“뭐가?”
“너 기분. 솔직히 나도 더러웠는데. 너는 그 미친년 집착을 받아 내야하는 입장이었잖아.”
“괜찮을 리가 없지. 그래도 괜찮았어야 했어.”
“흐응…. 30년이라고 했어? 그 여자랑 싸운 게.”
“응.”
“…긴 시간이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은현의 대답에 일리아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서 30년이란, 젊은 청년이 싸움터에서 평생을 보내고 늙은 몸으로 은퇴를 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만큼 은현은 메디아라는 재앙을 틀어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많은 인연을 맺고, 그 인연들을 떠나보내면서도, 자신은 살아남아서 재앙과 목숨을 건 투쟁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나한테 해줄 말 있지 않아?”
“…….”
“마녀의 태생, 엘리시아라는 사람. 누구야?”
- 너, 엘리시아의 딸이구나? 아니, 딸이라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나. 자손?
- 후후, 현이는 정말이지. 마녀들한테 사랑받는 존재라니까.
일리아나는 메디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은현 또한 메디아가 언급한 ‘엘리시아’라는 여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은현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한 걸 느끼긴 했어. 너는 내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 대해서 굉장히 박식했고, 나에게 맞는 훈련과 교육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제시해줬으니까. 마치 처음부터 나를 만날 걸 알고 준비했던 사람처럼 말이야.”
“확신은 없었어. 하지만 엘리시아와 너는 너무 닮았으니까. 마녀의 특성을 알아본 건 너의 마법을 보고 나서부터야. 그때부터, 어쩌면 엘리시아의 아이가 남긴 후손이 아닐까하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 하지만 메디아가 그렇게 단언했다면 너는 정말로 엘리시아의 후손이 맞다는 거겠지.”
“…그 미친년이 뭔데 단언을 할 수 있는데?”
“메디아도 마녀였으니까.”
“뭐…?”
“정확히는 마녀였다고 하는 게 맞을까. 그 여자는 이제는 인간의 육신을 버린 초월종이나 마찬가지니까.”
“…자세히 설명해봐.”
“마녀가 평범한 인간보다 강력한 마력을 태생부터 가지게 된다는 건 알고 있지?”
“응.”
“메디아는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서 흑마법에 손댔고 흑마법 중에서 가장 질이 나쁜 사령술을 선택했어. 그리고 사령술을 조금씩 개량해, 인간을 죽이고, 인간의 몸에 있는 영혼과 마력을 흡수하는 방법을 고안해내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지.”
타인의 생명을 흡수하여 자신의 힘을 늘려나가는 명백한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른 생존원리였다.
“흑마법에 손대게 된 계기는 복수였어.”
“복수?”
“마녀의 힘에 욕심을 내기 시작한 한 나라가 마녀들을 잡아들여 그녀들을 겁탈하고 강제로 아이를 배게 만들어 낳은 아기가 마녀의 특성을 물려받는 강력한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미친 짓을 벌이기 시작했어.”
“…마녀들은 강했잖아. 저항하지 않은 거야?”
“적어도 그때 당시의 마녀들은 인간들과 공존할 수 있었다고 믿었으니까. 어리석었지. 그리고 마녀들은 굉장히 동족의식이 강했어. 메디아가 너에게서 엘리시아의 마력을 느낀 것도 강력한 동족의식의 결속으로 만들어진 능력 중에 하나야. 그 점을 이용한 인간들의 나라는 보기 좋게 속여서 붙잡은 마녀들을 이용해 인질로 삼았고, 다른 마녀들을 협박해 너무나도 쉽게 저항한번 못해보고 마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어.”
“…개X끼들.”
“메디아는 자신이 익히고 개량시킨 사령술로 직접 그 나라를 멸망시켰고, 그때부터 사기(死氣)에 중독된 메디아는 점점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 되어가고 미쳐버리기 시작한 거야.”
“거지같은 결말이네.”
“엘리시아는 살아남은 마녀들 중 하나이자, 나에게 ‘보석 마법’을 가르친 스승이야.”
“그 비싼 마법?”
한 번 사용해야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지닌 보석들을 소모해야한다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마법이었지만, 성능만큼은 매우 뛰어난 마법이었다.
“당시 메디아의 ‘망자의 여왕’이라는 이명이 떠들썩해지면서 메디아의 기원인 마녀를 다른 국가들에서도 탄압을 하기 시작했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노화가 진행되지 않은 엘리시아는 결국 마을사람들의 질투와 의심을 사게 됐고 사악한 마녀라며 주민들의 신고로 인해, 마녀의 탄압을 강경하게 주장했던 왕국군에게 붙잡혀 처형을 당했지.”
“…네가 도와줄 수는 없었던 거야?”
“같이 도망치자고 설득했어. 하지만 엘리시아는 내 제안을 거절했고 나를 도망치게 하는 대신 스스로가 붙잡혀 처형당하는 것을 선택했어. 그때 엘리시아는 사별한 남편의 아이를 나한테 맡겼지. 뒤늦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아기를 멀리 도망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붙잡힌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나는 그럴 수 없었어.”
왕국군에게 반기를 들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여신의 당부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구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이지, 엘리시아가 아니었다.
세상의 흐름의 중심에 서서 그 흐름을 바꿔,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여신들이 은현에게 건 제약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 하나도 지키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하라는 사명.
세상의 흐름을 바꿔서는 안 된다는 제약을 걸었으면서, 세상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뒤바꿀 수 있는 흐름을 이끌어내고 유도하라는 사명.
매우 모순적이면서 말이 되지 않는 사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현은 항상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비정한 선택을 내려야만 했으며, 엘리시아의 처우도 그 비정한 선택 중 하나였다.
“나는 엘리시아의 아기를 마녀 탄압이 강경했던 나라와는 거리가 먼 나라의 보육원에 맡기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어. 아기를양육하는 일은 나의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엘리시아가 자신을 믿고 맡겼던 아기를 은현은 포기해야만 했다.
무감정하고 매정하기까지 한 결정을 내리면서, 은현은 죄책감을가득 채우게 만드는 엘리시아를 떠올리고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결국엔 그녀의 아기를 보육원에 맡기고 메디아의 사령군단과의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한 국가를 멸망시키고, 점점 군단의 숫자를 불려나가는 메디아는 이미 재앙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녀를 직접적으로 억제해야 하기 위해 은현이 직접 그녀의 군단과 맞부딪쳤고, 은현과 메디아의 전쟁은 30년 동안 이어졌다.
은현과메디아가 서로의 목숨을 깎아내리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 싸움이 끝나고 살아 있는 것은 언제나 은현과 메디아 뿐 이었다.
메디아는 무차별적으로 인간들을 학살하고 자신의 군대를 만들어나가고, 은현은 그런 메디아를 억제하고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끝에는 은현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메디아가 은현의 관심을 끌기위해 더더욱 많은 사람들을 죽여 나가며 은현에게 자신은 여기에 있노라하고 광고를 해대기까지 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웃기지도 않지. 결과적으로 엘리시아를 붙잡고 처형시킨 왕국과 인간들을 돕기 위한 꼴이 되었으니까.”
엘리시아는 저승에서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은현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외면해버린 엘리시아의 아기가 또 아이를 만들고, 그 후손이 나와 인연을 맺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복잡했어.”
“…네가 나를 가르치고, 나를 받아들였던건,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이었구나.”
“일리아나, 미리 얘기해두지만 그 감정으로 너에게 청혼을한 건 아니야.”
“알아. 난 너를 잘 아니까. 적어도 지금의 네가 나를 그런 동정과 죄책감, 책임감만으로 나를 대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애인으로 발전하면서, 관계를 가지고, 사랑을 나눌 때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은현이 일리아나에게 보내오는 감정에는 명백한 애정이 존재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일리아나도 바보는 아니었다.
진실을 들으면서 서운함과 복잡한 감정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일리아나는 그것을 떨쳐냈다.
“…….”
“그리고 내가 너를 선택한 거야. 멍청아. 거기에 얼굴도 제대로 기억도 안 나는 내 부모에 대한 사연은 절대로 끼어들지 못해. 이건 너와 나만의 문제야.”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우면서도, 할 말만을 하는 그녀의 태도가 굉장히 귀엽다.
“넌 어딘가의 꽃미남이냐? 왜 이렇게 멋있어?”
“흥. 어…?”
그녀의 말이 굉장히 기쁘기 그지없는 은현은 품에서 보석이 박힌 반지를 꺼내 일리아나의 약지 손가락에 정성스레 끼워주었다.
“이…건?”
“결혼 예물이야. 청혼만 하고 아무것도 주지 못했잖아.”
멍하니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올려, 푸른색 사파이어가 박혀있는 반지를 응시했다.
근사한 청옥빛이 반짝임과 동시에, 은현이 말을 이었다.
“네 푸른 눈동자와 어울리는 반지를 골랐어. 그리고 이건 내 거야.”
품에서 꺼낸 새빨간 루비가 박힌 반지를 일리아나에게 건 내고, 자연스레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사파이어 반지를 빼내 가져갔다.
“내 건 왜 가져가고, 네 건 왜 주는 거야?”
“나중에 결혼식 때 끼워주는 거야. 서로의 손가락에. 어때?”
“흐응, 좋아. 아….”
그리고 일리아나는 갑자기 뱃속이 찡 울리는 감각에 온 몸을 떨었다.
기쁨에 차오르면서 자신의 몸의 스위치가 켜지는 것을 자각한다.
“…안 되겠어.”
“응?”
“나 진짜 오래 참았어. 그런데 더는 안 되겠어.”
“뭐…?”
“따라와.”
은현의 손목을 붙잡은 일리아나가 다짜고짜 그를 이끌고,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은 으슥한 골목을 향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