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124. 망자의 여왕(1)
너무나도 허무하게 레나트의 머리가 몸통과 분리되면서 바닥을 나뒹군다.
“…….”
사룡의 브레스가 쏟아짐과 동시에, 베르단디의 가호로 브레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은현이 레나트의 뒤를 점거한 것이다.
머리가 잘린 레나트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고, 자연스레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마리우스의 몸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사룡은….”
브레스 한 번을 겨우 막은 것으로 진이 다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던 엘레노아가 멍하니 고개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거대한 입을 벌려 주위를 초토화시켰던 무시무시한 브레스를 뿜어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검붉은 빛을 내뿜었던 눈동자는 다시 빛을 잃었으며, 처음 거대한 몸체를 드러냈을 때처럼 축 늘어진 고룡의 모습이었지만, 엘레노아는 아직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또…일어서는 건 아니겠죠…?”
“방금 저 고룡의 시체가 일어섰던 건, 이 자가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강제로 고룡의 영혼의 일부를 강림시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과 모든 마력을 끌어다가 사령술을 발동시켰다고 하더라도, 드래곤 자체를 완전히 제어하는 건 불가능해요. 기껏 해봐야 1분이 한계였겠죠.”
- 나, 마리우스 홀튼이! 나의 영혼을 바쳐 그분의 위업의 일부를 재현할 것이니! 나의 시련을 받아라!
하지만 그 1분이라는 시간이 엘레노아에게 있어선 ‘죽음’이라는 단어와 가장 밀접한 시간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말씀드린 대로, 일반적인 사령술로는 일개 마수들의 영혼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지성이 매우 낮고,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충실히 움직이는 짐승이나 마찬가지 때문이죠. 하지만 용은 다릅니다.”
엄연히 지성과 자아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시켜 용의 영혼을 장악한다면 그것에 대한 명령은 내릴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한 사령술사가 사령술로 용의 영혼을 종복으로 부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우스가 자신의 목숨과 영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소환한 고룡의 영혼은 1분 동안 인간의 염원에 종속되어야하는 수치스러운 결과를 맞이했다.
“용의 영혼을 인간이…조종하는 게 가능한 가요…?”
“영혼 전체는 당연히 불가능하죠. 하지만 의지를 가진 영혼의 일부만을 뜯어와 소환시킨 수준이라면 그 여자의 사령술은 가능합니다. 그 여자는 해냈었으니까.”
레나트의 시체 위에널브러져 있는 마리우스의 몸통을 발로 걷어차며 은현이 엘레노아의 불안을 해소시켜주었다.
은현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이 그가 걷어 찬 마리우스의 몸통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리며 기분나쁜 표정을 지었다.
몸속의 모든 영양분이 빠져나간 것처럼 뼈와 가죽만을 남겨놓고 말라비틀어진 마리우스의 시체는 마치 해골의 위에 인간의 가죽을 덮어 씌워놓은 것만 같은 잔혹한 모습이다.
페르닌에서 귀족들을 습격했던 서큐버스에게 흡정을 당한 피해자들보다 더욱 심한 몰골이다.
“끔찍한 몰골이군…. 사령술사의 말로는 이런 건가?”
“아니, 이건 이 사령술사가 선택한 결과야. 고룡을 강제로 일깨워, 우리에게 ‘시련’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을 부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속의 모든 마력과 영혼을 가져다 바친 결과지.”
“‘그분’이라는 건…도대체 누구인가요? 당신이 아는 사람인 가요…?”
엘레노아는 마리우스가 은현을 보며 광기어린 웃음을 보여주며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은현이 ‘그분’의 총애를 받고있다고, 은현이 언급하고 있는 ‘그 여자’를 극도로 혐오의 감정을 내비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푸욱
은현은 엘레노아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검을 들어 올려 레나트의 시체를 베기시작했다.
가슴을 찌르고, 팔과 다리들을 자르는 은현의 행동에 엘레노아가 놀라며 외쳤다.
“뭐, 뭐하는 거예요!”
그의 행동을 말리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이 마치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광인의 모습과도 같아서 기겁한 모습이다.
“아직안 죽었습니다.”
“네…?”
“이거, 아직 안죽었다고요.”
“그게 무슨….”
[……! 아이야!]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베르단디였다.
고룡의 시체 속에서 힘을 잃고 서서히 소멸해가던 사령의 기운이 시체 속에서 튀어나와 은현에게로 접근했다.
레나트를 베어 넘기는 것에 집중을 하고 있던 은현이 베르단디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 뒤늦게 이변을 확인했고, 몸을 뒤로 날려 곧장 레나트의 시체와 사령의 기운에서 거리를 벌렸다.
“…역시나.”
“저건….”
도대체 뭐지?
라는생각이 드는 것은 리오드 뿐만이 아닌, 일리아나와 엘레노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치 고운 모래와도 같은 미세한 검은색의 입자들이 작은 구름과도 같은 모양을 형성하며 레나트의 주위를 맴돌았다.
작은 입자 하나하나가 마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사령의 기운은 마치 거대한 ‘뱀’의 형상과도 같다.
이내 그것이 은현에 의해서 절단된 레나트의 시체와 살점들을 한 곳에 끌어 모았고, 하늘을 공중으로 부유하며 고룡의 시체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가장 늦게 이변을 감지한 세 사람이 곧바로 은현 쪽으로 이동하여 합류를 했고, 인상을 찡그리며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일리아나가 은현에게 물었다.
“현아, 저게 뭔지 알아…?”
“그 여자가 온 거야.”
“그 여자?”
“이 세상에서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제일 미친 인간. 이제는 인간도 아니겠지.”
다시 한 번 물어보려 했지만, 이내 검은색의 죽음의 기운이 한 곳으로 응집되며 하나의 형체가 만들어졌다.
은현보다 더 짙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색의 머리카락과 루비 보석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은현의 두 눈에 경멸스러운 감정이 사무치기 시작한다.
“하아….”
그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해오는 감정을 읽은 은발의 여자가 기쁜 듯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마치 자신의 잠자리에 있는 것인 양, 평안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여자는 새하얗고 얇은 옷감의 네글리제 하나만을 걸친 상태.
풍만한 가슴만을 가리고, 가녀린 허리와 배꼽은 반투명한 옷감에 비쳐 굉장히 색정적인 모습이다.
그녀가 다리를 꼬자 맨다리의 새하얀 허벅지가 강조되는 요염한 모습은 여자의 정체를 모르는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겼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허벅지, 종아리, 발목과 발가락까지 남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아름다운 절경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은현은 양손에 쥐고 있던 검을 꽉 쥐고, 언제라도 달려 나갈 기세를 취하고 있었다.
고룡의 시체, 머리 위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머리의 위에 달린 뿔에 팔을 기대어 턱을 괴고 있는 여자, ‘메디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후후, 정말 오랜만이야. 300년 만이지?”
“……!”
구체적인 시간의 언급에 놀란 것은 은현을 제외한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은현이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 그의 구체적인 연령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분명히, 심장을 파괴하고 네가 죽는 걸 확인했었는데?”
“응, 맞아. 네가 죽였지. 하아…. 그때의 네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아니?”
“네 감상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아. 어떻게 네가 여기 있냐고.”
“나를 따르던 아이가 자기 영혼을 바쳐서 나의 사령술을 사용했으니까. 그 아이에게 일러뒀거든. 혹시라도 너를 발견한다면 내 힘을 이용하라고. 그래서 그 아이의 영혼으로 발동된 사령술을 매개로 그 안을 타고 흘러들어왔어.”
“어떻게 되살아났지?”
“300년 만에 만났는데도 여전히 쌀쌀 맞구나? 괜찮아.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어.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궁금하다고? 간단하잖아. 시간의 제약에 거부하지 못하는 육체를 버리면 되는 거야! 나는 말이지. 현이가 나를 죽여주면서 그때 비로써 이 육체에서 해방될 수 있었어.”
“……?”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엘레노아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만다.
육체를 버림으로써 되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지, 그녀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다.
“내가 만든 사령술 중에는 ‘영혼의 귀속’이라는 사령술이 존재한다는 거, 현이도 알지?”
“…….”
은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가 메디아의 사령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영혼의 귀속’은 일종의 저주나 다름없다.
대상에게 저주를 건 이후, 대상이 사망하게 되어 영혼만이 남게 된다면, 그의 몸에 걸려있던 저주로 인해 영혼이 사령술사에게 귀속이 된다는 무서운 마법.
사망 이후 사령술사에게 영혼이 귀속된다면, 그것을 영혼만이 남은 망자가 자력으로 해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생을 사령술사에게 농락당하면서 영혼의 고통을 받아야하는 악질적인 마법 중에 하나였다.
씨익 미소 지은 메디아가 은현의 분노어린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영혼의 귀속’을 나한테 건거야. ‘내’가 죽음으로써 ‘나의 영혼’이 ‘나’에게 귀속되면서 성불하지 못하고 이 세계에 내 영혼을 나 스스로가 묶어둘 수 있게 되었다고! 후후후후! 그것에 가장 큰 공헌을 해준 건, 바로 다름 아닌 현이 너였어. 정말 기뻐.”
메디아의 기뻐하며 들떠있는 목소리가 은현의 머릿속에 박힐 때마다, 검을 쥔 그의 주먹이 떨리고, 팔에 힘줄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자신의 실책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메디아가 자신의 영혼에 수작질을 걸어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사령(死靈)’으로써 완전한 각성을이루려 했다는 계획을 은현이 당시에 눈치를 챌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되살아나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너무 기뻐.”
“시끄러워.”
“너를 이해 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 입 다물어.”
“너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닥쳐!”
“너는 내 거야.”
메디아는 은현에게 무한한 사랑과 애정을 보내고 있고, 은현은 메디아에게 무한한 혐오와 살의를 보내고 있다.
메디아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덧붙일 때마다, 은현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되어 가기 시작한다.
[아이야.]
“그럼 지금 당장 다시 죽여줄게.”
[아이야!]
지금만큼은 은현의 머릿속에 베르단디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
명백히 냉정을 잃은 은현의 몸이 총알처럼 튕겨져 날아올랐고, 그녀의 몸을 향해검을 휘둘렀다.
[시에테 검성술]
[백광일섬(白光一閃)]
레나트를 베었던 것과 똑같은 한줄기의 백색 섬광이 메디아의 목을 그었으나, 마치 공기를 벤 듯 허공을 가르는 감각에 은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제 서야 냉정을 잃었던 사고가 돌아오고, 현재 메디아의 상태가 육체는 없고 영혼만이 존재하는, 사령의 기운으로 형성된 정신체라는 것을 떠올린다.
“하아…정말 멋져.”
은현의 공격에 전혀 개의치 않아 하던 메디아가 일어서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순식간에 은현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쓰다듬으려 했다.
정신체의 상태인 메디아는 육신이 존재하는 은현을 만질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가오자마자 그를 만지고 싶은 욕구는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결국 그의 뺨에 메디아의 손이 투과하려는 순간.
파지직!
“응…?”
스파크를 일으키며 정신체인 메디아의 손가락을 불태우는 기묘한 감각에 메디아가 손을 더 뻗는 것을 멈칫했다.
[내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여신의 외침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녀의 의지를 이어받아 은현을 감싸고 있는 ‘여신의 가호’가 명백히 메디아의 접근에 거절의 의사를 내보이고 있었다.
“이건….”
은현의 의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은현을 지키고 있었던 것을 알아채자, 메디아의 눈썹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현이가 또 이상한 거의 사랑을 받고 있구나?”
이상한 것으로 따지자면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스르륵
순식간에 메디아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사령의 기운이 흐트러지면서 다시 안개로 변하더니, 메이다의 모습이 일리아나의 등 뒤를 점거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조용히 일리아나의 몸을 끌어안고는 손가락을 이용해, 일리아나의 아랫배, 배꼽, 허리, 가슴을 순서대로 천천히 쓸어 올리곤 일리아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댄다.
“스으읍.”
“읏…!”
온 몸을 희롱하는 듯 요염한 손놀림과 자신의 냄새를 맡는 행동에 일리아나의 온몸이 오싹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정신체에 불과한 그녀가 물리적으로 일리아나를 어떻게 만질 수 있는지, 생각해볼 여유도없을 만큼, 메디아의 기습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왜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냄새가 나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