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117. 고민상담
아브로스와 이야기를 마치고, 아르미타스 공작 저택을 나온 은현은 곧바로 아르티아 기사단 사무실을 향했고, 집무실에서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리오드를 보며 말했다.
“아직 퇴근 안했네?”
“알고 있었던거 아니었나?”
“뭐, 대강 그렇게 예상하긴 했지.”
이 난리통에 휴식을 취할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도와줄까?”
“필요 없다. 기사단의 업무까지 너의 손을 빌릴 생각은 없어. 너도 개인적으로 생각해야할 게 많지 않나?”
“…그렇긴 하지.”
사령술사의 존재가 확인 된 순간부터, 은현의 기분은 평소와 달리 매우 저조한 편이다.
그것을 헤아린 리오드가 자신을 배려해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은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그 화제는 이야기 하지 말아줘. 가능하면 정말로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일이거든.”
“그렇군.”
누구에게나 그렇게 피하고 싶은 주제는 있기 마련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리오드는 계속해서 서류의 작업을 마치고 있었다.
원정대 복귀 이후 남은 물자나, 새로 보충해야 하는 물자들, 기사단 단원들의 임무 분담 조정, 모험가 길드에 지불해야 하는 대금의 확인, 처리해야할 안건들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몇 시간 뒤에는 포로로 포획한 산적들에게서 흑마법사와 연금술사에 대한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 심문도 해야 한다.
퇴근은 꿈도꿀 수 없는 게 현재의 상황이다.
은현은 소파에 앉고는 그대로 축 늘어져 소파에 얼굴을 파묻었다.
“…할 게 없다면 집에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쉬어라.”
“이따가 포로 심문할 때 나도 있을 거니까 여기서 대기하는 게 편해.”
“네가 그러겠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리오드.”
“뭐지?”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말해라.”
“…….”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파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은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은현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이거 진짜로 너한테 실례될 수도 있는 건데, 물어볼 사람이 너 밖에 없어서 물어보는 거야. 오해하지 말고 들어.”
“그러니까 뭐냐고.”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을 촉구하자, 은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후작 부인하고 관계를가질 때, 누가 리드 하냐?”
뿌득
리오드가 손에 쥐고 있던 펜이 너무나도 쉽게 부러지며, 펜 속의 새까만 잉크가 흘러나와 서류를 적셨다.
처리해야 하는 안건이 산더미임에도 불구하고 리오드는 은현이 내뱉은 말이 머릿속으로 맴돌아 서류의 작업을 멈출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했지?”
도저히 자신이 알고 지냈던 은현의 입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말을 들은 리오드는 지금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리오드의 시선에 은현이 한숨을 내쉬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오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 후작 부인한테서 아무것도 못들은 거야?”
“…자세히 얘기해라.”
은현은 원정 중에 일리아나가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해왔던 것을 시작으로 그녀를 부추긴 것이 다름 아닌 테레지아라는 사실까지 일리아나와 테레지아가 사적인 만남을 통해 많은 것을 의논하고 있었던 것을 이야기 했다.
“일리아나가 테레지아를 만나러 저택에 자주 드나들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자들 간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방해할 생각도 들지 않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는지 리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일리아나가 후작부인께 이상한 걸 배워 와서 조금…아니, 상당히 위험했던 순간이 있었거든. 이걸 후작부인께 묻는 건 실례잖아. 너한테도 실례지만, 양쪽에게 다 실례라면, 차라리 너한테 묻고 말지.”
“그렇군….”
은현도 이 질문을 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꺼낸 이야기였다.
“그…굉장히 실례되는 표현이긴 한데, 일리아나한테 알려준 기술들을 생각해보면…도저히 평범한 귀족부인 같지가 않더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만, 그만 얘기해.”
다급하게 은현의 말을 제지하는 리오드의 행동에는 명백히 동요가 보이고 있다.
“후우…. 네가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때, 테레지아가 숨을 죽이며, 웃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군. 테레지아는…조금 특이한 경우다. 많이 대담한 행동을 취하기는 하지만, 결코 어리석은 여성은 아니야.”
“아니, 그런 분이 아닌 건 나도 알지.”
애초에 은현이 이번에 ‘한 방 먹었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테레지아에겐 깜짝 놀랄 수밖에없었던 순간이었다.
“좀 복잡한 사정이 있구나.”
“…나중에 기회를 잡아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 하도록 하지.”
리오드의 표정을 헤아린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해서 물어보는 거지만.”
“응? 뭔데?”
이번에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리오드 쪽에서 질문이 날아들어 왔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에 있는 이유. 일리아나 때문인가?”
날카로운 유부남의 지적에 은현의 어깨가 떨렸다.
“…….”
아르티아 기사단의 원정대에 참가하여 출정 전날, 일리아나에게 잔뜩 쥐어 짜였던 경험이 은현에게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싹 가시게 만들고 있었다.
은현은 대답하지 않고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그렇군.”
그의 행동에서 의미를 읽은 리오드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그러면 큰일 난다.”
“야, 네가 안 겪어봐서 모르는 것 같은….”
“일리아나에게 기술을 전수해준 게 테레지아라면,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시달렸다. 너도 곧 결혼할 예정이니 조언이라 생각하고 새겨들어.”
“맞네, 결혼에서는 네가 인생 선배지…. 젠장….”
◆ ◆ ◆
이른 아침, 심문실에서 나온 기사 두 명이 씩씩거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젠장! 도대체 왜 불지 않는 거야!”
원정에서 포로로 포획해온 산적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것 마냥,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문실로 포박된 산적들을 한 명씩 데려와 독대로 이야기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적들은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거나, 그냥 죽이라는 말만을 일삼고 있었다.
고문을 하며 고통에 몸부림 치고 비명을 내지르며 온몸을 날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적들은 하나같이 진술을 거부하고 도망친 사령술사와 연금술사에 대한 정보를뱉지 않았다.
“젠장, 이러다가 놈들의 정보는 얻지도 못하고 시간만 지체되면….”
“아, 시X…진짜 상황 거지같네….”
사령술사는 계속해서 마을을 습격할 것이고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으며 시체들을 수집할 것이 틀림없다.
파트너로 보이는 연금술사가 가지고 있다는 공간이동 계열의 마법을 이용하여 사령술사가 시간과 거리의 제약을 받지 않고 여기저기에 불쑥 나타나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닐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이가 갈린다.
피해가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아르티아가 질책을 받을 구실이 되며, 많은 귀족들에게 물어뜯기는 상황이 조장되는 것은 뻔한 미래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문도 통하지 않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닌 산적들에게는 협박이나 회유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 당장 처형을 시켜달라고 하는 놈들의 표정에서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보이면서도 한시라도 빨리 죽고 싶어하는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아르티아의 단원들에게는 그들의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빨리 처형시켜달라고 아우성인 새끼들의 생각을 모르겠네.”
“애초에 그 사령술사와 연금술사라는 두 놈은 저 새끼들을 버리고 도망친 새끼들이잖아? 그런데 왜 눈이 돌아서 그 새끼들의 정보를 불지 않는 건데? 꼴에 의리를 지킨다는 건가?”
의리 같은 거창한 감정 때문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을 습격하여 남자와 아이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데려가 겁탈하면서 약탈한 작물들로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 오로지 성욕과 식욕만을 위해서 인생을 사는 산적들에게의리 따위는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산적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둘이서만 도주한 두 술사들에 대한 정보를 불지 않는 것일까?
“상황은 어떻지?”
“아, 다, 단장님….”
심문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리오드와 그의 옆에 서있는 은현을 흘끗 보고는심문실에서 나온 아르티아 단원이 땀을 삐질 흘렸다.
마찬가지로 리오드의 눈치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다른 단원이 입을 열었다.
“틀렸습니다. 전혀 입을 열지 않아요.”
“마치 자물쇠로 꾹 다문 것 마냥 소용이 없었습니다. 고문이나 회유 같은 것도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빨리 죽여 달라고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네 예상대로군.”
“그러게.”
““엉?””
리오드의 말을 받아 담담하게 중얼거린 은현에게로 심문을 담당했던 두 단원의 시선이쏠렸다.
마치 이 상황을 예견했다는 듯 담담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은현을 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심문, 제가 해도 될까요?”
“예? 아, 뭐….”
단원이 흘끗 리오드를 바라보며 눈치를 봤지만, 팔짱을 낀 채로 이 상황에 개입할 생각이 없다는 태도를 취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의 부탁을 승낙했다.
솔직히 은현이라고 뭐 별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 자신들이 계속 심문을 한다고 지금까지 굳게 닫혀있던 산적들의 입이 열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분은 다른 산적들을 모두 데려와 심문실 안에 넣어주세요.”
“……?”
은현의 부탁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두 단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은현은 두 단원들의 의문을 해소시켜줄 생각이 없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옆을 지나치고, 심문실의 문고리를 잡고는 뒤를 돌아보며 단원들에게 재차 이야기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은현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리오드가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았기에, 단원들은 몸을 움직여 산적들이 투옥되어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같이 들어 가줘야 하나?”
“아니, 나 혼자 들어갈게.”
“알았다.”
은현은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고 심문실 안으로 들어갔다.
“넌 또 뭐야?”
은현이 심문실 안에 입장하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산적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새로 심문을 담당하게 된 사람입니다.”
“…기사가 아닌 것 같은데?”
“뭐, 그렇죠.”
산적이 은현의 행색을 훑어보더니 도저히 귀족 같지 않은 초라한 행색에 비웃음을 날렸다.
“하, 이제는 너 같은 걸, 심문으로 쓰는 건가? 이 나라도 글렀군. 나라도 왕이 될 수 있겠어.”
“너무하시네요. 이래 뵈도 꽤 깔끔하게 다니고 다니는 편인데.”
은현의 행색은 귀족들이 치장하고 다니는 사치품 같은 건 하나도 걸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평민 중에서는 나름대로 제법 괜찮은 재질의 원단과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심문 따위 소용없어. 너희에게 알려줄 수 있는 정보는 하나도 없으니까 빨리 처형시켜.”
“그러게요…. 그래서 지금 저희 쪽도 매우 곤란한 상태라 서요.”
“…….”
곤란한 상태라고 스스로 발설하면서도 매우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은현의 태도가 명백히 이상했기에, 산적이 은현을 노려보며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해냈다.
“그렇게 무섭습니까?사령술사가?”
“……!”
은현의 말을 들은 산적이 어깨를 움찔 떨며 처음으로 동요의 표정을 드러냈다.
심문을 맡은 아르티아의 단원들이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산적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째서 산적들은 두 술사들에게 시체들을 가져다 바쳐야 했던 것인가.
어째서 산적들은 두 술사들이 자신들을 배신했음에도 아무런 정보도 불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산적들은 아무런 정보도 불지 않고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산적들을 개처럼 부리고 있는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존재가 평범한 산적의 두목이 아니라 ‘사령술사’라는 점을 조금 더의식해본다면, 단원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문을 해소하는 것은 매우 쉬웠다.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은 그 점을 찌르는 것.
“두려운 거죠? 죽어서도 쉬지 못하고, 인간도아닌, 마수와 같은, 또는 마수보다 더 끔찍한 몰골로 평생을 고통받아야한다는 게.”
“크…으….”
“정보를 불었다가 처형을 당해도, 사령술로 인해 당신의 영혼이 그 사령술사의 손에 들어갈 테니까.”
정곡을 찔린 산적이 할 말을 잃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은현에게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자아, 저와 거래를 하지 않으시겠어요?”
“…거래?”
“네! 거래죠. 저는 당신을 배신한 그 두 술사들의 정보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에게 사령술사에게 농락당하지 않는, 평안한 안식을 맞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드리겠습니다.”
은현이 뭐하는 인물인지, 그런 것을 약속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인물인지, 그런 것을 고민하고 따져볼 여유도 없을 만큼, 은현의 제안은 꿀이 떨어지는 달콤한 과일과도 같은 향기를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을 농락하는 백은색 뱀의 혀에 놀아난 산적이 꿀꺽 침을 삼키며, 자신의 앞에 놓인 달콤한 과실을보고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어떠신가요? 정말 맛있어 보이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