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114. 신종 마수 토벌(7)
[이건…좀 심하구나.]
소녀의 기억의 재현을 본 베르단디는 인간들이 느끼는 속이 매스껍다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
[아이야?]
기억의 재현이 끝나고 불러들였던 소녀의 ‘과거’가 끝나고 주위의 배경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은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자, 베르단디가 은현의 이름을 불렀다.
“…….”
자신의 이름이 불렸음에도 은현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의 생각이 궁금해진 베르단디가 은현의 생각을 읽기 시작했다.
‘무슨 마법일까.’
마리우스라는 남자가 언급한 ‘네 마법으로 도망치면 되잖아.’라는 말이 계속 은현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레나트라는 여자의 마법이 산적소굴과 브람 마을 사이의 이동에 걸리는 시간을 순식간에 단축시키는 수단이라는 건 확실한데.’
대표적으로 일리아나나를 비롯한 고위 자릿수 마법사들의 텔레포트나, 최근 은현과 일리아나가 개발한 ‘게이트’ 아티팩트처럼 레나트라는 여자 또한 도주나 이동에 특화된 마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마수들이 마을을 습격한 걸로 봐서 마수를 소환비스무리 한 방식으로 꺼낼 수 있는 수단도 이 마법과 관계가 있어 보이고….’
게다가 은현이 처음 감지를 통해 산적 소굴 곳곳을 수색했을 때, 산적 내부의 시설에서는 연금술사가 사용하는 개인적인 공방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인간의 시체가 많이 필요했던 것만큼, 인간의 시체에 합성시킬 마수의 신체 또한 보관하는 것은 물론 관리가 필요할 텐데, 그런 공간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의문이었다.
‘어쩌면 레나트라는 그 여자의 마법이 공간에 간섭하는 능력을 가졌다면….’
자신과 일행을 이동시키는 것 뿐 만이 아니라, 마수들마저 이동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과 장소에서 마수들을 꺼내어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더 거지 같아지는데.’
결론적으로 마리우스와 레나트라는 이름의 두 사람은 시간도 어두운 밤 시간대로, 산적들이 모두 잠든 순간을 노려 곧바로 도주를 감행했고, 새로운 인간형 키메라 부대를 만들어낼 생각으로 이 마을을 습격하고 시체를 가져갔다는 것이 올바른 수순일 것이다.
‘그 와중에 어린 아이를 살려준 의도가 진짜 미X놈이 따로 없잖아?’
소녀를 살려준 것에서 그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하게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소녀에게 가혹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악질적인 방식은 도저히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부류의 종류다.
[으음…. 확실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가 아니더구나.]
자연스레 은현의 생각을 가지고 있던 베르단디의 동의가 날아왔다.
기억을 모두 본 은현이 소녀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감지를 통해 추가적인 생존자가 없는지 재차 확인했다.
‘살아있는 사람은 이 아이 하나인가.’
베르단디의 말에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은현은 바닥에 깔아둔 천 위에 누워있는 소녀를 조심스레 안아들고, 자신의 등에 업었다.
[가려는 것이냐?]
‘네. 저 쪽이 우리 쪽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이동 수단으로 이동하고 있는 이상, 여기서 더 이상의 추적은 소용이 없으니까요.’
아직까지 놈들의 사령술과 생체 연금술을 이용한 키메라 조종 수법만을 파헤쳤을 뿐, 놈들의 목적이 뭔지도 알 수 없고, 정체도 불분명하기 때문에, 추적하려고 해도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일단은 원정대로 복귀하려고 합니다. 적어도 리오드 쪽에서 체포한 산적 쪽에서 뭔가 정보가 나오길 빌어야겠죠.’
사령술사가 숲에 풀어둔 자신의 인간형 키메라들의 이변을 눈치 챘음에도 불구하고, 산적들에게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연금술사만을 데리고 내뺀 것을 생각하면, 연금술사의 이동 능력에 제한이 있거나, 처음부터 산적들을 개처럼 쓰고 버릴 요량이었을 것이라는 것도 추측할 수 있었다.
‘크게 기대는 할 수 없겠지만, 유일한 단서나 마찬가지니까.’
[으음, 그 아이는 데려가려는 것이냐?]
‘그래야죠. 망해버린 마을에서 어린 아이 혼자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적어도 데려가서 보육원에 맡길 생각입니다.’
[보육원?]
‘이 아이처럼 부모나 보호자가 사망하거나 죽어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어린 아이들을 맡아서 키워주는 곳이에요. 개인적으로 제가 후원하는 곳이 있어요. 그곳에 맡길 생각이에요.’
[훌륭한 곳이구나. 좋은 생각이다.]
아이가 혼자 남겨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은현의 등 뒤에 업혀진 소녀처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부모님들이 모두 죽어버린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단순히 변심이나 생계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아이를 유기하는 경우도 이 세상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고통 받지 않고 최소한 추운 곳에서 굶어 죽는 일만큼은 면할 수 있도록, 은현은 지원금을 보육원에 후원하고 있었다.
등에 업힌 소녀가 잠에 깨지 않도록, 은현은 원정대로 복귀하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수색대의 산적 소탕은 너무나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수색대로 편성된 조원들이 인간형 키메라와의 전투에서 부상이 경미하고, 야생의 난전에 능한 상위 랭크의 모험가들을 다수 편성한 것이 큰 덕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랭크가 높을수록 타인의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존심 강하고 콧대가 높은 모험가들은 리오드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르고 있었다.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검격과 대영웅이라는 명성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키고도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무력과 전장에서 보여주는 위용을 모르는 왕국의 귀족들은 모르고, 최전선에 나와서 목숨이 오가는 싸움을 일삼는 자들에게 리오드는 그야말로 영웅 그 자체였다.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볼지언정, 궁정에서 그를 깔보고 헐뜯었던 귀족들처럼 리오드를 보고 불만을 가지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산적들의 소굴을 샅샅이 수색하고 감금되어있던 여자들을 발견한 엘레노아는 문을 열어젖히고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가자마자 코를 찌르는 밤꽃냄새에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알몸으로 널브러져 있는 대여섯 명의 여자들의 온 몸에는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새하얀 정액들로 더럽혀져 있었고, 여자들의 가랑이 사이와 입안에서 흘러나오는 정액들이 풍기는 냄새들이 밀폐된 공간 안을 가득 채워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공녀님! 안으로 들어가시면….”
엘레노아의 호위기사인 레노가 그녀가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말리려 했지만, 엘레노아는 그의 만류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걸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저희가 너무 늦게 와서….”
“아, 아아….”
반 즈음 정신이 나간 한 여자가 엘레노아를 올려다보며 옹알이를 내뱉었다.
“물하고 천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가능하면 많이.”
“물하고 천, 말씀입니까?”
레노가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묻자, 엘레노아는 감금되어 있던 여자들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몸이라도 씻겨주고 싶어. 그리고 몸을 가릴수 있는 망토나 로브도 함께 가져다 주고.”
“알겠습니다.”
은현과 리오드의 대화를 들은 엘레노아는 수많은 산적들에게 강간을 당한 여자들의 미래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 여자들의 시체에서는 성폭행의 흔적도 발견했고….
인간형 키메라들을 부검했던 은현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산적들에게 강간을 당하다가 결국에 죽음을 맞이하면, 그녀들의 시체에 마수들을 합성시켜 죽어서도 사령술사의 종으로 희롱당하는 그런 미래.
그 상상을 하게 되자 엘레노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레노가 거대한 수통과마른 천을 가져오며 엘레노아의 옆에 놓았다.
“레노.”
“나가있어.”
“하지만…. 그럴 순 없습니다.”
“…그럼 뒤 돌아서 있어.”
“알겠습니다.”
엘레노아의 호위기사라는 역할을 부여 받은 것에 대한 사명감이 강한 레노는 엘레노아의 명령을 거부했지만, 마지못해 타협안을 제시한 엘레노아의 명에 따라 뒤를 돌아섰다.
여자들의 몸에 덕지덕지 붙은 상태로, 말라서 굳어버린 산적들의 정액을 닦아내면서, 엘레노아는 몇 번이고 토할 것만 같은 혐오감을 느꼈지만, 애써 그 감각을 참아내며, 여자들의 몸을 씻겼다.
점심이 되기 전까지 잔뜩 늘어져 있던 산적들을 손쉽게 제압한 수색대는 그들을 모두 포박하고, 베이스캠프로 복귀했다.
인간형 키메라와의 전투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허무할 정도로 쉽게 끝난 산적의 소탕에 기운이 남아돌았던 모험가들은 리오드에게 곧장 페르닌으로 복귀하는 것을 건의했지만, 리오드는 모험가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직 은현이 복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도주한 사령술사와 연금술사를 추적에 나선 은현의 미복귀를 사유로 내밀자, 모험가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사유를 받아들였다.
모험가들의 입장에서도 직접 전투를 통해 겪어본 인간형 키메라의 존재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혐오스러운 적이었다.
내심 은현이 사령술사와 연금술사를 죽이고 돌아와 주길 바라는 모험가들도적지 않았다.
하지만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온다고 말을 하고 이탈했던 은현이 소식이 아예 들려오지 않자, 엘레노아는 걱정이 들었다.
“무슨 일이…생긴 건 아닐까요?”
“무슨 일이 생겼어도, 그렇게 쉽게 당할 녀석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내로 돌아오지 않는다하더라도 내일은 복귀를 해야 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군.”
포로로 붙잡은 산적들을 압송하여 심문하는 절차를 거쳐야하는 상황에서 원정대의 입장에서는 비축해둔 식량과 누적된 피로들의 문제도 존재했다.
은현의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리오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내일 아침 일찍 원정대를 복귀시킬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걱정이 되는 건가?”
“제, 제가 그 사람을 왜 걱정하나요.”
“…….”
이 질문은 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엘레노아의 반응 또한 한결 같다.
“맨몸으로 정글에 던져놔도 알아서 살아 돌아올 녀석이다. 그만큼의 경험도 풍부하고, 판단 또한 정확하지. 신경 쓸 필요 없다.”
“제, 제가 언제 신경을 쓴다고…단지, 그 사령술사와 연금술사라는 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들은…절대로 용서할수 없으니까요.”
사람의 시체를 가지고 멋대로 그런 몰골을 만들어놓는 그 행태에 몹시 화가 난 엘레노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단장님! 그 남자가 돌아왔습니다!”
급하게 리오드에게 소식을 전달하러 온 기사의 말에 엘레노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곧장 지휘관 막사를 나갔다.
“……? 중요한 얘기 하고 계셨습니까?”
“아니, 공녀에겐 더 중요한 일이 생긴 모양이군.”
리오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사에게 말했다.
“지금 바로 가지.”
◆ ◆ ◆
“괜찮나요?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예. 괜찮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한 은현의 태도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누구는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태연한 태도에 괜히 걱정했다는 생각이 들이 시작한 엘레노아였다.
“해가 지기전에 돌아온다면서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이…? 어?”
은현의 등이 마치 거북이 마냥, 담요로 덮여져 볼록해져있는 상태를 뒤늦게 확인한 엘레노아가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이 아이를 좀 봐주시겠습니까.”
“…어린애네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브람 마을의 생존자입니다.”
“생존자라면…설마….”
은현의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엘레노아의 안색이 창백해져갔다.
“늦었군.”
뒤늦게 등장한 리오드의 목소리를 들은 은현이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리오드, 보고할게 있어.”
“…알았다. 당장 막사로 가지.”
은현의 굳어있는 표정과 내리깐 목소리를 통해서 사태의 심각성을 읽은 리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도….”
“아이는 문제없나요?”
“네. 잠을 못자서 그런지, 피로가 좀 쌓인 것 외에는 괜찮아요.”
“그렇군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발걸음을 옮기는 은현을 보고 엘레노아가 순간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아니…보통은 그럼 따라오세요. 같은 얘기라도 해줘야하는 거 아니야?”
은현의 태도에어이없음을 느끼면서, 엘레노아는 구호 막사의 남아있는 자리에 소녀를 눕히고, 곧장 지휘관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며, 은현과 리오드의 대화를 들었다.
“즉, 연금술사 쪽에서 모종의 수단을 이용한 공간 이동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그 능력에 명백한 한계는 있지만, 산적 소굴과 멀찍이 떨어져있는 브람 마을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는 만큼 능력의 활용 부분은 매우 위협적이라는 얘기군.”
“맞아.”
“…이건 이제 더 이상 마수토벌이나 산적소탕 같은 문제가 아니군.”
“이번에 내가 발견한 마을은 그냥 작은 소규모의 마을이었어.어쩌면 그 이동 능력으로 다른 마을도 계속 습격을 했을지도 모르지.”
“마을을 습격하면 할수록 시체는 쌓여가고 그 시체를 이용해 만든 키메라는 고스란히 자신의 병력이 되는 셈이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놈들의 규모가 늘어난다고….”
“게다가 지금은 들키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작은 마을들을 습격하고 있지만, 이 마을들을 습격하고 나면 다음 목표는 말 안 해도 알겠지?”
“귀족령에 속한 중소규모의 마을들이 되겠군.”
생각을 마친 리오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기사 하나를 호출했다.
“지금 당장 원정 복귀를 서두르겠다. 모든 원정대원들에게 전달하도록.”
“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급한 사안이다. 서둘러라.”
“아,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