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110. 신종 마수 토벌(3)
“꺄아악!”
세실리아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거대한 빛과 함께 불어 닥친 돌풍에 얼굴을 가렸다.
검에서 해방된 검기가 키메라들을 덮쳤고, 키메라들의 육체를 사정없이 찢어발기며 리오드를 기준으로 키메라가 밀집해 있던 숲이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울창한 나무들이 뜯겨져나가고, 갈라진 대지 위에 찢어발겨진 참혹한 꼴의 키메라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그 수는 가히 마흔을 넘을 정도다.
“이게 대영웅….”
리오드의 일격을 몸소 체험한 한 모험가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신과의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를 실감한 모험가가 보고 있는 ‘리오드 올리비온’이라는 남자는 정말로 세상을 구했다는 용사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엄청난 남자라는 것을 재차 실감하고 있었다.
그 모험가 뿐 만이 아닌, 원정대에 참가한 모두가 멍하니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젊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와 리오드의 옆에 섰다.
‘뭐야. 저 X끼는?’
은현의 정체를 처음 본 이들은 모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가벼운 경갑과 검은색 코트를 걸친 남자의 무장이라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양손에 들려있는 두 자루의 검에 담겨있는 범상치 않은 양의 마력과 여유로움이 흘러나오는 태도는 명백히 베테랑의 모습.
“위력 많이 죽었네.”
“무슨 소리지. 반의 반의 위력도 내지 않았다.”
“아아, 그러셔요.”
이 상황에서 농담을 건내는 두 사람을 보고 은현과 리오드의 관계를 일부나마 알고 있던 아르티아의 기사단원까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상황은?”
“이걸로 정리한 게 40. 방금 네 공격을 감지하고 오고 있는 게 150.”
담담하게 숫자를 말하는 은현의 이야기를 들은 원정대원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은현이 말한 숫자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은현이 그것을 감지해낼 수 있었는가에 대한 능력적인 부분에 대해 놀라움보다, 아까와도 같은 마수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시간은?”
“5분 정도.”
“충분하군.”
리오드가 검을 들어올리며, 원정대원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모두의 이목이 리오드에게 집중된 순간을 이용하여, 은현이 엘레노아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르티아 기산단장이자, 이 원정대의 지휘관으로써 명령하겠다!”
[자애로운 여신이시어. 여신께서 굽어 살피는 어린양들을 그 누구도 상처 입히지 못하도록 보호하소서.]
[베스타의 축복]
[스트렝스, 헤이스트, 하이 블레싱, 디바인 프로텍션]
“크…읏!”
이전의 아르키스 대미궁 원정에서 보여줬던 축복의 개수보다 명백히 많았지만, 은현이 건 내준 대량의 신성력을 포함한 성물을 매개로 기도를 하고 있는 지금의 엘레노아에게는 자신의 역량의 한계를 벗어난 상위 주문을 몇 개 더 사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단지 가능해진 것 뿐, 지끈거리며 머릿속에 찾아오는 두통과 빨려나가는 것처럼 급속도로 가속된 정신력의 소모만큼은 어쩔 수 없었기에 작은 신음을 내뱉는다.
두 손을 맞잡고 경건하게 신에게 엘레노아의 기도를 올림과 동시에, 은현도 품에서 꺼낸 보석 속에 마력을 담아 활성화 시키곤 허공을 향해 던졌다.
허공으로 떠오른 은현의 보석이 하늘로 들어 올린 리오드의 검 위에서 터졌고, 보석 속에 내재되어 있던 마력이 청록색의 빛을 내뿜는다.
[엘리시아 보석 증폭술]
[12월의 탄생석, 터쿼이즈(Turquoise)]
터쿼이즈가 의미하는 것은 성공, 번영, 승리, 불굴.
엘레노아의 기도를 통해 발현된 신의 축복이 은현이 발동시킨 보석 증폭과 어우러져, 축복의 적용 범위를 늘리는 것은 물론, 축복으로 상승되는 능력의 효율까지 상승시킨다.
리오드의 검 위에서 영롱한 청록색의 빛을 정면으로 맞은 원정대원들이 순식간에 자신의 몸에 생긴 신체능력의 향상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이 축복은! 이런 수준의 축복을 걸어주다니, 도대체 누가….”
“와, 와아….”
순식간에 원정대원들의 모든 이목이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엘레노아에게 향했고 무심코, 한 모험가가 그녀의 이명을 입에 담았다.
“저것이 바로 ‘페르닌의 꽃’….”
“아, 진짜….”
들을 때마다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끔찍하게 싫은 자신의 이명이 귓가에 파고 들리자, 엘레노아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지금은 축복의 기도를 하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없었기에, 꾹 참았다.
이윽고 모든 원정대원들이 축복을 받은 것을 확인한 리오드가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던 검을 쑥대밭이 된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원정대 쪽으로 돌진해오고 있는 키메라 마수들을 향해 겨눴다.
“맞서 싸워라! 신의 가호가 우리에게 함께 하고 계시니! 아무도 죽지 말고, 승리를 쟁취하라!”
“““와아아아아아!”””
리오드의 검격과 엘레노아의 증폭된 축복으로 인해, 키메라 마수들의 기형적이고 생리적 혐오를 불러일으키며 바닥에 떨어졌던 사기가 순식간에 증진됐다.
무기를 꽉 쥐고 있던 원정대원들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오는 마수들에게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을 개시했다.
“리아. 교수님과 엘레노아 공녀님, 일행. 잘 지켜. 최우선순위는 세실리아 교수야.”
엘레노아의 경우 자신을 최우선적으로 호위할 기사를 둘이나 데려왔으니, 전선에서 어느 정도의 대처는 가능하리라 은현은 판단했다.
“명령을 수락합니다.”
“그래.”
승낙의 의사를 내보이는 에밀리아의 반응에, 은현도 고개를 끄덕이고 전선의 최전선을 향해 달려갔다.
“끄아악!”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오크의 팔이 달린 키메라의 주먹이 복부에 꽂히고 비명을 지르는 모험가를 발견한 은현이 그를 향해 달려갔고, 바닥에 주저앉은 모험가의 머리를 주먹으로 짓뭉개버리려는 키메라의 굵은 팔뚝을 은현이 베어냈다.
검붉은 피가 절단된 팔뚝에서 쏟아져 나오며 거대한 녹색피부의 팔뚝이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그대로 키메라의 복부에 검을 꽂아 넣으며 위로 베어 올리자, 키메라의 몸이 두 동강이 나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고맙다.”
모험가가 무기를 쥐고 바닥에서 힘겹게 일어나며 은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직 싸울 수 있습니까?”
“물론.”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은현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이동을 개시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다!”
차례차례 위험한 상태의 원정대원들을 구원해내며,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대피시킬 때마다, 은현에게 감사의 인사들이 날아왔다.
은현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인사들에 일일이 대꾸해줄 여유도 없이 마수들을 처리해나갔다.
[시에테 검성술]
[환상검무(幻像劍舞)]
‘이형환위’가 곁들여진 은현의 검무는 마치 미세한 동작의 차이가 그려진 수십 장의 그림들이 차례로 넘어가는 것처럼 유려하고 아름답다.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질기고 단단한 마수들의 살을 베어 넘기는 은현의 검은 그러면서도 날카롭고 무서운 위력을 자랑하며 마수들을 학살해나갔다.
유려하게 흘러가는 그의 검격에 마수들의 살점이 베어질 때마다, 경탄과 경악이 섞인 목소리들이 모험가와 기사들 사이에서 흘러나온다.
“와…씨….”
도대체 어디서 저런 무력을 가진 자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에 의아할 지경이었다.
최근 공개재판을 통해서 은현의 존재는 에린과 함께 화제의 대상에 올랐지만, 모험가들이나 말단 기사들의 사이에서 은현의 존재가 확실하게 각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빠르게 마수들을 베어 넘기며, 차근차근 정리해나갈 때, 은현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찌푸린다.
‘이건, 설마…아니길 빌었는데, 진짜로?’
[왜 그러느냐?]
전투가 지속되고 베어낸 마수의 숫자가 점점 늘어날수록 머릿속으로 떠오른 의문에 베르단디가 물었다.
‘이 마수들, 다 시체에요.’
[시체? 이미 죽어있었다는 말이냐?]
‘네.’
생각해보면 두 눈이 모두 파인 여성형 상체를 가진 거미형 하체의 키메라 마수도 존재했다.
처음 마수들을 보았을 때, 은현이 받았던 인상도 피가 돌지 않는 창백한 피부에 힘이 없는 듯 흐느적거리는 몸들.
처음 키메라를 보고 들었던 인상도 ‘마치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 같다.’라는 인상이었다.
검으로 마수들의 살점을 베어내면서 느껴지는 감각도 살아있는 살덩이를 베어내는 것이 아닌, 이미 죽고 썩어버린 가죽과 살점을 베어내는 감각은 잊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니길 바랬는데.’
은현도 곧바로 이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한 것은 머릿속으로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강했던 탓이었을까.
‘그때 완전히 죽여 버리고 남긴 유산들도 모두 불태웠는데, 어째서 또 다시….’
“후우….”
지금 고민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권능을 발동시켰다.
[은현 고유능력]
[사고가속]
전투에 임해 마수들을 베어내지 않고, 권능을 이용해 사고회로를 돌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대강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머릿속으로 그려진 은현은 곧바로 해결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것이구나.]
은현의 생각을 읽은 베르단디도 대강의 정황을 파악했는지,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여신님. 해도 괜찮을까요?’
[어차피 언젠가는 그 아이에게 전해줄 물건이었지 않느냐.]
‘하지만 이건 여신님의 신력으로 만든 거니까요. 여신님의 허락을 받는 게 당연하죠.’
[후후,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아이의 배려는 고맙구나. 좋다. 허락하마.]
“꺄악! 깜짝이야! 갑자기 나타나지 좀 마세요!”
‘이형환위’를 발동시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이동한 은현이 엘레노아 앞에 나타나자, 그녀를 호위하던 두 호위 기사가 그녀의 비명을 듣고 경계의 태세를 취하며 은현에게 검을 들이댔다.
“…어느새?”
은현이 접근해오는 것을 기척도 감지해내지 못한 레노가 멍한 표정으로 은현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고 엘레노아를 뒤에 숨겼다.
“미안합니다. 좀 급해서요. 공녀님. 정화주문 사용할 여력 되십니까?”
“정화…인가요? 지금은 좀…방금의 축복으로,있던 신성력도 모두 끌어다가 쓴 상태라….”
“신성력이 회복되려면 얼마나 걸리죠?”
“적어도 한 시간은….”
“늦어요.”
“제 능력 밖의 상위 주문을 두 개나 더 쓴 상태라고요. 이것도 당신이 주었던 성물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어요.”
“마침 딱 좋은 기회군요. 잠시 공녀님 좀 데려가겠습니다.”
“뭐?”
마치 당연하다는 듯 허락을 구하는 그 태도에 레노가 인상을 찌푸리며 은현의 접근을 막으려 했지만, 은현이 잔상을 남기고 두 호위기사의 시야에서 벗어나 엘레노아의 뒤로 접근했다.
“꺄악!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저항할 틈도 없이, 엘레노아를 오른쪽 어깨에 들쳐 업자,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은현의 어깨 위에서 난동을 부렸다.
주먹을 쥐며 은현의 등을 두드리며 당장 내려놓으라고 소리를 지르는 엘레노아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은현은 그녀의 두 호위기사에게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네 놈!”
“진짜 죄송합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얌전히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날 물건 취급하지 말아요!”
“하….”
잔뜩 분개하는 엘레노아를 데리고 ‘이형환위’를 사용하여 순식간에 사라지는 은현을 보며 레노와그의 동료기사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꺄아악!”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고, 전란의 중심 한복판, 리오드의 옆에 은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리오드가 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녀는 또 왜 데려왔지?”
“이 거지같은 상황을 단번에 해결할 거다.”
리오드는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은현의 기분이 급작스럽게 나빠졌음을 눈치 챘다.
은현이 지금의 이 상황을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엘레노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공녀가 이 상황을 해결시킬 수 있다고?”
“어.”
“이봐요!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해주고….”
“리오드, 지금부터 나랑 이 여자를 지켜. 5분, 5분이면 돼.”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다.”
전적으로 은현의 행동을 믿고 신뢰하는 리오드는 자세한 계획을 묻지 않았다.
그저 그의 지시로 따르는 것은 긴 시간이 지나,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올라있어도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마치 20년 전의 기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그럼 부탁해.”
리오드의 승낙을 받고, 은현이 검을 바닥에 꽂자, 검과 두 사람을 중심으로 푸른색의 마력의 장막이 씌워져 두 사람을 보호했다.
바깥의 시야와 소리가 모두 차단당하자, 결계의 내부에는 조용한 정적이 맴돌기 시작했다.
한창 전투 중이었던 상황에서 찾아온 정적이 어색했는지, 엘레노아가긴장을 풀지 않고 은현에게 물었다.
“뭐, 뭘 하려는 건 가요…?”
“하아, 솔직히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뭘요….”
“공녀님.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저항하지도 마세요. 나도 처음이라 자신이 없으니까.”
“……?”
‘저항? 처음? 도대체 뭐를…?’
은현이 한 발자국 다가가자,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엘레노아가 한 발자국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은현과 엘레노아의 한발자국에는 보폭의 큰 차이가 존재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은현이 엘레노아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 이거 놔요! 당신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무언가 머릿속으로 떠오른 이상한 상상에 본인도 화들짝 놀라며, 은현을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은현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도대체 저한테 무슨 짓을 하려…”
푸욱
“어…?”
순식간에 엘레노아의 앞으로 다가온 은현이 그녀의 가슴 정중앙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은현을 엘레노아가 멍하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