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109. 신종 마수 토벌(2)
세실리아의 문제가 해결되자, 출정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세실리아의 호위를 맡게 된 은현은 많은 이들을 태운 마차 안에서 세실리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최근의 에린은 정말 밝아졌어요.”
“그렇군요.”
“예전에는 많이 의기소침해하고 항상 주눅 든 모습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성적도 상위권에 위치해있고 더 이상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성적이라…. 걔가 공부도 잘하나요?”
“아, 아니요…. 높은 성적을 보여주는 건 검술과 마법 분야의 실기시험 뿐이에요. 역사나 교양 같은 필기의 분야는 조금….”
“조금?”
“죄송해요. 솔직히 많이 안 좋아요.”
은현이 빤한 시선으로 되묻자, 세실리아는 어떻게든 에린을 옹호해주려다가 실토를 하고 말았다.
많이 안 좋다는 것도 사실 변호해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역사나 귀족의 교양 예법 분야에서는 바닥을 기다 못해 처참한 수준.
애초에 평민의 신분으로 귀족의 소양을 타고나지 못한 에린에게 있어서는 범접할 수 없는 분야였기에, 세실리아의입장에서도 그녀의 성적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졸지에 학부모 면담과도 같은 대화가 이어지자, 세실리아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남자에게 식은땀을 흘리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흐음, 그렇군요.”
“그거…뿐인가요?”
“이외에제가 뭔가 해야 할 말이 있나요?”
“아뇨, 딱히 그런 건…그럼 성적을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왜 우리 애가 이것 밖에 못하는 거냐. 이것밖에 되지 않을 리가 없다. 저는 뭐 이런 말씀이라도 하실 줄 알았죠.”
정말로 학부모의 눈치를 보고 있는 듯, 세실리아의 태도에 은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 아이의 뭣도 아닙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무언가를 지시할 이유가 없죠.”
은현은 에린의 보호자였지만, 에린의 부모는 아니다.
혈연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시간이 지나 키워준 은혜를 갚기 위해 은현을부양해야할 의무나 책임 따위는 에린이 짊어질 이유도, 짊어지게 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검과 마법을 가르치고 있는 건…바로 당신이 아닌가요?”
“그거야 그 아이가 원했기 때문이죠. 자신과 자신의 오빠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이 선택을 했던 것 뿐 입니다.”
“…….”
세실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은현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한 소녀를구하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한 없이 성장을 지원해주는 은현의 존재는 세실리아에게 있어선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에린의 상태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보고하라며 매우 신경을 쓰고 있는 학교장의 지시를 생각해보면, 눈앞의 남자인 은현이 무슨 수를 썼다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교수로 부임해있는 아이테르의 학교장과도 모종의 관계를 가지고 있고, 이제 보니 아르티아의 단장인 리오드 올리비온과도 적지 않게 친근한 사이임을 알았다.
그와 처음 엘빈의 일로 대면했을 때도 날카로운 눈매로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은현을 응시했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 걸까.
그렇게 은현을 응시하고 있을 때, 덜컹거리며 가도를 달리던 마차가 멈춰 섰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가야 할 길이 짧지 않기 때문인지, 대규모의 인원과 물자를 실은 마차를 끄는 말들에게 정기적으로 휴식을 취하게 해줘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가장 앞을 달리고 있던 마차가 멈추자, 차례차례로 뒷 열의 마차들이 따라 멈춰 섰다.
마차를 몰던 기사의 외침을 듣고, 같은 마차에 타고 있던 은현과 세실리아를 비롯한 몇몇 모험가들이 바깥의 공기를 쐬기 위해 마차에서 내렸다.
“역시…이 원정에도 참가하셨네요.”
익숙한 목소리에 은현이 고개를 돌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다.
“또 뵙는군요. 공녀님.”
은현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대충 인사를 건 내자, 그의 시원찮은 반응에 엘레노아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뭐죠, 그 시원찮은 반응은?”
“아, 네 놈은!”
그녀의 뒤에 서있던 갑옷을 입은 두 기사 중 한 명이 은현에게 삿대질을 하며,이를 갈기 시작한다.
“어…기사님은 분명 그때….”
“네놈에게 당했던 치욕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지금 당장 나의 결투를 받….”
“레노, 그만둬.”
“고, 공녀님! 하지만 이 자는!”
“사정은 모두 들어서 알고 있잖아. 이제는 오해도 풀렸고 적대관계가 아니야. 검을 집어넣어.”
헤르샤 준남작 사건이 해결된 이후, 은현에 대한 오해는 이미 공작가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마친 끝에 오히려 협력관계를 구축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쓰라린 경험을 겪게 해준 자신의 감정을 참아내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크…윽! 알겠습니다….”
이전, 헤르샤 준남작 사건 때, 폐창고에서 은현과 한번 겨뤄보았던 레노에게는 쓰라린 패배의 기억과 동시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사건이었다.
검을 들고, 화를 참지 못하고 기사로서 옳지 못한 싸움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현에게 맨손으로 제압을 당한 경험은 기사로서의 수치였다.
“아, 저…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사과하지 마라!”
첫 만남부터 은현에게 잔뜩 깨졌던 레노는 자신의 주인인 엘레노아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분한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던 은현은 멋쩍은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언젠가 꼭 네놈에게 받은 치욕을 반드시 갚겠다.”
“하하, 알겠습니다.”
분하다는 기색을 감출 생각도 없이, 은현을 노려보며 이를 가는 레노의 표정은 이미 사나운 야수와도 같았다.
그런 그의 표정을본 은현은 쓰게 웃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곳이 아르티아의 원정대가 아니고,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였다면, 폐창고에서 그랬던 것처럼 급발진으로 은현에게 싸움을 걸지 않았을까.
“후우, 죄송해요. 저희 쪽 사람이 무례를 저질렀어요.”
“아뇨.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본다면…어쩔 수 없겠죠.”
“쳇.”
자신의 주인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노라는 기사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시선을 피하며 혀를 찼다.
“레노.”
“…죄송합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엘레노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호위기사를 나무라자, 레노가 잔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어쩔 수 없이 은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네. 괜찮습니다.”
은현도 쓰게 웃으며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다시 엘레노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공작가 쪽에서 지원으로 공녀님을 보내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무리 사제라고 하더라도,이번 원정은 꽤나 위험한 원정이 될 텐데요.”
“위험하고 안 위험한 원정을 골라서 지원할 생각은 가지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이번 요청은 엄연히 베스타 신전에서 저에게 해온 요청이었으니까요.”
리오드가 이번 원정에 앞서, 수도 페르닌에 있는 베스타 신전에 다수의 사제들을 파견시켜 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원정대의 규모에 맞는 사제들의 인력을 보충시켰던 것은은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엘레노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까지는 듣지 못했다.
“…베스타 신전의 사제들이 인력이 그렇게 부족했습니까? 공녀님에 직접적으로 원정의 참가 요청을 해올 정도로?”
“…아마 당신이 아까 저한테 했던 말이 그쪽에 해당되는 거겠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엘레노아를 보고, 은현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원정은 꽤나 위험한 원정이 될 것이라는 말.
그리고 위험하고 안 위험한 원정을 골라 다닌다는 것이, 베스타 신전의 사제들에게 해당되는 말임을 깨달았다.
“신전에서 파견 나온 사제들의 수준은 어느 수준입니까?”
“올해에 견습 사제의 직위를 뗀 신입이 하나, 하급 사제 둘에, 그나마 저와 같은 중급 사제가 한 명이에요.”
엘레노아를 제외하면 파견된 사제는 총 넷.
“신전 쪽에서는 이미 소문을 듣고 발을 뺀 거군요.”
현재 출정을 나온 원정대의 규모는 기사와 병사, 모험가들을 포함하면 약 150명.
적어도 사제들의 최소 인원이 10~12명 정도를 마지노선으로 생각해봐야할 지경인데, 꼴랑 네 명을 파견시킨 것도 모자라, 사제들의 수준 또한 매우 낮다.
엘레노아처럼 신전에 소속되지 않은, 모험가 소속의 사제 둘 또한 간단한 회복마법을 사용만 할 줄 알뿐, 사제로서의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는 못했다.
사제라는 직업 자체가 워낙에 귀했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한 미숙한 모험가인 사제라도, 리오드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여야만 했던 딜레마 중 하나였다.
은현은 이 상황이 명성이 있거나 어느 정도 수준의 실력을 가진 신전의 중, 상급 사제들은 이 원정이 매우 심각한 사안임을 사전 정보로 입수하고, 너도나도 발을 뺀 상황이었음을 깨달았다.
경험이 부족한 어중이떠중이들의 사제들만을 투입시켜 그나마 리오드의 지원 요청에 구색을맞춘 것이었다.
심지어 이 나라의 귀족 가문의 여식이자, 사제로서도 유명한 엘레노아에게 ‘네 나라의 일이니 너도 참가해라.’라는 식으로 공문을 보내어 반 강제적으로 참가시킨 신전의 행태에 대해서는 엘레노아 마저도 이가 갈릴 지경.
‘아니에스는이 사실을 모르는 건가.’
리오드와 마찬가지로 대전쟁을 종식시킨 대영웅 중 하나이자, 현재 그 공적을 인정받아 베스타 신전의 대주교로 인정받은 그녀가 리오드의 지원요청을 이런식으로 홀대할 리가 없었다.
“아니꼽네요.”
“네?”
“아니꼽다고요. 이딴 식의 대응을해놓고, 이번 원정을 무사히 마치고나면 또 신전 쪽에서는 지원 요청에 응해 신전의 사제들을 파견시킨 대가로 적지 않은 보상을 요구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사안이 사안인 만큼, 사제의 인력을 더 보충할 구석도 없었던 리오드는 답답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 원정을 출정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기 보신을 끔찍이 하면서 이권을 챙기려고 드는 쓰레기는 어딜 가나 있는 법이지.’
리오드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지만, 은현은 이 상황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
‘여신님. 제 생각 읽고 계시죠?’
[물론이다.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하 거라.]
베르단디의 허락이 떨어진 은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레노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엘레노아가 은현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또 분명 좋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녀님, 이렇게 당하고만 있는 것도 짜증나는데, 우리 같이 이번 원정에 엿을 먹인 신전에엿 좀 먹이지 않으실래요?”
“……?”
말투가 굉장히 저급하기 짝이 없었지만, 은현의 제안에 흥미가 돋는 것은 부정할 수없는 사실이었다.
굉장히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엘레노아는 은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 ◆
마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 중에, 전투의 신호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터졌다.
“마, 마수입니다! 마수가 나타났어요!”
마차를 몰던 기사의 외침이 들림과 동시에, 많은 마차 중에 가장 중앙의 대열에 위치해있던 마차 안에서 리오드의 사자후가 전역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전원! 전투 준비!”
리오드의 사자후가 터짐과 동시에 원정대원들의 행동은 신속했다.
각자의 무기를 들고 마차에서 호기롭게 뛰어내렸지만, 이내 숲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들을 인식하고, 순간 멍한 표정을 짓는다.
“뭐, 뭐야! 저게!”
두 다리와 얼굴은 명백히 사람의 육체임에도 불구하고, 양팔에 붙어있는 팔은 인간의 팔이 아니다.
녹색 피부와 근육질의 굵은 팔뚝이 인상적인 거대한 팔들이 사람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형태는 확실히 지금까지는 본 적이 없는 ‘기형’의 생물체다.
심지어 양쪽에 붙어있는 팔은 한 쌍이 아니었으니, 총 세 쌍의 여섯 개의 거대한 오크의 팔이 붙어있는 기괴한 형태.
어떻게 저 어마어마한 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 조차 이해할 할 수 없는 기형적인 신체구조를 가진 존재.
게다가 하체는 다섯 쌍의 다리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대거미의 하체이면서 상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유방이 그대로 드러난 여성의 상체, 산말이 된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보인 얼굴의 양쪽 눈은 이미 파여 없어진 상태였다.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마수와 인간이 합성된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합성 마수, 키메라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 우읍…!”
끔찍한 몰골의 마수들을 본 세실리아가 급하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우웨액!”
결국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위액을 바닥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녀 뿐 많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인상을 찡그리며 시선을 피하거나,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억지로 참거나,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존재의 마수들을 보고 ‘미지의 존재’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이 명백히 원정대의 사기가 떨어뜨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왕국 최고의 기사가 다리에 마력을 실어 있는 힘껏 땅을 찼다.
쿠웅!
어마어마한 각력과 마력을 동반한 리오드의 발이 땅을 강타하자, 지면이 흔들리고, 숲의 나무들이 진동하며 수많은 잎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미지의 존재에 두려워마라!”
어마어마한 성량이 쏟아내는사자의 외침에 원정대원들의 몸이 오싹하고 몸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나는 페르니아스 최고의 기사! 아르티아의 단장, 리오드 올리비온!”
검을 뽑고 마수들을 향해 겨누며,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이 원정에 참가한 대원들 모두를 단 한 명의 사망자 없이 복귀시킬 것을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공격에 나서지 않고 가만히 원정대원들을 응시하고 있는 키메라들의 반응 또한 너무나도 이상했다.
마치 리오드의 위압감에 압도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니 싸워라! 두려워마라! 절대로 죽지마라! 너희들의 앞에 내가 가장 먼저 앞서겠다!”
거대한 사자후에 호응하듯 리오드의 검에 응집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양손으로 검을 꽉 쥔 리오드가 검을 위로 들어 올린다.
그를 중심으로 몰아치는 마력의 폭풍이 검으로 흡수되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어마어마한 마력이 축적된 리오드의 검이 주위의 대기를 찌릿하게 만든다.
마수와 원정대원들, 그 어떤 존재도 마력으로 짓눌려 무거워진 공기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고 멍하니 리오드를 응시했다.
이윽고 리오드가 검을 내려치고, 검에 담겨져 있던 검기(劍氣)가 해방된 순간.
[올리비온 검술]
[태산 가르기]
리오드를 중심으로 거대한 빛이 뿜어져 나와 전방의 마수들을 집어 삼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