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7화 〉107. 청혼 (107/730)



〈 107화 〉107. 청혼


“결국 전투에서 조차 밀린 원정대는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원정대는 산적들의 면상은 보지도 못하고, 페르닌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늘 그 전후사정의 보고를 모두 받고 내 기사단의 기사들이 목격했다는  ‘합성마수’에 대한 의견을 아이테르의 연금학 교수에게 듣고 오는 길이지.”

“흐으음….”

리오드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은현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했던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중요 키워드들을 나열해간다.
마을을 습격한 산적들.
산적 토벌을 위한 원정 도중 조우한 정체불명의 마수들.
그것이 인간과 마수를 합성시킨 합성 마수라는 것.

‘아직은 정보가 너무 부족해.’

추측과 가설은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지만, 그 무엇하나도 확정짓지 못하는 가설들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피해는 얼마나 나왔어?”

“기사 중 경상 둘, 중상 하나, 병사 중에서는 경상이 열셋, 중상이 넷, 사망 하나. 젠장….”

“당신….”

입술을 꽉 깨무는 것과 동시에, 주먹을 꽉 쥐는 그의 모습에서 분한 감정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테레지아가 이번 일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리오드의 어깨어루만지며 그를 위로했다.

“평범한 일은 아니네. 재출정,  거지?”

“당연하지. 부상당한  기사들과 병사들을 위해서, 게다가 내 기사들과 병사들을 압도한 수준의 마수들을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어.”

“좋아. 그럼 나도 참전할게.”

“…정말인가?”

뜻밖이라는듯 리오드가 되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은현의 존재는 언제나 의지하고 상담할 수 있는 든든한 존재였지만, 둘의 관계를 아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은현이 대외적으로 그것을 공개할 생각이 없고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리오드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쁜 오산이었다.

“이제는 거리낄 이유도 없어지기도 했고, 이건  위신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니까.”

리오드가 이끄는 아르티아의 기사가 원정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귀족들의 입을 타고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의 위세를 깎아내리고 싶어 하는 리오드를 적대하는 귀족세력들은 조그만 꼬투리라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니까.
문제가 생겼으면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빨리빨리 해결해버리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이 참에  가치도 좀 올려놓자.”

“내 가치? 그게 무슨 말이지?”

“너 대체 왜 이러고 살아. 기껏 세상을 구한 대영웅 중 하나가 됐는데. 다른 귀족들한테 견제나 받고 있지 않나, 나라에서 제대로 된 대우도  받고 있는  같잖아. 이 나라의 핵심인물인 ‘왕국 최고의 기사’라는 칭호를 가졌으면서.”

전쟁을 종식시킨 대영웅 중 하나로 이름을 대륙 전체에 떨치게 되면서, 그의 소속이었던 페르니아스 왕국 또한 자연스레 명성을 떨치고 위세를 떨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왕족이나 귀족들 전체가 나서서 그를 극진하게 모시고 영웅의 대접을 해줘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귀족과 왕족들은 리오드의 위세가 더욱 커지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그를 물어뜯고 견제하지 못해 안달이 나있다.

“그 소리를 다름 아닌 너한테 듣게 되다니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군.”

리오드가 헛웃음을 지었다.
전쟁을 종식시킨 것에 가장 큰 공헌을 해왔던 것은 리오드를 포함한 대영웅들이 아닌,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존재인 은현이었다.
자신들을 이끌고, 최종적으로는 목숨까지 희생했던 인간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되살아나서, 진실을 밝히지도 않고, 아무런 대가와 보상을 바라지 않으며, 태평하게살고 있다.
또한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아직도 자신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은현의 목적과 행동원리를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디아네 왕비하고도 뭔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짓을 했길래, 그렇게 밉보인 거야?”

많은 귀족들이 리오드를 그렇게 홀대를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페르니아스 왕가가 리오드 올리비온이라는 인물을 푸대접하는 것에 있었다.

“아, 그건….”

“테레지아.”

다급하게 은현에게 사실을 밝히려던 테레지아의 말을 리오드가 막았다.
이내 눈짓으로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이자, 테레지아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가 축 쳐졌다.

“흐음, 뭐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정이 있나보네. 뭐 됐어. 하지만 이 기회를 삼아서,  나라 안에서  입지를 조금 더 향상시킬 필요가 있어. 애초에 네 위세를 등에 업고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강대국으로 성장한 이 나라는 너에게 은혜를 느낄 지언 정, 널 물어뜯고, 등쳐먹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쓰레기들이 너무 많아. 그런 놈들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이번엔 판 좀 확실하게 짜놓자.”

“아니, 이건 네가 주도하는 거니까 어디까지나 나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후작부인?”

“후후, 좋아요.”

계획의 중심이자 무대의 주인공이  리오드의 의사는 무시하면서, 은현은 테레지아에게 허락을 구했다.
은현이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테레지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은현이 내민 손을 맞잡아 악수를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은현의 사망과 함께 실의에 빠진 리오드를 일으켜 세우고, 사교계를 휘어잡고 남편을 내조함으로써, 리오드를 지금의 지위까지 끌어 앉혀 놓은 그녀의 능력을 은현은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특히나 일리아나를 부추겨 자신에게 한방 먹일 정도로 대단한 기술을 그녀에게 전수하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뒷공작을 해놓는 솜씨는 은현마저 오싹한 기분이 들게 만들 정도.

“일리아나님 뿐 만 아니라, 저는 은현님과도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같네요.”

게다가 테레지아의 입장에서도, 남편의 친구이자, 능력이 매우 뛰어난 은현이 남편의 입지를 다져주기 위해서 몸소 나서주겠다는데, 그것이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아….”

은색의 뱀과 금색의 암사자가 서로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가운데에 낀 갈색 갈기의 사자가 기가 찬 시선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리고 리오드. 미안한데 이번엔 대가를 좀 받고 싶어.”

“대가?”

리오드가 뜻밖의 단어를 은현이 언급하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은현은 무슨 일이 생길 때, 자신이 나서서 많은 도움을 주고는 했지만, 대가를 요구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말이지….”

무언가 말을 하기 꺼려하는 은현의 표정을 보고 리오드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은현을 매우 곤란해 할 정도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에게 부탁할 정도라면, 절대로 심상치 않은 일일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네가 나보다 나은 부분이니까 조언을 얻고 싶어.”

“내가? 너보다 나은 부분이있다고?”

리오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와는 반대로 리오드의 옆에 있던 테레지아가 쿡쿡 소리를 내며, 숨을 죽여 웃고 있었다.

“그…나 이번에….”

망설이는 은현의 얼굴을  리오드가 미심쩍은 시선을 풀지 않고 조용히 은현의 말을 경청했다.
은현의 일생일대의 부탁을 듣고, 후작 저택 전체가 저택의 주인인 사자의 커다란 웃음소리로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 ◆ ◆

[드디어 결심이 선 것이냐?]

“그렇죠. 뭐.”

은현은 베르단디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결정이 나는 너무 기쁘구나.]

많은 고민 끝에 결국 결심을  은현의 모습을 보고, 베르단디가 뿌듯하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좋아하실 일인가요?”

[아무렴 아이가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내린 결심이 아니더냐. 나는 항상 아이가 이런 선택을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

은현은 어두운 밤하늘을 걸으면서 조용히 허공을 응시했다.
언제나 가지고 있던 고민이었다.
자신은 과연 행복이라는 것을 추구할자격이 있는가.
구할 수 있는 목숨, 구해야 하는 목숨의 차이와 경계를 명확히 나누고,  목숨들에 무게와 가치를 멋대로 부여하여 사람들을 구하면서도 사람들을 버려왔던 자신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발판으로 삼아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자신이 과연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존재하는 걸까, 고민하고 만다.
‘어째서 도와주지 않은 거야?’, ‘어째서 내다버린 거야?’라는, 자신이 포기하고 외면했던 목숨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있고 은현의 마음을 주박처럼 옭아매어 괴롭혔다.
그렇기 때문에 은현은 400년 동안 많은 인간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단 한 번도 이성과의 관계에서 연인의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일리아나의 경우는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부활을 하게 되면서, 방황을 하던 은현의 마음속에 바람을 불어넣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거부하지 못한 것은.

[운명도 정말 얄궂기도 하지. 그때  ‘마녀의 후손’이라니.]

일리아나의 마음을 받아들인 계기는 죄책감과 책임감이 가장 컸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생겨난  사람 사이의 관계에 사랑이 없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제는 저도 결정을 내렸어요. 정말로…괜찮은 거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물론이다. 나는 아이의 행복만을 바라고 있으니.]

“감사해요.”

은현은 자신에게 보내오는 여신의 무한한 호의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자신의 여신의 허락도 떨어졌다.
남은 것은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전달하는 것 뿐.
일리아나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은현에게 마음을 전해왔던 것처럼, 이번엔 은현이 일리아나에게 마음을 전하기로 결심을 했다.

“아, 현아. 왔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에서 에린이 은현을 반겨주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이제 씻은 거야?”

“에헤헤, 훈련을 조금 했어.”

“잘했네.”

“히히.”

“머리 빗어 줄 테니까 이리와.”

“응!”

은현이 머리빗을 가져와 의자에 앉으라며 손짓하자, 기분이 좋아진 에린이 의자에 앉았다.
샤워로 물기를 잔뜩 머금은 에린의 머리카락를 수건으로 털어주고 따뜻한 온풍을 만들어낸 바람마법을 이용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끼이익

“왔어?”

인기척을 느낀 일리아나가 눈을 비비며, 은현을 맞이했다.

“언제부터 잤어?”

“한…3시간?”

자연스레 일리아나가 은현의 뒤로 다가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옷 갈아입고자.”

아직도 원정에서 복귀할 때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상태로 잠에서 덜  일리아나에게 은현이 잔소리를 해대자, 일리아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귀찮아아…네가 입혀줘어….”

잠이  깬 탓인지, 목소리가 잔뜩 늘어지고 나른한 그녀를 보고, 한숨을 내쉰 은현이 빗질을 마치고는 에린에게 말했다.

“끝났어. 내일부터 학교 가야하니까 바로 자.”

“응! 알았어!”

에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급하게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간다.
은현은 자신의 허리를 꽉 껴안은 일리아나의 허그를 풀고 그녀의 허리와 다리에 손을 집어넣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몇 번이나 탐했던 그녀의 나신을 감상하고는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어 그녀에게 입혔다.

“일리아나, 나 이번에 리오드의 원정에 참가해. 아마도 당분간 자리를 비울 거야.”

“으응…. 얼마나아?”

눈을 감은 채로, 반즈음 졸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글쎄,  몇 주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너는 도서관 관리 일이 있잖아. 그리고 에린을 혼자 내버려둘 수도 없고.”

“그렇네.”

“그리고….”

‘아 씨…이거 진짜 플래그인데…. 진짜로 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 이 상황에서 하면 절대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데, 말을   수가 없다.
이미 마음은 결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상황, 이 타이밍에서 이 말을 내뱉는 것은 마치 사망플래그와도 같은 꺼림직 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은현이 거대한 딜레마에 사로잡혀 한참을 고민하자, 일리아나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은현을 흘겨보았다.

“뭐야,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나 원정에서 끝나고 돌아오면, 우리 결혼할래?”

“…….”

은현의 말을 끝으로 찾아온 정적이 일리아나의  안을 가득 채웠다.
이내 몇 초가 지나자, 일리아나가 정신이 퍼뜩 들며  눈을 부릅뜨고 은현을 죽일 기세로 노려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봐.”

“어?”

“다시 말해보라고. 빨리!”

“어, 그게 나 이번에 리오드의 원정에 참가를….”

“그딴  말고! 그 뒤에 한 말!”

친구인 리오드의 일인데, ‘그딴 거’로 표현하다니, 리오드가  이야기를 들었다면 또 인상을 찌푸리며 일리아나를 노처녀라고  소리를 퍼부었을 것이 틀림없다.

“원정 끝나고 돌아오면….”

“응.”

“우리 결혼할래?”

“…하아아아.”

일리아나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야.”

“응?”

“무슨 프로포즈가 그렇게 거지같아?”

“어….”

심드렁한 일리아나의 반응에 은현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말 한마디 듣는 게 참 어려웠다. 그치?”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었네.”

은현은 쓰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내 마음도 못 듣고 뒈져버려서, 날 나이 마흔이 먹도록 혼자 살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결혼? 결호오오오온? 그것도 이렇게 뜬금없이?”

“싫어?”

“누가 싫대?! 당연히 오케이지.  X끼야!”

일리아나가 그의 멱살을 붙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푸하아…. 안 되겠어…. 옷 벗어.”

“뭐?”

지난 번 환상세계 속에서 강제로 감행했던 노출조교플레이도 성에 이상한 눈을 떠버린 일리아나는 이상한 방향으로 스위치가 들어가는 버릇이 생겨버린 것을자각하지 못했다.

“옷 벗으라고, 지금 뱃속이 욱신거리기 시작했어. 지금 당장 하자.”

“야, 우리 다 내일 일이 있잖아. 하는  원정이 끝나고….”

“아! 못 기다려!”

이제는 성욕에 완전히 눈을 뜬 일리아나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원정 기간이 몇  걸린다고?  몸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어딜 도망가? 가기 전에 날 완전히 만족시켜 놓고 가. 네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수 있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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