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5화 〉105. 원정 복귀(1) (105/730)



〈 105화 〉105. 원정 복귀(1)

3주의 시간은 어떤 이에게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정해두었던 기한이 다 차게 되자, 은현은 원정대를 이끌고 페르니아스 왕국으로 복귀했다.
아르키스 대미궁까지 가는 것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왕국으로 복귀를 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은현과 일리아나가 개발한 ‘워프 게이트’라는 아티팩트를 이용해, 진즉에 설치해둔 일리아나의 주택으로 한순간에 이동해왔기 때문이다.

“이게…정말로 되네….”

던전 내부에서 순식간에 바깥으로, 그것도 왕국 내부로 이동된 것을 몸소 체험하며, 유리아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짝!

“자! 여러분. 저와 했던 약속. 있지 않으시겠죠? 여러분이 이 3주 동안 겪었던 경험, 얻은 성과들 그 무엇도 타인에게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무, 물론이에요.”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주위의 사람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명심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공작님께는 예외야. 조만간 이쪽에서 한 번 찾아뵙겠다고 전해드려.”

“그러지. 뜻깊은 시간이었다. 언제 한 번 이쪽에서 초대를 하고 싶군.”

“뭐, 시간이 맞는다면?”

은현의 대꾸에 웃음을 지은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왕녀님.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 유리아는 호위 기사들과 아르미타스 남매들과 함께 환궁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에린은  풀고 정리해놔. 나는 에이라를 집에 데려다 주고 올 테니까.”

“응, 알았어.”

“가자. 에이라.”

“네.”

은현과 에이라는 늦은 점심이 돼서야 올리비온 후작저택에 도착했고, 저택의 중앙 홀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테레지아의 마중을 받았다.

“어머니? 제가   알고 계셨나요?”

“딸이 몇 일도 아니고, 몇 주를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잖니. 오늘이 돌아오는 날짜라는 걸 알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단다. 어서 오렴.”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에이라가 3주 만에 보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너에게는  원정이었는데, 그렇게 고된 원정은 아니었나보구나. 야위었다기 보다는…키도 커지고 살집이 좀 더 붙은 게….”

천천히 에이라의 모습을 살펴보던 테레지아는 자신의 딸이 3주 전까지만 해도 소녀의 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다되며, 자신의 아버지를 닮아 기사로서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그렇게 불편한 환경은 아니었거든요. 오히려…너무 편하게 다녀왔다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어요.”

사실상 에이라를 비롯한 사람들이 이번 원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사람은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원정을 계획하고 주도했던 알렉스 마저도 사실은 은현을 숨긴 허수아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그저 여행용 짐을 지고 걷기만 했으며, 던전의 마수들을 쓸어버리고, 던전을 장악하고, 던전 내부에 집을 건축하여 건물 내부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환경까지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시간만 되면 아침과 점심, 저녁을 모두 챙겨주고 빨래까지 맡아서 해결해주는 은현은 마치 몸이 열 개라도 되는 듯, 파티원들이 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해결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심하게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사람들을 굴리고 또 굴려도, 사람들은 욕을 내뱉을 지언 정, 은현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에이라를 무사히 돌려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게다가…정말로 제 아버지처럼 기사다운 모습을 조금씩 갖추기 시작했네요.”

테레지아가 은현을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별 말씀을요. 그저 에이라의 부탁에 응했을 뿐입니다.”

은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지만, 테레지아 또한 자신의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일리아나한테 쓸데없는 바람을 불어넣으셨더군요.”

“후후.”

은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테레지아를 흘겨보자, 테레지아가 재미있다는 듯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응? 어머니, 무슨 얘기인가요?”

“너에게는 아직 이른 이야기란다.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너는 방에 가서 짐을 풀고 쉬지 않으련?”

“으음? 네. 그럴게요.”

에이라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크게 의문을 품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테레지아의 말을 따랐다.
에이라를 따라 시종들과 하녀들이 자기  일을 하기 위해, 물러가기 시작하고 중앙의 거대한 홀에는 은현과 테레지아, 그리고 늙은 집사장, 이렇게 셋만이 남았다.

“곧 그이가 돌아올 예정입니다. 그 전까지 잠시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그러죠.”

“집사장. 그이의 집무실에 차를 가져다 줘.”

“예. 마님.”

고개를 숙이며 집사장이 물러가자, 집무실로 발걸음을 향하는 테레지아의 뒤를 은현이 따라갔다.
테레지아의 권유에 따라, 집무실의 소파에 앉은 은현은 집사장이 가져온 홍차와 쿠키들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잘 먹겠습니다.”

“예. 그러면  이만.”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의 감사의 인사를 받아들이고 집사장은 테레지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을 나갔다.

“어떻게 된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테레지아가 미소를 지으며 시치미를 뗐다.

“…뭘 여쭤보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테레지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눈치 챈 건 저희에게 맡겼던 그 에린이라는 아이가 깨어난 날, 그이와 일리아나님이 말다툼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였어요.”

테이블 앞에 놓여있는 홍차를 홀짝인 테레지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최근, 아르미타스의 새로운 소공작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일리아나님과 둘이서 대화할 기회를 가졌죠.”

 녀석이 말이야. 요즘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건지도 모르겠고.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면 완전 개X끼인데, 진짜 모르는 거면 완전 답도 없는 병XX끼인 거잖아요.

사실…20년 전에  마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살아서 꼭  얘기 들어주겠다고 해놓고선…그렇게 죽어버리고…흑….  나쁜X끼! 20년 만에 살아 돌아왔으면, 그때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거냐고 물어 보기라도 해봐야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내 집에 쭉 눌러 붙어서 살고 있으면서! 한 마디도  말을 언급하지를 않는 거냐고!

“라고 이야기를 했었지요.”

자신이 생환해서, 일리아나의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끔가다가 일리아나가 불만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이유가 이것이었다는 것을 은현이 이제서 깨닫는다.

“쓰으으으읍, 후우우우우….”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은현은 숨을 깊게 들이쉰 다음, 그것을 내뱉었다.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다.

“진짜, 죄송합니다. 진짜, 정말로…진심으로….”

이제는 친구가 아닌, 애인이  그녀의 과거가 참을  없이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술주정의 원인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은현은 몇  년 만에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느껴 볼 수 있었다.

“후후, 괜찮아요. 남편의 친구이긴 했지만, 이 나라의 머리인 페르니아스 왕가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고위마법사이기 때문에 저 또한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는 꽤나 친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

“하지만 정말로 질이 나쁜 건…은현님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자각하고 계시죠?”

전혀 가차 없는 테레지아의 말에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나의 마음을 깨닫고 보니, 제가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제가 한 것은 그저 그분이 결심을 하도록 조언을 해드린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 포션을 주셨습니까?”

“그건 엄연히 무기로 드린 거였어요. 저는 그렇게 그이를 손에 넣었거든요.”

‘오, 마이 갓.’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리오드의 연애사의 일부를 들은 은현이 표정을 굳혔다.
평소 은현은 어떻게 리오드가 테레지아 같은 완벽한 여자를 붙잡고 결혼까지 골인을  수 있었을까, 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정작 진실은 테레지아 쪽에서 리오드에게 접근을 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그이가 어떻게 저와 결혼을 하게 됐는지, 들은 적이 있으신가요?”

“아뇨, 전혀요.”

은현에게 결혼이라는 주제는 절대로 꿈도 꿔볼  없는 주제였다.
자신에게는 여신이 부여한 사명이 있었고, 불멸자인 자신은 언제가 반드시 필멸자들을 떠나보내는 존재였기에, 쓰라린 경험을 한 뒤로는 구태여 깊은 인연을 만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되살아나서  나라를 찾아와 리오드의 결혼 사실을 들었을 때도 축하는 해주었지만, 부러운 감정은 느끼지 않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 알렉스가 유리아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은현이 호기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은현이 조금씩 부서져가던 마음이 회복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희의 사이에는 확실히 사랑이 존재했었지만, 그만큼 장애물도 많았어요. 그이는 나라를 구한 대영웅이었고, 저는 이 나라의 백작 귀족의 여식이었으니까요. 저와 그이의 사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격차가 존재했었어요.”

확실히 제국과의 전쟁을 종식시킨 리오드의 이름은 대륙 전체에 알려졌으며, 그가 소속해있는 국가인 페르니아스 왕국 또한 덩달아 대륙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간단히 예측할  있었다.
아마 왕국 뿐 만이 아니라,  나라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모든 귀족들이 리오드의 명성을 등에 업고 위세를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딸들을 리오드에게 접근시켰고, 수많은 귀족 여식들에게 시달렸을 것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그이의 친가 쪽에서, 저와의 결혼을 반대하기 시작했고, 저와 그이의 결혼은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았죠. 저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높은 위계를 가진 귀족 여식의 혼담도 들어왔고, 심지어 타국의 왕녀까지 그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상황이었으니, 그이의 친가 입장에서는 저 같은 건 별 볼일 없고 흔히 있는 백작 가문의 여식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건, 어찌 보면 귀족 사회의 입장에서는 옳은 판단이니까, 그렇게 원망스럽지는 않았어요.”

테레지아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리오드의 친가에 대해서 전혀 서운한 마음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를 깎아내리고 하찮게 보던 자신의 부모에게 실망한 리오드가 테레지아에게 사과했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장애가 존재했었다.
은현은  중에서 리오드가 가장 완벽한 여성에 가까운 테레지아를 선택한 것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을 들어보니, 두 사람이 지금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큰 역경이 있었는지, 은현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연애나 결혼이라는 점에서는 선배나 다름없는 테레지아의 말을 은현이 경청하기 시작한 순간.

“그래서, 그이가 술에 취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약을 먹이고 그이가 저를 덮치게 만들었어요.”

“…예?”

순간 은현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무척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듯 테레지아의 안색이 전혀 변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연다.

“결국 그때 했던 그이와의  경험으로 단 번에 에이라가 생겼고, 책임을 지고 싶다는 그이의 강한 주장에 따라, 저희는 결혼을  수 있게 되었어요.”

“…….”

은현은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멍하니 테레지아를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니까, 일리아나에게 했던 조언이란 게….”

“기다리지 말고나서서, 기정사실부터 만들고 책임을 지게 만들라고 했어요. 어차피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게 확실하다면, 문제될 건 없을 테니까요.”

-정말로 싫으면 피해.

자신에게 이상한 약을 먹이기 전에, 일리아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은 이것을 의미했던 것일까.
결국 은현은 일리아나를 받아들였고, 이후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무엇일까, 이 기분은.
마치 자신이 누군가의 계략에 놀아난 것만 같은 기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자신의 계략에 놀아난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은현님의 반응을 보아하니, 결국 일리아나님은 성공하신 모양이군요. 축하드린다고 전해주세요. 드디어 원하시던 것을 쟁취하셨으니.”

“…….”

복잡한 얼굴을 하며 은현이 조용히 홍차를 마시는 테레지아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오드. 너 대체 누구랑 결혼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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