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104. 합숙훈련(3)
“그런데, 현아. 우리 이렇게 계속 여기에 있어도 돼?”
“그건 왜 물어봐?”
“아니, 나랑 에이라님은 일단은 학생인데. 이렇게 결석기간이 길어지면 어떻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돼서….”
“너는 이번 원정의 정식 멤버로 참가한 거야. 당연히 학교 측에도 정당히 문의해서 내가 허락을 받아놨지. 에이라도 아마 리오드 쪽에서 손을 썼겠지. 어차피 졸업만을 앞둔 에이라 쪽은 별 문제가 없었던 것 같지만. 그것보다.”
은현이 주먹을 말아 쥐며 에린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아야! 아파!”
“집중해. 다시 마력이 흐트러지고 있잖아.”
“우으으, 훈련할 때만 너무 매정해….”
울상을 지은 에린이 툴툴거리며 중얼거렸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체내의 마력의 순환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솔직히 지금 시점에서 가장 급한 건, 네 몸속에 있는 그 구미호의 힘을 자연스레 이끌어내는 게 관건이야. 조금씩 몸속에 있는 마력을 끌어내어 방출시켜봐. 머릿속으로 떠오른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거야.”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
에린은 곧바로 서큐버스와 싸웠을 당시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의 머리 위에 생겨난 여우귀와 허리에 생겼던 은백색의 아홉 꼬리들.
그때 온 몸에 넘쳐흘렀던 자신의 상태를 떠올리며 그때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에린은 체내의 마력을 운용하는 심화 훈련을 거치고 있었다.
“으으으….”
집중도가 최상으로 올라가고, 몸 속에 있는 힘을 쥐어짜내며 끌어내는 에린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이윽고 자신의 머리 위에 형성된 남청색의 여우귀가 나타나자, 에린이 기쁜 듯이 방방 뛰며, 좋아하기 시작한다.
“돼, 됐다아!”
이윽고 자신의 허리에서 살랑살랑 거리는 은백색의 꼬리 하나를 보며, 에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 근데 이번엔 꼬리가 하나뿐이네?”
[그건 너의 수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앞으로도 아홉 꼬리들을 모두 발현할 수 있도록 정진하고 또 정진해라.]
“앗, 깜짝이야….”
머릿속으로 울리는 미호의 목소리에 에린이 어깨를 뜰썩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분이 말씀을 거셨나보네.”
은현에게는 미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오직 에린에게만 들렸지만, 에린의 반응을 보고 은현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응? 이 분을 알아?”
“조금.”
은현이 한차례 그녀의 몸에 빙의한 구미호와 싸운 전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에린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분이 직접적으로 너에게 말씀을 거셨다면, 아마 이 힘에 관해서는 그분에게 도움을 받는 게 나을 거야.”
“응, 알았어!”
계획에는 없었던 일이었지만, 갑작스레신수의 힘을 각성시킨 에린의 현재 상황은 자신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 애매한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기쁜 오산이기도 한 것이, 신수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만 있게 된다면, 그녀의 앞으로의 성장은 은현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더욱 커다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 열심히 해봐.”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흩트리자, 에린이 기운찬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은현은 다음으로 고개를 돌려 아직도 바닥에 깔려 있는 매트에 드러누워 있는 유리아에게 다가갔다.
“좀 어떻습니까? 괜찮아졌어요?”
“안 괜찮아, 이 개X식아….”
“일국의 왕녀답지 않는 거칠고 교양 없는 말투로군요. 이제는 반말까지?”
매트에 축 늘어져서 은현에게 거침없는 욕설을 내뱉은 유리아를 보며, 은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은현에게 쌓인 것이 너무 많았는지, 이제는 경어고 뭐고, 허울뿐인 예의는 집어치우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니가 나를 왕녀로 생각하고 대접을 한 적이 있기는 해? 사람이 말이야.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뭐? 마법 수업? 니 상식에는 군대에서 받는 엿 같은 PT체조가 마법 수업인가 보지?”
“쉿, 소리가 너무 큽니다. 가능하면 그것에 관한 얘기는 자제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으아앙. 내가 왜 이런 걸 받아야하는 거야. 도대체! 나는 마법사인데!”
어찌나 서러웠는지 이제는 울상을 지으며 통곡을 하기 시작한다.
옆에 붙어서 유리아를 간호하던 엘레노아는 은현과의 모의 전투로 피떡이 된 알렉스 일행의 상처를 돌보느라 여유가 없었기에, 유리아의 추태를 보고 있는 것은 은현 뿐이었다.
“마법사라도 체력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처럼 검이나 무기를 들고 싸우면서 마법을 쓰라는 것도 아니고, 기초 체력단련만은 왕녀님에게도 필요한 부분입니다. 생각보다 운동하고는 담을 쌓고 지내셨더군요.”
“내가 체력을 단련해야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어! 왕궁 안에서 교육 받을 때도 그딴 건 언급도 없었는데!”
“그거야 걔네들 방식이고요. 왕녀님은 저를 따라오셨으니, 제가 제시하는 방식에 토 달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으셨잖습니까.”
“…….”
할 말이 없어졌는지, 유리아가 가만히 은현을 노려보기만 한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죠.”
“뭐?”
“현재 왕궁 내부에서는 디아네 왕비의 세력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들은 디아네 왕비의 아들인 데미안을 왕세자로 옹립시키기 위해서, 두 번째 세자 후보인 헬레나 후비님의 아들이자, 왕녀님의 남동생이신 에반을 견제하기 위해 왕녀님과 에반 왕자를 헐뜯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죠. 그렇죠?”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왕녀님은 현재 자신을 지지해주는 세력 기반도 제대로 없는 상태이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왕녀님에게 위협이 다가오고 있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왕녀님을 지킬 수 있는 건, 왕녀님 혼자 뿐 이니까요.”
“아!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유리아가 빽소리를 질렀다.
“적어도 자기 목숨 정도는 스스로 간수할 수 있는 수준부터 되고나서, 불평을 하라는 소리입니다.”
“으…!”
허를 찔린 듯 유리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러니까,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잖아.”
“싸움에서 마법사가 신경을 써야하는 게 마법 뿐만은 아니죠. 왕녀님도 이번 원정을 겪으면서, 함께 군장을 매고 긴 시간의 행군을 겪으면서 느끼신 게 있지 않나요? 자신의 체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왕녀님이 왕궁 안에서만 교육을 받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다는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를 따라온 근본적인 이유는 그 왕궁 안에서 벗어나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서였지 않나요?”
이 나라의 왕녀라는 신분이 아니라, 헬레나 후비의 딸이자, 왕세자 후보인 남동생 에반의 누나로서가 아닌, ‘유리아페르니아스’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에.
“…….”
“왕녀님은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알렉스나 호위기사들이 언제나 왕녀님의 곁에 붙어서 당신을 보호해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기사들의 안전한 보호를 받으면서 마법을 펑펑 써대는 그런 허울 좋은 포지션 같은 건, 알렉스가 왕녀님을 호위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버지인 아브로스님이 헬레나 후비님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에 대해서 은현은 따로 언급하지 않고, 정치적인 입장만을 제시했다.
“왕가를 수호하는 근위기사단, 크라시르에서 베테랑이나 권력을 꽉 쥐고 있는 이들은 현재 모두 디아네 왕비의 파벌 쪽 사람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왕녀님에게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라고요. 언제 어디서나 호위 기사가 없는 상황을 상정하고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세요. 체력의 단련은 그 시작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정론에 유리아는 할 말을 잃었지만 머릿속으로 떠오른 한 사람의 존재를 입에 담았다.
“그럼…일리아나님은?”
마법사이면서, 운동은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를 예시로 언급하자, 은현의 얼굴이 단번에 찡그려졌다.
“걔는…솔직히 예외로 봐야 해요.”
“아까까지 펼쳤던 그 논리는 대체 뭐야. 그럼?”
“하…일리아나는 진짜 예외에요. 왜인 줄 아세요? 걔는요. 마차를 타면 반나절 거리에 있는 옆 마을에 직접 가는 것조차 귀찮아서 무지막지한 마력의 소비와 캐스팅의 긴 시간이 단점인 텔레포트를 독학으로 개량했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재능충인 귀차니즘 환자에요. 내가 그렇게운동 좀하라고 옆에서 얘기를 해도 말을 들어 쳐 먹지를 않는데, 결국 나도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요.”
“어, 음…그, 그래?”
갑작스레 속사포처럼 불평을 늘어놓는 은현의 태도에 도리어 유리아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애매한 대꾸를 해주었다.
이내 유리아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 그래도…일리아나님은 훌륭한 고위 자릿수 마법사이시잖아?”
“그러면 뭐합니까. 종체 사람 말을 들어먹지를 않는데. 몸은 극도로 움직이기 싫어하고, 진짜어떻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고집만 늘어서….”
“그래?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네?”
“…….”
귓가에 맴도는 서늘한 목소리에 은현의 얼굴이 딱딱해져간다.
“어…왔어? 몸은? 아직 아프지 않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녀의 상태를 묻자 일리아나는 아직도 몸이 쾌차하지 않았는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쑤시긴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야. 그것보다, 흥미로운 얘기를 하고 있던데?”
“어, 아니, 그게 말이야….”
“괜찮아. 원래 지금까지 안했던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니거든?”
“뭐?”
“나도 이제는 운동이라는 걸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해야 할 이유가 생겼거든.”
“…….”
천천히 은현의 앞으로 다가온 일리아나가 은현의 멱살을 붙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 들어온 은현의 귓가에 일리아나가 입을 가까이 댔고, 은현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개월만 기다려. 어젯밤의 일은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잊어버릴 수 없는 수치를 안겨주었던 은현을 잔뜩 노려본 일리아나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다.
멱살을 쥔 손에 힘을 풀고 은현을 놓아주고는 유리아에게로 향하는 일리아나를 은현이 멍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자, 수업을 시작해야지?”
“저, 정말이었나요? 날 속인 건 줄알았는데…정말로 일리아나님이 제 마법 수업을?!”
“난 왕족의 딸이라고 안 봐줘.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하, 할게요! 하게 해주세요! 으으윽!”
기쁜 마음에 당장 몸을 일으킨 유리아가 욱신거리는 통증에 신음을 내뱉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을 응시한 은현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마지막은 에이라 뿐이네?”
“자, 잘 부탁드립니다!”
에이라가 긴장한 목소리로 은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솔직히, 나는 네 실력을 정확히 몰라. 일단 간단하게 대련을 해보자.”
“대, 대련이라 말씀하시면….”
창백해진 안색으로 알렉스 쪽을 바라보는 에이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은현이 피식 웃었다.
“저렇게 심하게 몰아붙이진 않을 거야. 일단 나는 막기만 할 거니까. 사정없이 공격해봐.”
에이라에게 목검을 가볍게 던져주자, 그녀가 목검을 받아들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
까앙!
두 개의 목검이 서로 교차되며, 은현은 에이라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그녀의 수준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녀와 목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은현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까아앙!
“꺄악!”
힘을 주며 에이라의 공격을 튕겨내자 목검을 비롯해, 그녀의 몸통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으으, 아파라….”
바닥에 떨어지면서 엉덩이를 찧은 에이라가 통증에 인상을 살짝 썼다.
“빠른 속검(速劍)을 쓰는구나. 흐음, 이 검을 리오드가 가르쳤을 리는 없고…. 혹시 날 따라한 거니?”
정확한 은현의 분석에에이라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마, 맞아요.”
“언제부터?”
“그…이전에 흑마법사와 싸울 때의 은현님의 모습을 눈으로 새겼던 적이 있어서….”
“아하.”
은현은 기억이 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의 실종에 대해 조사하던 도중, 에이라와 함께 폐창고에서 엘빈을 맞이했던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은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목검을 다시 에이라에게 겨눈다.
“재밌네. 그때 내 움직임을 본 것만으로. 속도는확실히 빠르지만, 너무 빠르다고 좋은 건 아니야. 힘이 제대로 실려 있지 않잖아. 가볍기만 한 공격은 아까처럼 검 째로 튕겨나가기 십상이니까.”
“네….”
은현의 지적에 에이라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목검 들어. 몇 번 다시 합을 맞춰보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