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096. 새로운 집은 던전(1)
“빨리 끝났네.”
“응, 뭐, 그렇게 안 힘들더라.”
“흐응.”
은현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말하긴 했지만, 그런 은현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일리아나는 코웃음을 쳤다.
“다른 사람들 반응을 보니까 또 현이, 네가 뭔 짓을 한건 아니고?”
“이번 계획은 시간이 금이니까,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을 뿐이야.”
“흐응.”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유리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대화에 난입하여 은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마녀님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신 거죠?”
이곳은 엄연히 던전의 내부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갑자기 은현이 바닥에 설치한 물건의 위에서 일리아나가 전이되어 등장을 하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깜짝놀랄 수밖에없었다.
“이곳은 던전 안이라 아무리 고위 자릿수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텔레포트 마법을 통해서 이곳에 오는 것은 불가능해요.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예요?”
“수작이라니, 듣기에 너무 슬픈 표현입니다만.”
“솔직히 나도 이게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은현은 쓰게 웃었고, 일리아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둘의 반응을 본 유리아는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상황을 아직 제대로 모르는 에린은 급작스럽게 은현을 추궁하는 유리아가 당황스럽기만 했지만 이 세계의 상식을 잘 알고 있는 크라시르 단원들이나 유리아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세상에는 기본적인 상식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이곳 세상에서 대륙과 던전은 서로가 독립된 공간이며 서로의 공간에 간섭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던전 입구로 전이해서 이던전으로 입장을 한 거라면 모를까, 이렇게 이 장소를 직접 지정하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건 말도 안 된다고요. 이건 마법학계에서도 결론이 난 주제인데, 마녀님은 도대체 어떤 마법으로 던전 내부에간섭을 할 수 있었던 거죠?”
“그건 제가 이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이 던전 내부에서 간섭을 했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의 간섭을 차단할 수는 있어도 내부에서 간섭을 하는 것은 가능하니까요. 내부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던전은 마법사들에게 천적이나 다름 없는 장소겠죠.”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간섭을…?”
“알렉스, 이전에 에린과 함께 서큐버스의 마법으로 ‘꿈의 세계’에 갔다 왔던 걸 기억해?”
“그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거기서 일리아나가 어떻게 ‘꿈의 세계’에 갔는지도?”
“…그렇군. 통로를 직접 개설했다는 건가?”
알렉스는 마법 지식에 대해서는 전무했지만, 그때 당시의 일리아나가 어떻게 ‘꿈의 세계’에 침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떠올리고는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통로…?”
“알렉스는 에린과 함께, 이전 귀족 연쇄 습격 사건의 범인이었던 서큐버스에 의해서 ‘꿈에 세계’라는 서큐버스들 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고유 공간’안에 정신체가 갇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조용히 은현의 말을 숨죽여 들었다.
“그곳은오로지 정신체들만이 입장할 수 있으며, 살아있는 육신의 몸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세계였지만, 엄연히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단지 이 세계가아닌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공간일 뿐이죠. 왕녀님, 혹시 이 설명을 듣고 비슷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나요?”
엄연히 현실 속에 존재하지만,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
“…던전이군요.”
“정답입니다. 일리아나는 이전에 에린과 알렉스의 정신체가 납치당한 경로를 추적해서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했고 강제적으로 자신의 정신체를 그 통로 속으로 밀어 넣어 ‘꿈의 세계’에 침입했던 전적이 있었습니다.”
알렉스는 그때 당시, 혼란스러워 하며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서큐버스에게 자신이 침입해온 것이 뭐가 대단한 일이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던 일리아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능하냐고 묻고 싶지만…. 실제로 알렉스와 저 아이가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정말로 가능했던 일이었겠군요.”
정말로 인외의 존재, 그런 존재를 바라보는 듯 사람들의 시선이었지만, 그 시선 속에는 대단함을 넘어선 경외와 동경의 감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이 던전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통로를 이용했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하지만 아쉽게도 던전에는 서큐버스가 꿈의 세계로 향하는 통로를 만들 수 있었던 것처럼, 던전으로 향하는 통로를 만들어줄 존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게 이 아티팩트죠.”
은현이 바닥에 설치된 아티팩트에 마력을 흘려 넣자, 아티팩트에서 방출된 마력이 새하얗고 거대한 문을 만들어냈다.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열어젖히자, 안에 보이는 익숙한 광경에 에린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여기는 일리아나님의 집 거실이잖아!”
주택의 거실의 풍경에 유리아는 기가 찬다는 시선으로은현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아티팩트를 각자의 장소에 설치하고 활성화시키면, 장소와 차원을 넘어서는 통로가 연결된 문이 만들어지는 거죠. 지금까지 이런 식의 마법이 없어서, 저와 일리아나는 이 아티팩트에 ‘게이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
너무 어이가 없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가 않는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은현은 제대로 자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당신, 지금자기가 뭘 만들었는지 알기나 해요? 이건…마법학계에 보고해야 하는 사안이에요. 여기서 이런 식으로 밝혀도 될 만한 사실이 아니라고요. 안 되겠어요. 당장 왕국으로 가서….”
“안 됩니다.”
“뭐라고요?”
“학계에 이 이론과 아티팩트를 공개하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요? 이걸 발표하기만 한다면, 당신에게는 엄청난 명예와 부가….”
“제가 만약 던전 안에 이걸 설치하고, 또 다른 하나는 페르닌의 어딘가에 설치한 다음 활성화시킨다면 페르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던전과 도시 내부를 연결하는 직통 경로가 생긴다면, 페르닌 내부에 마수들이 들끓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은현과 일리아나가 개발한 ‘워프 게이트’라는 아티팩트는 지금까지의 이론을 뒤집는획기적인 물건이었지만, 너무나도 손쉽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나라의 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무서운 아티팩트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던전을 예로 들었지만,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이건 정말로 위험한 도구에요.”
만약 전쟁 중인 국가들 간에 게이트를 설치하여 누구도 모르고 빠르게 군사들을 보낸다면, 나라를 함락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아티팩트는 지금 나오게 된다면 악용되어 쓰일 수 있는 상황이 더더욱 많다.
대표적인 예로, 지구에서 다이너마이트가 철로를 완공하기 위해 산을 폭파시키고, 저수지를 만들 공간을 마련하는 등에 쓰였던 물건이었지만, 이후에는 전쟁을 통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도구로까지 활용된 전적이 있다.
“도구에는 죄가 없죠. 쓰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결과가 바뀔 뿐입니다.”
“…….”
“저는 이걸 세상에 공개할 생각이 없습니다. 애초에 제가 이용하려고 만든 거니까요.”
“그런데 우리한테 얘기하는 이유가 뭔가요.”
“뭐, 애초에 저와 일리아나가 아니면 재현해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기도 하고요. 왕녀님과 기사님들이 이 사실을 발설해주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좋던 싫던 저희는 ‘공생관계’이지 않습니까?”
“…….”
은현과 아브로스가 모종의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듯이, 은현과 유리아 또한 신분, 목적 등이 모두 달랐지만 두 사람 다 지구와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존재했다.
“후우, 좋아요. 기술에 대한 설명과당신의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여러분들도 아시겠죠?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물론입니다.”
“다, 당연하죠.”
알렉스와 엘레노아는 아브로스의 자식이며 공작가의 사람으로써 은현과 이번 일을 계획한 주동자 측의 사람이었기에 비밀의 엄수를 재차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은현의 지인인 리오드의 딸인 에이라 또한 마찬가지.
메르딘과 아이샤에게 확인을 받자, 유리아는 다시 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뭘 하면 되죠? 지금 우리들 보러 당신들의 집을 짓는데, 노동력을 보태라는 얘기는 아니겠죠. 설마?”
“설마요. 얼마나 귀하신 분들인데, 이런 하찮은 일에 힘을 쓰도록 하겠습니까. 집을 짓는 건 저와 일리아나 만으로 충분합니다.”
“당신과 마녀님 둘이서…?”
“이봐, 관리자. 나와.”
[명령을 수락합니다.]
치이익
“뭐, 뭐야?!”
‘시련의 궁’으로 입장하는 거대한 백은색의 문 오른쪽에 놓여있던 검은색 관 속이 새하얀 수증기를 내뿜더니, 안에서 작은 소녀가 몸을 일으키며 등장했다.
깜짝 놀라며 그 모습을 자세히 살펴본 유리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또 인형?”
“이곳의 주인이었던 아르키스도 인형이었습니다. 그녀가 만들어낸 피조물들인데, 당연히 인형일 수밖에 없죠.”
이 던전 안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마수 아니면 인형들뿐이다.
아르키스와는 다른 디자인이었지만, 새까만 색조로 치장된 고딕 드레스를 입은인형이 미궁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은현에게 사뿐사뿐 걸어왔다.
최심부의 곳곳에 설치된 마법등의 조명을 받아 더욱 밝게 빛나는 은발의 머리카락이 더욱 돋보인다.
땋은 머리를 아래로 흘러내리도록 하지 않고, 업스타일로 묶어 올린 인형의헤어스타일은 마치 미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의 예술품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마스터의앞에 도착했습니다. 명령의 완수를 알립니다.”
그렇게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인형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맑은 음색을 만들어냈지만 말투자체는 굉장히 딱딱하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르키스가 따로 남긴 유언은 없었나?”
“전대 마스터의 유언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 던전은 내가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겠지?”
“그렇습니다.”
“좋아. 네 이름은?”
“본 개체의개체명은 에밀리아. 에밀리아입니다.”
“길어. 여성형 개체니까. 리아로 하자.”
“명령을 수락, 본 개체의 개체명을 ‘에밀리아’와 ‘리아’가 중복으로 적용되도록 수정합니다.”
“미궁 안에서의 네 역할은 뭐였지?”
“인간 이외의 부정한 존재가 시련의 궁으로 입장하는 것을 막는 것, 이외에 함정의 설치 및 수복을 포함한 미궁의 전반적인 관리입니다.”
“아! 그 악질적인 함정들은 바로 네 짓이었구나!”
자칫 잘못하면 머리위로 작살이 떨어지거나, 일정 공간을 빙결 마법으로 뒤덮어 공간 전체를 얼려버리거나, 독안개를 풀거나, 바닥이 꺼지는 등.
던전 안에 입장하면서 악질적인 그 함정들이 기동하지 않도록,수십 개의 함정들을 해체하는 것에 갖은 고생을 다했던 아이샤가 분개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샤의 급발진을 눈치 채고 곧장 그녀의 행동을 제지한 것은 알렉스였다.
“선배! 이것 좀 놔줘요! 저 꼬마, 한 대만 때리게 해주세요. 제발 한 대만!”
“진정해.”
은현은 그런 아이샤와 알렉스의 행동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리아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네 개인의 전투력은 어떻지?”
“본 개체, 리아의 전투력은 계산 결과, 약 5만8천 정도로 추정됩니다.”
“뭐야, 그 수치는.”
뜬금없는 숫자에 일리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본 개체의 전투력 측정은 대상의 마나 보유량, 신체의 스펙을 바탕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니까, 그저 나를 본 것만으로 내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 수 있다는 거니?”
“새로운 인물의 질문에 본 개체는 그렇다고 긍정합니다.”
“말투는 좀 그렇지만, 분석 능력 자체는 대단하네. 그럼 네 분석으로 내 힘은 어느 정도인지 측정할 수 있니?”
“…뭐야. 스카우터야?”
“…왕녀님. 소싯적에 만화 좀 보셨나 봐요?”
“그, 그런데 왜요! 뭐, 불만 있어요?!”
“아뇨. 저도 좋아했습니다. 손오공.”
“…씨이.”
어딘가 비웃는 것 같은 은현의 말투에 유리아가 발끈했지만, 은현은 정말로 마음 편히 지구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것이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일리아나의 질문을 시작으로 파티원들의 들은 에밀리아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주시했다.
“새로운 인물을 확인. 분석을 시작합니다. 마력 보유 측정치 규격외의 대상임을 감지. 추정치, 7만 7천.”
“하! 뭐야! 저 인형! 마녀님보다 약하잖아?!”
던전의 함정을 설치하고 관리했다는 것이 에밀리아라는 사실을 안 아이샤가 잔뜩 비아냥대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말을 들은 에밀리아가 고개를 홱 돌려 아이샤를 바라보며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본 개체를 조롱한 새로운 인물을 분석. 추정치, 8천. 본 개체에게 한 주먹거리도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합니다.”
“뭐? 니가 날 알아? 지금 당장 붙어보자고! 그럼!”
“아이샤! 진정해라!”
잔뜩 흥분한 아이샤를 메르딘이 제지시키자 원정대 사이에 재미있다는 듯 웃음꽃이 피었다.
“아오오오!”
사람도 아닌, 인형에게 무시를 받았던 것이 분통이라도 터지는 듯 아이샤가 큰 목소리로 노성을 내질렀다.
“이 녀석을 데리고 위의 계층에 남아있는 마수들을 사냥해보세요. 개체수도 얼마 남지 않아 사냥하는데 아마 무리는 없을 겁니다. 정말로 위험한 마수들이 나타난다면, 리아, 네가 나서서 처리해.”
“명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 개체가 마수들을 처리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나서지 말고 지켜보다가, 누군가가 위험에 빠지면 그때 도와줘.”
“……명령을 수락합니다.”
무언가 석연찮은 표정이었지만 에밀리아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은현은 유리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마수들 잡고 해체해서 식량 구해오세요.”
“…….”
집을 짓는데 막노동을 시키는 대우를 피했더니, 이번엔 밥을 구해오라는 대우를 해오는 은현을 노려보며 유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위의 계층으로 이동을 하던 도중, 에린이 궁금한 표정으로 에밀리아를 불렀다.
“저기, 인형님?”
“본 개체를 에밀리아라고 불러줄 것을 요구합니다.”
“에밀리아님. 혹시 아까 전투력 측정이요. 현이도 해봤어요?”
“긍정합니다.”
“어…. 며, 몇이었나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에린이 은현의 전투력을 묻자,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며 에밀리아의 답변을 기다렸다.
“마스터의 전투력은…‘측정 불가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