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091. 정식 원정 출정(1)
원정대의 편성이 끝나고, 은현의 원정 계획 준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유리아 왕녀는 정말로 헬레나 후비를 포함한 왕가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은현의 원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에는 알렉스가 큰 기여를 했는데, 공식적으로는 새로운 소공작으로 임명을 받은 이후, 후계자 수업의 일환으로써 근처의 던전을 탐색하고 답파하는 원정을 계획하고, 왕가에 알리는 것으로써 은현의 원정은 공식적으로는 ‘아르미타스 공작가’에서 주도하는 원정으로 발표가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크라시르의 근위기사였을 시절, 자신이 호위했던 대상인 유리아 왕녀에게 원정대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고 흔쾌히 이것을 유리아가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는 진행되었다.
왕가의 입장에서도 다름 아닌 공작가문의 권유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유리아 왕녀는 다른 적대파벌인 디아네 왕비 일파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공작가의 원정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간략한 출정식을 마치고, 공식적으론 알렉스의, 비공식적으로는 은현의 원정대가 출정을 앞두고 있는 순간이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화장품을 챙깁니까. 당장 빼세요.”
“아, 쫌! 그냥 좀 넘어가요!”
은현이 출정하지 않고 불시에 원정대에 참가한 인원의 짐을 검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상 호위기사로서 동행 알렉스를 포함한 크라시르의 단원들은 원정 경험이 어느정도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다지 걱정이 되지도 않았고, 에린의 경우에는 은현이 직접 짐을 싸주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유리아 왕녀였다.
불길한 얼굴로 자신의 짐이 들은 배낭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유리아의 저항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은현은 유리아의 배낭을 빼앗았다.
곧장 필요 없는 물품들을 가차 없이 빼버리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지난 원정 때는 어떻게 간 거야?”
“그때는 왕녀님은 가출한 상태였다. 따로 짐을 꾸릴 여유도 없었어. 왕녀님과 함께 왕성을 나온 이후, 모험가 길드에 들러 최소한의 식량과 도구들을 구매하고 바로 수도를 떠났었지.”
“넌 이거 안 말리고 도대체 뭐했냐?”
아무리 철없는 왕녀라고 할지라도, 이것만큼은 알렉스가 관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면목이 없군….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변명이고, 강하게 제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쓰게 웃음을 짓는 알렉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여러모로 무리한 원정이었네. 정말로.”
“아아아! 미안했다고요! 진짜로! 정말로 생각 없이 행동에 나섰던 건 사과할 테니까! 당장 내 배낭 돌려줘요!”
“뭐야. 이건? 쿠키? 이런 걸 왜 들고 옵니까?”
“그, 그건…지난 번 원정 때 너무 굶었던 기억이 강해서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조난이나 다양한 비상사태를 대비하는 건 나쁘지 않은 방안이긴 하죠. 비상식을 챙기는 건 괜찮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죠? 그렇게 생각하죠?”
“하지만 이런 걸로는 영양은 택도 없습니다. 제대로 된 보존식을 지급해드릴 테니, 이건 빼겠습니다.”
“으아아아! 그냥 넘어가자고!”
이성을 잃은 듯 유리아가 울부짖었지만, 은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주위의 사람들은 기가 질린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와아, 왕녀님을 상대로도 얄짤없네….”
평소 유리아를 그렇게 좋은 인상으로 보지 않았던 아이샤조차도 뭔가 저 정도까지 꼼꼼하게 체크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싶은 심정으로 자신이 배낭에 뭘 넣었는지를 머릿속으로 체크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도 불시에 검문을 당해 저렇게 개쪽을 당한다면 자신의 멘탈은 버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정말로 괜찮은 건가? 이건 어디까지나 공작가의 원정이다. 너희까지 올 필요는 없….”
“선배! 어떻게 그렇게 서운한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나도 동감이다. 네가 가문을 잇게 되면서 크라시르를 그만두게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너를 도우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 게다가 우리도 유리아 왕녀님의 호위기사야. 왕녀님이 가시는 곳에 자원한 건 우리야. 결코 너를 돕기 위해서만 이 원정에 참가한 게 아니라고.”
“…고맙다.”
아이샤와 메르딘의 말에 알렉스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개인적으로는 저 은현이란 남자가 이 원정대에 끼어있다는 게 신경 쓰여서 참여한 것도 있지.”
“은현을?”
“이상하게 헬레나 후비님이나 왕녀님이 저 남자를 주시하는 것 같으니까, 왕가 내부에서도 은현이라는 남자가 대체 뭐하는 인간인지 알아보려는 자들이 생기고 있어. 게다가…저 남자는 그 마녀의 연인이잖아.”
“아, 재판장에서 그 기습키스는 저도 봤어요. 난 진짜로 엄청 놀랐다고요.”
페르니아스 귀족들 사이에서의 은현에 대한 취급은 현 상황에서 굉장히 미묘하다.
은현이라는 개인은 이 나라의 귀족도 백성도 아니고 일리아나와 마찬가지로 외국인의 신분이며, 그의 신원을 아는 인물이 몇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신도 배경도 행색도 굉장히 별 볼 일 없었던 은현을 무시하고 등한시하는 발언을 내뱉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마녀의 연인’ 또는 ‘마녀가 키우는 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면서 일리아나와 다리를 놓아달라는 수작을 걸어오려는 귀족들도 있었다.
심지어 아르미타스 공작가문과, 올리비온 후작, 보리스 후작 같은 나라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은현을 지지하며 옹호하려는 발언과 움직임을 보였던 것을 눈치 채고, 그의 가치를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한 이들까지 존재했다.
“그렇군.”
갑작스럽게 공개재판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낸 은현을 귀족들이나 왕가가 주시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도 궁금하거든, 도대체 뭐하는 작자인지.”
“흥미로운 남자인 것은 확실하지.”
“그래서? 이번 원정이 끝나면, 너는 완전히 크라시르를 나가는 거냐?”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군.”
“그러냐….”
메르딘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이 원정이 너와 함께하는 마지막 임무가 되겠군.”
“흐윽, 선배애…혹시 저도 공작가에서 받아주면 안 돼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어떻게 입단한 크라시르인데, 그만두기는 아깝지.”
“그치만요. 근위기사단 안에서 겨우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선배가 있어서였는데, 선배가 나가버리잖아요. 애초에 기사단 안에서도 자기들끼리 자리가지고 싸움박질 하고 분위기도 완전 개판인데, 완전 의욕 떨어진다구요. 명예는 무슨 얼어 죽을.”
“확실히, 이번 공개재판으로 크라시르 내에서도 분열이 심각하게 일어나긴 했지. 최근에 너는 가문의 일로 바쁜 것 같아 소식을 접하진 못한 것 같지만, 크라시르 안에서는 목격자의 제보만 믿고 죄 없는 사람을 투옥시켜 무차별 폭행을 가한 월터 단장의 이번 독단행동을 문제시하는 단원들도 많아.”
결과적으로 크라시르의 이미지는 깎이고 습격 사건의 범인은 아르티아 쪽에서 잡은 것으로 공표되어 아르티아의 위상은 올라갔다.
아르티아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월터 단장의 독단행동으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득은 취하지도 못하고 손해만 막심하게 입은 것을 구실로 월터 단장의 지휘능력을 문제제기하며 그를 끌어내리기 위한 크라시르 내부에서의 알력다툼이 심화된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은현을 직접 폭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두 기사는 징계처분을 받은 걸로 알렉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크라시르의 세 사람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동안, 검문이 끝난 은현은 배낭을 유리아에게 돌려주었다.
“당신은 악마야….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한테 그런 면박을 줄 수가….”
“시끄럽습니다. 어서 배낭 마차에 실으세요.”
표독스러운 눈으로 은현을 노려보면서 배당을 손에 쥐자마자 후다닥 거리를 벌리는 유리아를 뒤로하고 다음 차례인 에이라가 긴장한 표정으로 양팔에 꽉 쥐고 있던 배낭을 은현에게 넘겼다.
“여, 여기 있어요….”
“그래. 한 번 볼까?”
에이라에게서 배낭을 받아든 은현은 그녀의 배낭 속에 든 물건들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이건….”
“뭐, 뭔가 문제가 있나요?”
“아니, 그런 건….”
딱딱하게 굳은 은현의 표정을 보고 긴장한 에이라가 물었지만 그의 말대로 에이라의 배낭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너무 A급…FM인데……?”
그리고 배낭 속에 들어있던 작은 쪽지를 하나 발견하고는 은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꼼꼼한 네 녀석이 짐검사를 안할 리가 없겠지. 정말로 딱 필요한 것들만 넣었고 보존식이나 자잘한 것들은 넣지 않았다. 에이라한테 무거운 걸 들게 시키지 말고, 필요한 것들은 네가 꼭 붙어서 관리해줘라. 그럼 부탁한다.’
“왜 그러세요?”
“아니야.”
그렇게 걱정이 됐으면 차라리 아르티아에 입단시키고 직접 교육시킬 것이지, 뭐하러 굳이 단호하게 나갔다가 이 사달을 만들어냈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좋아. 에이라는 통과.”
“감사합니다!”
왕녀에게 망설임 없이 지적을 행했던 은현의 모습에 몸을 작게 떨었던 에이라는 아무런 지적도 받지 않고 은현의 검사를 통과했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기 그지없었다.
“자, 다음은 공녀님이군요?”
“그냥 넘어가면 안 되나요?”
“그럴 순 없죠.”
단호한 태도에 한숨을 내쉰 엘레노아는 은현에게 자신의 배낭을 넘겨주었다.
공작가문에서 편성한 원정에 몇 번 참여해본 티가 났는지, 엘레노아의 배낭이 그나마 가장 정상적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은현은 짐 검사를 마치고 마차에 올라탔다.
“우리의 것은 하지 않는 건가?”
“어라? 그러게요?”
“두 분이야, 기사단을 통해서 원정 경험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제가 두 분에게까지 간섭한다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만….”
왕녀와 공녀의 배낭 검사는 철저히 해내면서, 아래신분에 속하는 자신들은 방치하는 모양새가 메르딘과 아이샤에게는 복잡 미묘한 기분을 가지게 만들었다.
“자, 그럼 출발 할까요?”
인원은 총 8명으로 국가의 중심의 될 인물들인 왕가와 공작가, 후작가의 인물이 네 명이 아니더라도, 메르딘과 아이샤 또한 페르니아스 왕국 귀족가의 자제들이었다.
“와, 와아….”
어마어마한 멤버의 구성에서 유일하게 평민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에린은 자신만이 붕 뜬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눅 들지 마.”
“응.”
작게 에린을 격려해주고, 은현은 마차를 몰았다.
목적지인 아르키스 대미궁 던전 근처까지 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엘레노아를 동행하고서 걸음거리로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 더 걸리는, 페르닌에서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에, 마차로 이동함으로써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더더욱 단축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겠습니다.”
행군은 마차가 들어설 수 없는 숲길을 걸어가면서 시작되었다.
“왕녀님. 괜찮으시겠습니까? 행군이 많이 고될 겁니다.”
“괜찮아요. 미리 저 남자에게 다짐을 받고 참여한 원정이니까. 힘들다고 우는 소리는 하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같은 전생자라는 입장으로 착각하고 있는 유리아에게는 은현에게 묘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도록 하죠.”
짐도 많고 인원수가 많을수록 신경써야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은현은 무리하지 않고 숲에 터를 잡아 야영지를 설치했다.
아무리 기사들이나 숙련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파티원의 여덟 명중 원정에 익숙한 아이샤를 제외한다면, 네 명이 여성이라는 점이나, 원정을 처음 나가보는 에린이나 에이라를 배려할 수밖에 없는 원정이었기에, 은현은 굳이 무리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야영지에 텐트를 설치하고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노을 아래에서 은현은 큼지막하게 썬 양고기를 듬뿍 담은 스프를 만들었다.
“아…좋다아….”
간이 배어든 양고기 스프를 먹은 에린의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지며 자리에 앉아 있자, 다른 이들도 그녀를 따라 은현에게서 스프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현아. 우리 이렇게 멋대로 수도를 나와도 되는 거야?”
“응? 걱정거리가 있는 거야?”
“아니, 그게…너랑 나는 일단은 감옥에 투옥도 됐던 전적이 있잖아. 그리고 너는 그…재판을 받았던 몸이기도 하고.”
오해를 받았다고는 하나, 범죄자신분 이였던 자신과 은현이 이렇게 마음대로 국외로 나가도 상관이 없는 것일까?
게다가 에린은 은현이 공개재판장에서 터뜨렸던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도 안에는 아직도 또 다른 악마가 숨어 있는 거잖아? 그 악마들은 내버려둬도 괜찮은 거야?”
“아아, 그 얘기구나.”
에린이 서두를 던지자, 다른 이들도 모두 은현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번 악마 사건은 나라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민감한 화제였기에, 은현이 던진 ‘수도 안에 잠입한 또 다른 악마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모닥불을 중심으로 조용한 침묵이 일기 시작했다.
이윽고 은현이 입을 열었다.
“그거, 거짓말이거든.”
“…뭐라고요?”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유리아 왕녀였다.
눈썹을 찌푸리며 반문하는 그녀를 시작으로 메르딘이나 아이샤도 또한,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을 지었고, 에린과 에이라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이 계획에 비밀리에 동참했던 공작가 사람 쪽이었던 알렉스와 엘레노아만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기에 담담이 양고기 스프를 먹고 있다.
유리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전혀 동요하지 않는 아르미타스 남매 쪽이 더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기에 인상을 찡그리며 재차 은현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들은 거 아니죠? 그러니까…수도 안에 악마가 잠입해있다는 게…거짓말이었다고요?”
“네. 그런데요.”
“이, 이봐요! 어디 나라의 모든 귀족들이 모여 있는 것은 물론이고 왕족의 앞에서 어떻게 거짓말을 늘어놓고도 뻔뻔하게 있을 수가 있어요?!”
“살려달라고 빌면 뭐합니까. 안 살려줄 게 뻔한데. 그러면 날 살려주도록 상황을 만들어야죠. 안 그래요?”
뻔뻔스럽게 짝이 없게 미소 짓는 은현의 얼굴을 보고 유리아는 어이를 상실한 표정을 지었다.
‘하…이 인간 이거 완전 구라꾼 아니야?!’
허세도 적당히 쳐야지, 까딱 잘못하면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 판국에서 잘도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고 유리아는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수은의 뱀’, 누가 지었는지 정말 잘 어울리는 이명이 아닌가.
‘은색 독을 품은 뱀’이라는 말답게, 정말 말 하나만으로 그때 당시에 위기를 모면했던 은현의 입 속에는 정말로 뱀의 혀라도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