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088. 미궁 원정 편성(3)
에린은 당황했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느닷없이 자신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경계를 하는지, 걱정되어 그녀의 몸을 만지려는 에린의 손길도 뿌리치는 행동이 에린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이테르에서 많은 학생들의 경멸과 비웃음이 담긴 시선들을받아보았던 에린이었지만, 자신을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자연스레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저기,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었나요? 왜 그러시는 지….”
“아니, 아무것도…. 내가 잠시 착각을 했나봐.”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리아는 복잡한 얼굴을 지우지 못하고 문득 주위를 둘러보며 지하시설의 내부를 살폈다.
지하에 조성된 환경이 너무나도 쾌적하고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왕성 안의 지하시설을 자욱한 먼지나 탁한 공기가 가득해, 일반 사람들에게는 숨을 쉬는 것도 매우 거북하기 마련인데, 이곳은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뭐야, 여긴?”
밀폐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쾌적한 바람이 계속 흘러들어온다.
탁하거나 먼지 따위는 보이지 않는 맑은 공기와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는 마법등들, 그리고 도저히 지하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넓은 공간, 그리고 여기저기에 배치된 수많은 운동기구들은 유리아의 전생인 지구의 기억 속에서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헬스장?”
유리아는 지구의 시설과 비슷한 장소를 조성해둔 것을 보고, 은현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떠올렸다.
이 지하시설을 만든 것이 은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지구의 지식으로 이런 데를 만들어 놓고 있었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지하의 천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건축 자재들을 들여와 지하 시설을 만드는 것에는 개인의 힘으로는 엄연히 한계가 있다.
심지어 이 넓은 공간을 다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자재들과 저 운동기구들을 좁디좁은 계단을 통해서 모두 들여왔다는 것 또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마법이나 외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재능낭비 같은 느낌이 너무 나는데….”
“저, 그런데 실례지만, 성함을 여쭤 봐도 될까요?”
“아, 나는….”
그러고 보니, 유리아는 아직도 자신이 자기소개를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리아 페르니아스야.”
“페르…니아스?”
이 나라의 이름을 성으로 사용하는 이들이라면 왕족 밖에 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간다.
“죄, 죄송합니다! 왕녀 저하!”
“아니, 그러지마. 다짜고짜 무례를 저지른 건 나이기도 하니까.”
에린의 손길을 뿌리친 것에 머쓱한 기분을 느낀 유리아는 황급하게 무릎을 꿇으며 사죄를 하려는 에린의 행동을 제지했다.
이전 감옥에서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러 사건들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던 에린은 유리아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녀님이 일리아나님의 저택에는 무슨 일로…. 일리아나님은 지금 집에 계시지 않는데요?”
“아니, 마녀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 그 남자를 만나러 온 거라.”
“그 남자…? 혀, 현이요?”
유리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린도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현이랑 왕녀님이 무슨 관계가 있지? 아는 사이인가…?’
에린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
애초에 이 나라의 기사단장과 친구사이이고,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자릿수 마법사와 친구라고 하기엔 뭐한 미묘한 사이이기도 하다.
이제는 아르미타스 공작가와 안면을 트고 알렉스와는 친숙한 관계이며, 엘레노아와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를 놀려먹는 관계이기까지.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공개적인 사실이지만, 에린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이미 어마어마한 인맥들을 가지고 있는데, 왕녀와 아는 사이라고 해도 에린은 별로 놀랍지 않게 된 것에 자신, 스스로도 신기하다는 감상을 품었다.
그런 생각을하면서 에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지하훈련장을 관찰하는 유리아의 얼굴을 관찰했다.
‘진짜 예쁘다….’
같은 여자가 봐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외모나, 전속 시녀의 정성스러운 빗질로 관리를 받고 있는 기다란 밝은 하늘색의 머리카락이 에린의 시선을 빼앗았다.
입고 있는 옷이나 액세서리들은 왕국의 많은 귀족들에게서 진상된 고가의 물품들이며, 평민이나 다름없는 에린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고가의 물품들을 멍하니 본 에린은 유리아가 은현을 찾아온 용무가 도대체 무엇일지 생각했다.
“그런데 현이한테는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그 남자가 내 걸 뺏어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려고 왔어.”
“네…?”
영문을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 유리아의말에 에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유리아가 말하는 은현과 자신의 머릿속의 은현이 동일인물인지 착각할 정도로, 그녀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에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현이는 남의 걸 빼앗고 불합리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닌데요?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닌가요?”
“…네가 그렇게 그 남자에 대해서 잘 알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현이가 불합리하게 남의 물건을 빼앗고 폭거를 저지르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은 유리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자신 쪽이라는 것을 그녀 또한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기도 했다.
“넌 그 남자를 정말로 믿고 있는 것 같네.”
“네? 그럼요.”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하는 에린의 반응에 유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네?”
“왜 그렇게 그 남자를 믿냐고. 너랑 아무런 연관도 없었는데, 이렇게 재워주고, 먹여주고, 훈련시켜주는 게 뭔가 목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으, 으음….”
에린은 고민이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에린은 은현이 자신에게 이렇게 베풀어주는 것이 죽어버린 자신의 오빠인 엘빈과의 약속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이외의 여신과 은현, 그리고 이 세계의 미래라는 큰 운명의 흐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에린이 은현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것은 확실히 제 3자의 시선에서는 의아한 부분이 있기도 했다.
“그냥요.”
“그냥?”
“그냥 현이니까요.”
“…….”
애매모호한 대답에 유리아의 미간이 좁혀져갔다.
“확실히 현이는 지금 저한테 많은 신경을 써주고 있잖아요. 하지만 그 이유와 의도를 의심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으음, 아니, 의심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건이 끝나고, 긴 잠을 자고 있었던 에린에게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오빠인 엘빈뿐이었다.
하지만 엘빈이 죽고 나서는 에린은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혼자만 남아 고립되어버리고 아무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고 배척받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다가와준 것이 은현이다.
유일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고, 자신에게 길을 제시해주겠다는 은현의 말을 어떻게 의심할 수가 있을까.
에린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미소 짓는 에린의 말을 들은 유리아는 더는 묻는 것을 포기했다.
은현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무한히 보내고 있는 에린에게 있어서 은현이라는 남자는 자신을구원한 은인이자, 걸어가야 할 길을 만들어주는 인도자였다.
은현에게서 엘빈과 에린에 대한 진실을 듣고, 많은 생각에 잠겼지만 원작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지금의 에린 헤르샤를 제대로 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새삼 ‘운명의 메르헨’이라는 카테고리를 떼어놓고,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17살짜리 소녀인 에린을 본다면, 이렇게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주고 있는 은현의 정성이 더 대단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대단하네….”
“그렇죠? 현이는 정말 대단해요.”
유리아는 복수심에 불타지 않고 올바르게 성장해주고 있는 에린에 대해 찬사를 보낸 것이었지만, 그것을 잘못 알아들은 에린은 그녀가 은현을 칭찬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소녀의 머릿속에 은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아가 도리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었네.”
갑작스레 계단 위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대화를 나누던 두 여자가 출구 쪽을 응시했다.
“아, 현아!”
은현의 얼굴을 알아본 에린이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며 종종걸음으로 은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은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활짝 웃으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에린의 이마를 검지로 밀어냈다.
“으엑!”
속절없이 에린의 몸이 뒤로 밀려나더니 은현의 행동에 에린이 울상을 지었다.
“뭐하는 거야. 아직 훈련시간 안 끝났어.”
“어? 날 보러 온 거 아니었어?”
“이분을 찾고 있었거든. 혹시 통성명은 서로 했어?”
“응. 그게…왕녀님…이시라면서?”
“맞아.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족이신 유리아 페르니아스님이셔.”
“왕녀님은널 찾아오셨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이야?”
“조만간 원정을 나갈 거야.”
“응…?”
“거기엔 너랑 에이라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조만간 준비해.”
“어…원정? 그게 뭔데?”
“먼 곳으로 나간다는 뜻이야. 그 전까지 네 실력도 최대한 올려둘 생각이니까. 평소보다 훈련 좀 더 많이 할 거야.”
“으윽, 지금보다 더라니…. 알았어….”
은현의 말에 에린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훈련장의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아직 승낙한 적도 없는데요?”
은현은 흘끗 유리아를 보더니, 이내 알렉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네 제안이었으니까, 네가 설득해.”
“그러지.”
쓰게 웃으며 알렉스가 대답하자, 정말로 자신의 의견도 없이 멋대로 일이 진행 됐다는 것에 유리아가 성을 내기 시작했다.
“이봐요! 정말로 이럴 거예요? 어떻게 당사자인 내 상의도 없이….”
“전 원래 반대하는 쪽이었습니다.”
“…….”
“왜인지는 왕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시점에서 당신과 에린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유리아의 마음속에 에린이 ‘사람과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미치광이’라는 인식이 고정되어 박혀있는 한, 그녀에게 에린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제는 이미 한 번 대화를 해본 유리아에게는 그것이 크게 거리낄 게 없어졌기도 했다.
“확실히,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꽤 달랐죠.”
은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의 에린의 표정은 굉장히 생기가 넘쳤고, 은현을 우러러보고 있기 까지 했다.
순수하기만 한 소녀가 도대체 어째서그렇게까지 잔인한 일을벌이는 여자로 바뀌는 것일까, 의아할정도다.
“궁금하지 않나요?”
“뭐가요.”
“저 아이가 최종적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
유리아는 말없이 훈련에 집중하고 있는 에린을 응시했다.
은현이 말하는 선택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유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에린의 집안을 그렇게 만들었던 원흉인 애슈턴은 이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고 평생 침대의 신세를 져야하는 것으로 대가를 치렀다.
애슈턴의 집안인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은 언젠가 에린이 엘빈의 누명을 벗기는 것을 물심양면으로 돕기로 약속했다.
사실상 에린의 숙원사업이나 다름없는 엘빈의 명예를 되찾는 것은 이미 절반은 달성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앞길이 순탄할 예정이라는 것 또한 아니다.
그 길을 과연 저 소녀는 힘든 일이 기다리는 앞길을 모두 걷고 이야기의 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유리아에게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이 세계는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구나.’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도 그 원작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정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뒤늦게 자각한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신의 원정, 나도 데려가줘요.”
“헬레나 후비님과 왕가의 인물들, 설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얘기를먼저 꺼낸 건 내가 아니라, 알렉스에요. 그러니까 어머니와 디아네 왕비 양쪽을 설득시킬 대안도 준비 해뒀겠죠. 알렉스?”
“물론입니다.”
“좋아요. 까짓 거 해보자고.”
은현과 알렉스가 이번 원정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유리아는 정확하게 들은 바가 없었다.
단지 아르키스 대미궁을 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미궁의 재보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으로 이곳을 달려왔다.
하지만 유리아는 은현의 원정에 참가하여 그의 계획에 발을 들이미는 것이, 속박되어 자유를 제한 당한 이 나라의 왕가의 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찬스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은현이라는 남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유리아는 결심했다.
“어디로 가는 버스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 탑승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