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087. 미궁 원정 편성(2)
“너는 왕녀님의 목적을 알고 있나?”
“정략결혼으로 팔려나가는 걸 포함해서 타인의 의사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힘을 성장시키고 싶다고 말했었지.”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씀하셨군….”
알렉스의 표정이 복잡해져갔다.
유리아가 전혀 연관이 없었던 타인에게 그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알렉스에게는 그것이 서운했다.
그런 그의 표정의 변화를 눈치 챈 은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너, 설마…?”
“어차피 너에게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어. 나는 왕녀님을 도와주고 싶다. 그래서 너의 힘을 빌리고 싶은 거다.”
“…….”
은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알렉스를 바라만 보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은현 쪽이었다.
“네가 사적인 감정으로 그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애슈턴과는 달리, 이성적이고 냉철한 면모는 자기 아버지인 아브로스를 쏙 빼닮았다는 게 은현이 생각했던 알렉스의 첫인상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부탁을 해오는 것이 은현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의외였다.
“이런 선택과 부탁을 내릴수 있게 된 것에 굉장히 의외스럽기 짝이 없군.”
알렉스는 은현의 말에 대꾸하며 자기 스스로도 웃긴 듯,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뭐 네 마음까지 뭐라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녀를 원정에 포함시키고 싶다는 네 사적인 이유는 잘 들었고, 그러면 공적인 이유를 말해봐.”
[그래도 아이는 저 아이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지 않느냐?]
‘아무리 그래도 저 자식의 본심만 듣고 어떻게 부탁을 들어줘요. 저도 정당한 명문이 있어야, 왕녀를 설득하고 데리고 가던가 하죠.’
이것은 유리아를 설득하기 위해서 은현과 알렉스가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말을 맞춰나가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싫어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부탁을 들어주기 위한 과정이라는 뜻인 것이냐?]
‘뭐, 그런 거죠.’
[이런 게 그 츤데레라는 것이냐?]
뭔가 다른데, 아니 그것보다
‘여신님, 그거 대체 누구한테서 들은 거예요?’
[누구긴, 아이의 기억 속에 있는 단어를 말해본 것뿐이다.]
‘…….’
큰일이었다.
점점 은현과 베르단디 사이에 경계가 엷어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 비밀이 없어져가고 있었다.
[무슨 그런 서운한 생각을 하는 것이냐. 이제 나와 아이는 영원을 함께하는 사이가 아니더냐. 우리 사이에 비밀 같은 거는 만들어서는 안 된단다.]
‘이건 불공평해요. 저는 여신님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잖아요.’
[아, 아이야. 그것은 신에 대한 도전이란다.]
한 여신과 사도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사정을 모르는 알렉스는 은현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고 있었다.
“간단하다. 왕녀님이 성장하고 페르니아스 왕족 안에서의 지위가 향상된다면, 너에게 향하는 지원 또한 향상된다는 이점이 있다. 정체를 숨기지 않고 이 나라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심한 이상 왕족의 지원은 다른 어떤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매리트지.”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실제로 지난 연쇄 습격 사건에서는 유리아 왕녀나 헬레나 후비의 인맥 덕도 꽤 보긴 했고. 그렇다고 그녀가 순순히 네 제안을 승낙할 것 같지도 않은데?”
알렉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제안한다면 왕녀님은 받을 거라 생각한다.”
묘하게확신하는 알렉스의 말투에 은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와 왕녀님 사이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인 것 같으니까.”
“…….”
그것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그만큼 알렉스가 유리아 왕녀를 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처음만나는 남자에게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사실을 털어놓고, 비밀을공유하는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본 알렉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서운하냐?”
“아니, 왕녀님의 감정은 왕녀님의 감정이다. 내가 그분에게 감정이 향한다고, 그분이 나에게 그 감정에 답해줘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
은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알렉스에게서 시선을 피해 옆을 돌아보았다.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은현의 내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이 순정마초는….’
올곧고 순수한 마음에 당황한 은현이 딱히 말을 잇지 못했고, 도리어 민망해진 은현 쪽이 고개를 돌려버린 것이었다.
[꽤나 순수하고 올곧은 아이가 아니냐.]
그런 알렉스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베르단디 뿐이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랑 왕녀 사이에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일절 없어.”
“알고 있다. 너와 왕녀님의 비밀이 그런 비밀이 아니라는 것쯤은 왕녀님을 보면알 수 있어. 단지 내가 너보다 왕녀님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아쉬웠을 뿐이야.”
“…알겠어. 알았다고!”
머리를 긁적인 은현은 알렉스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결국 승낙의 의사를 밝혔다.
“고맙다.”
순식간에 안색을 펴는 알렉스의 반응에 은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진짜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 건데. 방금 그거, 연기는 아니지?”
“설마. 그건 진심이었어.”
“하….”
자신의 진심마저도 이용하여 은현이 승낙하도록 이용하고 마는 알렉스의 생각에 은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군. 이건 너의 방식이기도 했는데.”
이용만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와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은현의 방식이기도 했다.
상황을 조장하고 자신이 바라는 의도대로 흘러가도록 상대방들의 행동들을 강제하는 방식처럼, 알렉스는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고 동정이라는 감정을 이끌어내어 은현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그래서 기분 별로라는 거야. 들어줄 수밖에 없잖아.”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은현은 거부하지 않았다.
습격 사건 때, 베르단디와의 대화 이후로 은현은 명백히 달라지고 있었다.
‘이게 다여신님 때문이에요.’
[후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웃고 있지 않느냐. 아이의 변해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너무 좋구나. 하계에 손을 쓰고 내려온 보람이 있어.]
효율과 순탄한 과정을 중시한다면, 유리아를 이번 원정대에 편성하는 건 당연히 반대해야 마땅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로 현재로서 자신과 아르미타스 공작가 사이의 협력관계, 그리고 헬레나 후비와 유리아 왕녀와의 커넥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다른 귀족 파벌들의 경계심을 살 수 있기 때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지 1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상대가 자신을 경계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둘째는 바로 에린 때문이다.
유리아 왕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운명을 개척하는 메르헨’이라는 웹소설의 줄거리가 고정관념처럼 깊숙이 박혀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에린 헤르샤’라는 존재는 정체모를 원인으로 구미호로 변해 페르니아스 왕국의 중심인 수도 페르닌을 불바다로 만들고 많은 백성들을 학살하는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인식이 단단히 박혀있는 것이었다.
‘감옥에 투옥되면서 엘빈과 에린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오해는 풀 수 있었지만, 이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은현은 지금 단계에서 유리아 왕녀와의 접촉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옳은 판단일진데, 알렉스의 부탁이 계속해서 은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의 기분이 어떨지는 은현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해볼 수 없었다.
호감을 품은 여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의지하는 것을 바라만 봐야하고 마음을 숨겨야만 한다.
그러면서 자존심을 굽히고 자신보다 뛰어난 그 남자에게 호감을 품은 여자를 부탁한다고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알렉스의 심정을 은현은 모른다.
하지만 자존심을 굽히고 자신에게 부탁을 해온 알렉스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너, 후회하지마라.”
“후회?”
“이번 원정의 목적, 사실은 유적이나 재보 탐사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
“물론.”
“내가 맡게 된이상, 거기서는 왕녀고 귀족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내가 그 여자를 왕녀로 대우할 일은 절대로 없다는 거야. 알았어?”
“알고 있다.”
“그리고, 너도 따라와.”
“나도?”
“그럼 넌 나한테 그 여자를 맡기고 수도에 남아서 손가락만 쪽쪽 빨 생각이었냐? 당장 준비해. 어차피 왕녀의 호위를 구실로 함께 참여하면 될 거 아냐.”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알렉스는 생각지도 못한 은현의 배려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마침 잘됐네. 네가 맡아줘야 할 역할이 하나 있어.”
“역할?”
“아, 그것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는데.”
“뭐지?”
“흔히들 하는 말이 있잖아.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하고 남의 연애사 듣는 거라고.”
“…….”
은현이 서두를 띄우자, 알렉스의 표정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런 서툰 모습을 보이는 알렉스를 보며 은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언제부터였냐?”
◆ ◆ ◆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일정한 구간마다 설치된 마법등으로 밝혀진 시야를 의지하여 한 5분 정도를 걸었을까, 유리아는 지하 시설 안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울릴 때마다, 몸을 살짝 씩 떨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뭐야, 이 마력은….”
자신의 몸을 덮치는 진동과 소리들, 그리고 계단 끝의 너머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량에 절로 긴장할 정도다.
유리아가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레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어젖히고 내부로 진입했다.
‘혹시 마수라도 하나 가둬놓은 거 아니야?’
문 너머로 느껴졌던어마어마한 기백에 잔뜩 쫄아 있던 유리아가 문 너머에 있는 존재에 알 수 없는 공포감을 품고 있던 차였다.
“사람? 여자?”
손에 쥐고 있던 레이피어를 내팽겨 치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한 소녀를 보며 유리아가 의아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저 애가 아까 그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방출했다고?’
가히 마력량만 따진다면, 이 나라의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이 바로 이 나라의 왕족들이다.
그것은 유리아에게도 해당이 되는 이야기 이며, 남들보다 우월한 혈통을 타고난 그녀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타고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자국을 포함해, 타국의 귀족과 왕족들까지 페르니아스의 귀족과 왕족들을 우러러보고 좋은 관계를 가지려는 이유가 바로 이 혈통에서 비롯된 선천적으로 많은 마나를 가진 신체 때문이다.
‘나와 비슷하면 비슷했지, 절대로 뒤쳐질만한 양과 질이 아니었어. 도대체 누구지?’
긴장한 표정으로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소녀를 주시하자, 소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소녀가 입을 열었다.
“힘들어어어어!”
“응…?”
“배고파아아아아…. 아, 소리칠 기운도 없다….”
힘차게 소리 질렀던 소녀의 외침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작아지고 힘이 빠져나간다.
처음 생각했던 무시무시한 마수를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인상을 품은 유리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응?”
문득 인기척을 느낀 에린이 고개만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는 출구 쪽을 응시했고, 그제서 멍하니 서있는 유리아를 발견한다.
흐느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에린이 유리아를 응시하며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누구세요?”
“아, 나는…그게….”
순간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잔뜩 망설이던 차에, 그 모습을 본 에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현이가 이름을 물어보기 전에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게 예의라고했는데. 읏차!”
‘현이’라는 것은 그 ‘은현’이라는 남자를 말하는 것을 깨달은 유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점차 설마하는 표정으로 에린을 바라보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간신히 몸을 일으킨 에린이 은현에게서 배운 격식 있는 인사를 통해 자신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에린 헤르샤’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성함을 여쭤 봐도 될까요?”
“…….”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고 있었다.
‘그 남자는 정말로 이 애를 키울 생각인거야?’
복수심에 미쳐서 아무런 연관도 없는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도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일을 저지르는 여자를 돌봐주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유리아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급격하게 굳어버린 유리아의 안색을 확인한 에린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유리아에게 다가갔다.
“저,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가, 가까이 오지마!”
몸이라도 안 좋은 걸까 싶어, 에린이 유리아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유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에린의 손을 뿌리치고 뒷걸음질을 치며 에린과의 거리를 벌렸다.
“어…?”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에 에린이 당황하며 유리아를 바라보았고, 에린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냈다.
‘공포? 무서워하고 있어?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