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086. 미궁 원정 편성(1)
“야. 너 이렇게 스파이짓 하는 거 진짜 너무한 거 알긴 해?”
은현에게 현재 이 상황은 심각하게 불편한 상황이었다.
다름 아닌 난처한 웃음을 보이고 있는 알렉스가 불청객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본업은 왕녀님을 보좌하는 일이다.”
“스파이짓을 밝혔는데 왜 이렇게 당당하냐?”
“그게 일이었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이나 미안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제가 당신을 찾아온 게 아~주 마음에 들지 않나 봐요?”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저 이래 뵈도 일국의 왕녀인데요.”
“그래서 더 귀찮은 거 아닙니까. 왕녀나 되는 인간이 이렇게 호위기사 하나만 데리고 다녀도 됩니까? 애초에 자기 호위 기사한테 첩자 노릇이나 시키고, 하는 짓이 아주 야비하기 짝이 없군요.”
“후후후후, 좋아요. 지금은 그 무례하기 짝이없는 말투는 넘어가도록 하죠.”
알렉스를 대동한 채, 은현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유리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유리아는 머릿속으로 차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간신히 은현의 막말을 참아내고 재차 입을 열었다.
“알렉스의 말로는 원정을 계획하고 있다고요?”
결국 알렉스에 의해서 정보가 새나간 것에 한숨을 쉰 은현은 더는 숨길수도 없었기에 순순히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그 원정 지역이 아르키스 대미궁이라고요?”
“그런데요.”
“…나한테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그걸 제가 왜 왕녀님과 상의를 해야 합니까?”
“하, 이봐요. 엄연히 내가 먼저 찜해둔 던전이에요. 그러니까 손대지마요. 손대기만 해봐, 진짜. 가만히 안 둘 거야.”
“…….”
자기가 먼저 침 발라둔 곳이라고 엄포를 해대는 모습이 당돌하다 못해 막무가내식이라, 은현의 입장에서는 어이없기 짝이 없었다.
던전에 우선권을 주장해오는 뻔뻔한 태도는 이 나라의 왕녀라고는 도저히 생각해 볼 수도 없는 수준.
“왕녀님은 이미 미궁의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그, 그래도 언젠가는 시련을 통과할 예정이니까, 그곳에 있는 보상들도 모두 내거에요! 그러니까 절대로 손대지 말아요!”
도대체 무슨 논리일까, 이것은?
은현은 막무가내 식으로 나오는 일국의 왕녀를 앞에 두고 기묘한 시선을 거두지않았다.
“뭐, 뭐에요? 그 시선은.”
“혹시 안 부끄러우십니까?”
“…저, 전혀요.”
그리 말하면서도 자연스레 은현에게서 시선을 피하는 유리아의 행동은 말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아르키스 대미궁의 보상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은현이 원정을 가는 것을 막고있는 것이었다.
‘위험해. 이 인간이 가면 시련은 그냥 클리어하는 거나 마찬가지일 거 아니야!’
이미 한차례 함께 미궁에서 파티를 맺었던 전적이 있었기에, 유리아는 은현의 무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아르키스 대미궁의 시련쯤은 그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시련의 답파만을 앞두고 눈앞에서 보상을 놓치게 된 그녀의 입장에서는 은현의 원정 소식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으리라.
“왕녀님의 목적은 ‘아르키스의 심장’이 목적이시죠?”
“네.”
“하지만 그건 왕녀님에게 드릴 수 없습니다.”
“어째서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뭔데, 그걸판단하는 건데요.”
단호한 은현의 선언에 유리아는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자신이 미궁의 시련을 답파하지 못하고 파티원이었던 알렉스를 포함한 크라시르의 기사단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대놓고 은현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건 아르키스의 후계인 ‘인형사’의 후예에게만 허락되는 보물이라고. 왕녀님은 아르키스의 심장이 품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로 왕녀님의 육체를 강화할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그건 그런 용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으….”
할 말을 잃은 유리아가 작게 신음한다.
“은현.”
두 사람사이의 실랑이에 난입한 알렉스가 은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왕녀님을 이번 원정에 넣어줄 수는 없을까?”
“뭐?”
“응?”
뜬금없는 제안에 놀란 반응을 보이는것은 은현 뿐 만이 아니라, 유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알렉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예요! 제가 왜 이 남자의 원정에….”
“왕녀님, 냉정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그리고 현재 귀족 파벌들의 세력구도 등을 생각해본다면 이번 원정에 참여하는 건 왕녀님에게 득이 되면 됐지 손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흐음? 그 얘기는 흥미롭네. 자세히 얘기해봐.”
알렉스가 유리아를 설득하는 대화였지만, 뜻밖에도 이번엔 은현 쪽에서 흥미를 보였다.
“당신들…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뭘 멋대로….”
“현재 왕녀님의 상황은 알고 있나?”
“헬레나 후비님이 아들인 에반 왕자를 왕세자로 옹립시키기 위해지지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더 확장시키고 싶은 마음에 유리아 왕녀를 타국의 귀족에게 시집을 보낼 예정이라는 것 정도?”
“생각보다 자세히 알고 있군. 누구에게 들은 거지?”
“본인한테서.”
“…….”
알렉스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그대로 유리아를 돌아보았다.
그의 오묘한 시선을 받은 유리아가 몸을 떨며 알렉스의 시선의 의미를 물었다.
“뭐, 뭔가요? 왜요?”
“거기까지저 남자에게 말씀하셨던 겁니까?”
“그, 그게….”
“왕녀님의 정략결혼 문제를 포함한 왕가의 정보들은 모두 1급 기밀들 뿐 입니다. 타인에게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되는 건 당연히 아실 텐데, 어째서….”
인상을 찌푸린 유리아가 손사래를 치며 알렉스의 말을 끊는다.
“알았어요. 미안하다고요! 함부로 제 정략결혼 문제를 발설해서! 너무 경솔했어요! 반성할게요! 그러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요. 제발!”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질색하는 유리아의 반응을 보아하니, 알렉스와 유리아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 투닥거리는 것이 마치 일상과도 같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애초에 말이야. 자기도 지금 저 남자한테 정보를 누설하려고 했으면서 왜 나만….”
“누설하는 시점이 문제였다는 걸모르시겠습니까? 왕녀님이 저자에게 정보를 누설한 시점은 비밀리에 협력관계를 구축하기 전인, 지금보다 훨씬 이전 시점입니다. 저자의 정체나 정확한 목적도 모르고서 함부로 왕가의 기밀을 누설한다면 그 정보가 악용되어 도리어 왕국에 손해를 끼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저희가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이기에 사정을 설명해야하는 입장이라는 거죠.”
“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괜히 한 마디를 덧붙여서 괜히 잔소리를 더 들었다며 유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양손으로 두 귀를 막고는 고개를 절래 절래 가로저으며 듣기 싫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유리아를 보며 알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이 많네.”
“훈련을 받는 것보다 이쪽이 더 고된 것 같다는 건 부정할 순 없군.”
“저기요.”
“나이가 스무 살이 넘는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짓이 영….”
“올해로 스무 살이시다. 어쩔 수 없겠지.”
“이봐요. 지금 나 까는 거예요?”
“그래서? 왕녀님의 입장하고 내 원정에 들어오는 게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건데?”
“음.”
“히잉….”
두 남자의 사이에서 깔끔하게 무시 받는 유리아는 마음속을 채우기 시작하는 소외감에 울상을 지었다.
“몰라! 당신들끼리 알아서 해!”
북받쳐오는 서러움에 감정이 폭발한 유리아가 거칠게 방문을 열고는 방안에 울릴 정도로 세차게 문을 닫으며 은현의 방을 나갔다.
“…….”
“…….”
그녀의 행동에 은현과 알렉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지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원래 저렇게 막무가내냐?”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최근에서 조금…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같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나도 그렇게 느끼는 바이고.”
‘전생의 기억이 깨어나면서 생긴 성격의 변화려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신님?’
[무엇을 말이냐?]
‘지금쯤이면, 신들 사이에서도 많은이야기가 오가고 있지 않나요? 저 여자가 정말로 신의 사도가 될 재목이라면, 저의 경우 때처럼 신이 직접 접촉을 해올 텐데, 지금의 유리아 왕녀의 상태는 너무…방치에 가까운 것 같아서요.’
굳이 지구에서 살았던 전생의 기억을 일깨우고, 이 세계의 운명의 흐름의 일부를 소설이라는 형태로 엮어서,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흐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조치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유리아 왕녀에 대해서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자신이 아르키스 대미궁에 조난된 그녀를 구하러 가지 않았다면, 그녀를 포함한 ‘운명의 메르헨’속에서 ‘주인공’의 동료인 알렉스까지도 모조리 몰살당하는 엔딩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에 유리아 왕녀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셨던 적이 있었잖아요. 혹시라도 알아내신 게 있을까 싶어서요.’
[으음, 그 얘기였구나. 안타깝게도 저 왕녀라는 아이의 전생의 기억을 일깨운 신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허탕만 쳐버렸다는 얘기이니,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뇨, 미안하긴요. 누가보면 제가 여신님을 막 부려먹는 줄 알겠어요.’
[많은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란다.]
베르단디의 말에 은현은 쓰게 웃었다.
‘그런데 여신님, 같은 신을 만나는 것에도 제약이나 조건 같은 게 존재하는 건가요? 만나지 못했다는 말씀이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서요.’
[아이의 말이 맞다. 본래 신들은 하계에 간섭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신계에서도 일정의 자신의 구역의바깥으로 나갈 수도, 간섭하여 영향을 끼칠 수도 없는 규칙이란 게 존재한단다. 때문에 신들은 여럿이 존재하고, 그 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신들이 존재하지만,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지. 하지만 나처럼 예외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지.]
‘울드님과 스쿨드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베르단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와 나, 스쿨드의 힘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분리된 ‘개념’이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거대한 운명의 실을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로 나누고, 각자의 영역을 관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바로 우리 자매들이지. 때문에 우리 자매들은 셋이면서 하나의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군요. 하지만 여신님의 말씀에 따르면, 다른 신들을 만나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지. 우리 자매가 다른 신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향을 끼칠 수 없듯이, 다른 신들 또한 우리의 신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그런 규칙의 제약을 벗어나서 모든 신들이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있는 장소가 존재한단다. 우리 신들은 이곳을 ‘신들의 회랑’이라고 부르지.]
‘제 부활은 바로 그 장소에서 이루어진 회의의 결과로 결정된 것이군요.’
[이해가 빠르구나. 역시 아이는 대단한 것 같구나.]
20년 전, 죽음을 맞이했던 은현이 최근에 다시 소생되어 또 다시 ‘불멸자’의 삶을 살게 된 것에는 ‘신들의 회랑’에서 이루어진 신들의 회의의 결과였다.
베르단디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은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은현, 무슨 일이지?”
“아니, 잠깐 저 왕녀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생각하던 참이었어. 그래서? 계속 이야기해봐.”
재빨리 여신의 손길에서 벗어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가자, 베르단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진짜, 뭐 저딴 인간들이 다 있지?”
유리아는 자신을 없는 사람취급했던 은현과 알렉스를 생각하며, 분한 기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아주 하는 짓거리도 똑같은 게 가관이야, 아주! 어?”
자신을 무시하고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에 화가 단단히 나있던 유리아는 주택의 내부에 아래층으로 이어져있는 계단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확인하고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이게? 어디로 이어진 거지?”
호기심이 발동한 유리아가 계단이 이어진 내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수상한데….”
일반주택에 이런 지하시설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곳은 지구도 아니기에, 중장비를 동원하여 지하 공간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왕성에도 긴급 상황 시에 대피의 용도로 만들어진 지하도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나라에 속한 대규모의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에 불과하다.
“고위자릿수 마법사의 주택이니까 마법으로어쩌면…. 아니, 그렇더라도….”
이 집의 주인은 명백히 일리아나라는 것은 이 나라의 온 백성들이 다아는 사실이지만, 이 집의 관리를 다름 아닌 은현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렉스에게서 들은 유리아는 이 계단 아래에 존재하는 지하시설이 은현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좋아. 한 번 가보자. 지하까지 만들어서 뭘 숨겨두려는 것 같은데,뭘 숨겼는지 한 번 보자고. 건수라도 잡히면 바로 물어뜯어서 원정을 포기하게 만들어주겠어.”
아까 전, 은현에게 면박을 받은 기억을 떠올리자, 반격해줄 구실을 찾았다며 그녀의 두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결심의 순간까지 매우 오랜시간을 고민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행동은 매우 빨랐다.
유리아는 망설임 없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