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4화 〉084. 새로운 소공작(3) (84/730)



〈 84화 〉084. 새로운 소공작(3)


“잘…모르겠어요.”

헤르샤 준남작 사건 당시, 실종된 상태였던 에린이 눈을 떳을 때는 주위의 상황을 인식하기에 급급했다.
오빠인 엘빈이 죽었다는 사실과 그 원흉이 공작가문의 후계자인 애슈턴이라는 것을 은현에게 듣고 많은 생각을 했었다.

“처음에는 많은 감정들이 가슴속에 차오르고 그걸 분출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에린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은현을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흐음.”

아브로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에린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지금은…공작님을 원망하고 공작님의 집안을 어떻게 한다고 저와 우리 오빠의 울분이 풀릴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엘레노아와 알렉스의사과를 받고 공작가문전체의 의사가 아닌 애슈턴이라는 남자의 독단 행동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에린의 원망은 아르미타스 공작가가 아닌, 애슈턴이라는 개인에게 원망을 품는 것으로 그쳤다.

“나는  원수나 다름없는 자의 아버지이고, 가문을 지키기 위해 아들의 죄를 덮고 네 오라비를 아버지가 범죄로 빼돌린 금화를 훔치고너를 버리고 달아난 파렴치한 흑마법사로 몰아간 자다. 그런데도 원망을 하지 않는 건가?”

“하지만 이렇게현이를 통해서 저에게 도움을 주고 계시기도 하잖아요.”

“…….”

“어쩌면 현이는 제가 부탁만 한다면, 그 남자의 죄를 나라에 고발하고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오빠의 명예를 되찾아 줄 수 있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저한테 어떻게 하고 싶냐고 선택권을 줬던 이유를 아니까요.”

은현은 에린이 자신에게 의존하여 애슈턴의 죄를 밝히고 오빠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그것들을 밝힐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랬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은현은 그렇게 그녀가  사람의 몫을 다할 수 있도록,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조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었다.

“이제는 공작님이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걸 알아요. 알렉스님이나 엘레노아님을 위해서라도 어쩔  없었다는 걸…. 하지만 언젠가는 밝혀낼 거예요. 우리 오빠가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그때는…공작님도 저를 도와주셨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욕심일까요?”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도록하지.”

자신의 아들의 치부를 스스로 밝히고 가문의 명예를 깎아내린다는 결정은 가문의 당주로써 쉽게 내릴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시작은 좋지 못한 관계였을지도 모르지만, 에린과 아브로스는 조금씩 서로의 관계를 개선해나가고 있었다.

“애슈턴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예 모습이 보이지 않더군요.”

“애슈턴은 제 어미와 함께 공작령에 있는 별채에 보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체가 쇠약해진 상태지. 이외의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 쇠약해진 몸으로 소공작의 업무를 병행한다는 건 무리니까.”

하지만겨우 몸의 쇠약을 원인으로 공작가문의 후계자를 바꾼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구실일 뿐, 애슈턴이 아브로스를 여러 차례 실망시킨 끝에 결국에는 후계자의 자리를 잃고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은현은 알고 있었다.
악마에게 세뇌당하여 에린을 납치하도록 부추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불순한 의도를품고 있었던 것이 문제이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

“몸 상태는 공녀님의 신성 마법으로 회복시킬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으셨군요.”

“자기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니까. 그것에 관해서는 너나 저 아이에게도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다.”

“아…. 감사합니다.”

에린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차지하고 애슈턴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은현에게 들어서야 알 수 있었다.
서큐버스, 리라와 싸울 때, 여우귀와 아홉 꼬리들이 생겨나며 수인 상태의 모습으로 변한 자신의 몸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면서 덧붙여 이야기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세간에는 애슈턴이 습격을 받았던 것도 악마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면서, 가장 먼저 용의자로 선정되었던 에린에게는, 이제는 페르닌을 위협한 악마를 처치한 영웅 같은 프레임이 씌워지고 있었다.
에린은 자신의 몸속의 신수가 애슈턴을 그런 꼴로 만들어버린 것에 대해서 공작가문에 전혀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사과하지 않았고, 오히려 애슈턴을 그런 꼴로 만든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에린을 배려한 아브로스의 의사가 고맙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럼 이제는 슬슬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까.”

에린과의 대화는 아브로스의 묵은 감정 중 하나를 풀어주는 것에 큰 역할을 했다.
하나를 해결했으니 이제는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할 순간인 것을 인지하고 은현을 보며 진지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아~. 복잡한 얘기면 나는 나갈래. 아가, 너도 따라오렴.”

“네? 아, 네.”

조용히 에린과 아브로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일리아나가 손사래를 치며 에린을 끌고 방을 나갔다.

“아버지. 그럼 저는 저쪽을.”

“음.”

간단히 아브로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하고, 엘레노아 또한 일리아나를 따라 방을 나섰다.

“마침 타이밍 좋게 마주친  같군.”

“리오드? 너도 초대 받았어?”

“일단은 나도 이 나라의 귀족이다.”

“흐응. 혼자서  거야?”

“아니. 아내와 딸만 데리고왔다. 아들은 너무 어려서.”

“그래? 안에 들어 가봐. 마침 중요한 얘기가 시작되려던 참이더라.”

“그렇군.”

방문이 닫히기 전, 일리아나와 연회에 초대받은 또 한명의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은현과 아르미타스 부자가 있는 방안으로 들어오는 리오드의 얼굴을 보고, 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멤버, 너무 친숙한 거 아닙니까?”

“문제 있나?”

“그런  아닙니다만.”

“새로운 소공작이 된 것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올리비온 후작님.”

리오드가 알렉스의 경사소식을 축하하자 알렉스도 고개를 숙이며 그의 말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자리에 앉게.”

“예.”

아브로스의 권유에 리오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은현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에린을 납치했던 남학생  하나가 이전 공개 재판에서 사회를 맡았던 오르바 백작의 아들이라면서요?”

“그 얘기도 들었군.”

오르바 백작이 공개재판에서 사회를 맡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폐창고에서 에린이 구미호로 변하고 애슈턴의 마나를 흡수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오르바 백작의 아들, 빌라드 오르바의 제보 때문이었다.

“덕분에 상황이 완전히 이상하게 돌아갔지. 에린을 용의자로 지목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자기 아들이 목격한 증언이었는데. 범인은 악마라는 다른 존재가 따로 있었고, 그의 제보만을 믿고 움직인 크라시르의 단원은 애먼 사람을 감옥에 가둬놓고 심문한 꼴이었으니.”

게다가 제보를  오르바 백작의 아들, 빌라드 오르바는 도대체 왜  시간에 그 폐창고에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의 추궁을 피할  없었다.
입이 찢어져도 에린을 납치하고 나중에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할 예정이었다고는말할 수 없었기에 빌라드는 오로지 침묵을 고수했다고 한다.

“결국 멋대로 단원들을 움직이고,스스로  없는 민간인이나 다름없는 너를 폭행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마녀가 왕실에 단단히 항의를 하면서 크라시르의 입지가 점점 곤란해졌다고 하더군. 반대로이번에 그 마녀의 협력으로 악마를 잡는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진 아르티아 쪽은 점점 더 입지가 커지고 있고.”

“제 입장에서는 그냥  요리해서 던져준 음식들을 받아먹은 입장이라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습니다.”

리오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아르티아의 단원들 사이에서는 밤낮을 세워가며 습격 사건의 단서들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성과가 없던 차에, 갑작스레 한 소녀가 습격 사건의 범인인 악마를 잡았다면서 악마의 머리를 가져왔던 것이다.
얼마나 황당하고 허무하지 않겠는가.
백성들과 나라의 안전을 지켰다는 점에서는 다행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사건을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했다는 성취감이나 달성감 같은 것은 없었기에 기분은 매우 찝찝했다.
한 것도없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아르티아!’라며 자신들을 칭송하는 사람들을  때마다 머쓱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넌 어떻게 할 생각이지? 네가 평소답지 않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데.”

리오드가 은현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물었다.

“일단은 힘을 키워야지. 가장 기본적인 걸 테니까.”

“힘을? 네가?”

은현의 전투능력의 수준을 알고 있는 세 사람 모두가 이상한 시선으로 은현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니.물리적인 그런  말고. 다른 거.”

은현은 피식 미소 지으며, 자신의 다음 계획을 설명했다.

“원정을 하나 계획하고 있어.”

“원정?”

“아르키스 대미궁.”

그 이름을 들은 알렉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거기서 겪었던 다양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하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은현은 알렉스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거기 그냥 내가 먹어야겠거든.”

◆ ◆ ◆

“후우….”

에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기하게도 아브로스를 만나는 것에 불안했던 생각들 품었던 것과는 달리 굉장히 매끄럽게 이야기가 흘러갔던 것이 다행이라 여긴 안도의 한숨이었다.

“긴장했었니?”

“네. 조금요? 엘레노아님과 알렉스님에게는 죄송하지만…그 사람의 아버지니까요.”

아직도 정신을 잃기 전까지 얼굴과 몸을 발로 걷어차였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두려운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엘레노아도 그런 에린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미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아니에요. 사과를 받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닌 걸요.”

“너희 언제까지 그렇게 칙칙해져 있을 거야? 다 끝난 얘기가지고 그러지 좀 마. 나이도 어린 것들이 무거운 분위기만 계속 형성하고 있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앞서 걷고 있던 일리아나가  사람을 흘겨보며 말했다.

“미안하면 앞으로  잘해주면 되는 거야. 알겠어?”

“들으셨죠?”

“그래.”

일리아나의 일축에 엘레노아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앞으로도  소녀가 더 상처받지 않도록, 자신이 노력하자고, 엘레노아는 굳게 다짐했다.

“저 진짜 엄청긴장해서 배가 고팠는데, 맛있는 거 먹여주시면 안 돼요?”

“응, 그러자.”

마치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엘레노아는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 생각하며, 두 사람 앞을 서서 걸으며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

엘레노아는 연회장의 테라스에 있는  모녀를 보고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뒤따라 걷고 있던 일리아나와 에린 또한 각자가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기에, 엘레노아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에이라님!”

“아, 에린.”

에이라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의 얼굴을 확인하자, 밝은 목소리로 에린의 이름을 불렀다.

“소식 들었어. 준남작의 작위 다시 돌려받았다면서? 축하해.”

“헤헤,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걸요. 다 현이가 만들어준 거예요.”

“은현님이…그렇구나.”

“……?”

밝은 얼굴로 축하해주던 에이라의 얼굴이 은현의 이름이 나오자 갑작스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에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왔구나.”

일리아나 또한 에이라의 어머니이자, 친구인 리오드의 아내인 테레지아를 보고 인사를 건냈다.

“네. 마녀님께서도 상태가 좋아보이셔서 다행이에요. 요즘엔  즐기고 계신 것 같기도 하고요.”

“뭐어…부정하지는 않을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일리아나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이내 인상을 찡그리고 다시  번 테레지아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한 가지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

“상담?”

뜬금없는 일리아나의 부탁에 엘레노아와 에린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라의 여왕에게도 오만불손한 태도를 취하며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던 일리아나가, 이상하게도 테레지아에게만큼은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담인가요?”

“응. 꼭 되갚아주고 싶은 일이 있거든. 테레지아의 도움이 필요해.”

“후후,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이야기만이라도 들어드릴게요.”

고개를 끄덕인 테레지아가 이내 그녀의 옆에 있던 에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후작부인.”

“그래.  지내는 것 같구나. 소식은 들었단다.”

테레지아는 쓰게 미소 지으며 에린의 인사에 답했다.
이윽고 다시 시선을 에이라에게로 돌린 에린은 그리 밝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이라를 보고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애초에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면, 연회에 참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에이라는 명백히 에린이 은현의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에린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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