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083. 새로운 소공작(2)
“저 자가 그때 공개재판에 죄인으로 심문을 받았던 그 남자가 아닌가.”
“뭐? 그때 그 남자라고?”
“자네, 그날 공개재판에 참석하지 않아서 얼굴을 모르는 모양이군? 저 자가 바로 검은 마녀의 부하로 알려진 ‘수은(水銀)의 뱀’이라는 자일세.”
“수은의 뱀? 무슨 이명이 그런가?”
“저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자가 말로 재판장에서 오르바 백작을 포함한 귀족들을 말로 농락했다네. 그래서 붙여진 이명이지. ‘은색의 독을 품은 뱀’이라는 의미지. 호리호리하고 허약하게 생겨서는, 말하는 본새가 뱀처럼 영악하기 그지없었다네.”
죄수의 단상 위에 서서, ‘엘빈을 악이라 단정한다면 당신들 또한 악이나 마찬가지다.’라며 쏘아붙였을 때의 시선은 절로 귀족의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저런 자를 공작각하께서 굳이 새로운 소공작 취임의 축하연회에 초대했단 말인가?”
“그러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걸세. 도대체 무슨 연결이 있었던 건지, 이번에 새로운 소공작이 되신 알렉스 공자가 직접 저 자를 돕기 위해 발 벗고 증언에 나설 정도였다니깐?”
“어찌하여 죄인이나 다름없었던 저런 미천한 자를…. 아르미타스 공작가문도 이제 꺾이는 시기가 온 것이 아닌가?”
“모르지. 저 자가 또 무슨 세치혀를 놀려서 공작가에 빌붙고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는 얄팍한 수를 쓴 것 일수도 있지 않겠나?”
“하긴,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평민이, 검은 마녀의 연인이라고? 고위 자릿수 마법사의 명성에 빌붙어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남자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자로군.”
“듣자하니, 집은커녕 가지고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어서 마녀의 저택에 눌러 앉은 생활을보내고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마녀가 키우는 애완뱀이라니, 정말로 저속한 별명이 아닌가? 같은 남자로서 정말 부끄러운 사내인 것은 맞는 말일세.”
“쯧쯧, 그런 거라면 공작 가문도 정말로 한물 간 게지. 소공작께서 가문을 잘 이끌 수 있을지 걱정이구먼.”
“그때는 우리가 나서서 도와드리면 되지 않겠는가?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와 자네는 우리 귀족 파벌 중에서 물심양면으로 아르미타스를 지원했던 전적이 있으니, 우리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못할 걸세.”
“그런가? 으흐흐.”
“하….”
멋대로 공작가문을 자신들의 잣대로 평가하고, 은현에 대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귀족들의 수군거리는 것을 들은 에린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에, 은현에 에린의 팔을 붙잡아 그녀의 돌발 행동을 제지시켰다.
“무시해.”
“이런 말 듣고도 가만히 있으라고? 저 사람들은 네 대단한 면을 아직도 보지 못….”
이런 대외적인 자리에서 항상 자신을 낮추고, 자신감이 없는 모습을 보였던 에린이 보기 드물게 감정이 격해진 상태로 은현에게 말을 쏟아냈지만, 은현의 옆에서 걷고 있던 일리아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에, 에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똑같이 귀족들의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 있던 일리아나가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째려보자 귀족들이 몸을 떨며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쯧. 가자.”
작게 혀를 찬 일리아나가 눈짓하며 팔짱을 끼고 있은 은현의 팔을 끌어당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을 대신해 귀족들에게 본 떼를 보여줄 줄 알았던 일리아나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발걸음만을 재촉하자, 에린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은현을 생각하는 마음도 적지 않지만, 일리아나도 은현을 생각하는 마음이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개적으로 은현이 자신의 연인이라는 것을 밝혔을 정도인데, 그냥 참고 넘어가는 그녀의 행동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겨우 저런 걸로 감정낭비 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일리아나의 시선에 맥도 추리지 못하는 것들이 떠드는 소리일 뿐이야. 난 전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
“하지만….”
귀족들은 은현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그의 모습은 그저 일리아나의 연인이며, 그녀의 위세를 등에 업은 별 볼일 없는 남자일 뿐이었다.
에린은 은현에게 구원을 받았고 은현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세간에서 그런 치욕에 가까운 평가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렇지만, 넌 이런 면에서는 좀 변태 같은 성향이 있어.”
에린과 마찬가지로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일리아나도 은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변태 같은 성향이요?”
이해가 가지 않는 설명에 에린이 되묻자, 일리아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에린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얘는 말이지. 상대가 자신을 깔보고 무시할 때, 제일 마음이 편해지는 이상한놈이거든.”
“…도대체 왜요?”
은현을 바라보는 에린의 표정은 ‘뭐 그런 해괴한 성향이 다 있어?’라는 시선을 담고 있었다.
“그래야 상대방 뒤통수를 치기 쉽거든.”
“응…?”
“보통 귀족들이나 대상단의 단주처럼,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들은 자기가 고귀하고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 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있는 존재이니만큼, 자신이 그들을 조종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기 머리위에 누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 거야.”
“그 머리 위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바로 너라고?”
“설마. 그냥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인 줄 알거든. 그러니까방심하고 마는 거야. 그리고 상대가 별 볼일 없고, 하찮은 상대일수록 더욱더 경계를 하지 않고 방심하기 쉬워지고말지.”
“그래서…너를 사람들이 무시할 때마다 편안함을 느낀다고?”
“편안한 건 아닌데…. 말투가 좀 그렇네. 그냥 일처리가 쉬워지니까 간편하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에린은 쓰게 웃는 은현의 표정을 보고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너 진짜 이상해….”
“너무하네. 좋아해서 참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는 건 여전하지 않느냐.]
‘이렇게 살아왔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아, 절대로 여신님을 탓하는 건 아니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요즘 들어서 베르단디는 꼭 이런 쪽의 화제가 나오면 항상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기에, 은현은 사전에 여신의 말을 차단했다.
[아이는 다른 길이 제시되었음에도, 그 방식은 여전하다는 말이었다.]
이제는 미안해하다기보다는, 쓰게 웃는 베르단디였다.
오랜 시간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온 은현이 이제와 어떻게 그 방식과 습관을 고칠 수가 있을까.
“아르미타스 공작님,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연회에 참석한 모든 귀족들이 문을 열고 입장하는 아브로스와 그를 뒤따라오는 알렉스, 엘레노아 남매, 그리고 둘의 어머니이자, 아브로스의 두 번째 부인인 루네스 아르미타스의 네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 애슈턴과 그의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앙의 단상에 올라선 아브로스가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새로운 소공작으로 임명된 알렉스의 축하를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해준 많은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오. 이 연회는 다름 아닌 알렉스를 위해 마련된 연회이니, 연설은 주인공인 나의 아들에게 넘기도록 하겠소. 알렉스.”
“예.”
아브로스의 부름에 답하며, 아버지가 뒤로 물러나며 자리를 비켜준 단상에 서서 많은 이들의 앞에 알렉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의 축하를 위해서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귀빈여러분들께 모두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의 말을 서두로 알렉스의 말이 이어진다.
“최근 페르니아스 왕국에는 떠들썩한 사건이 셋이나 있었습니다.”
그 중 두 가지의 사건은 에린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헤르샤 준남작 배임횡령’과 ‘페르닌 귀족 연쇄 습격 사건’을 말하는것이라는 것을 에린은 눈치 챘다.
그렇다면 다른 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물어볼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알렉스의 연설에 집중했다.
“저는 지금이 매우 혼란의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혼란의 시기에 이렇게 소공작으로 임명을 받고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는 자리를 받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고민 끝에 이 자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노력하여 공작가의 후계자에 걸 맞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니, 많은 도움과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정중하게 격식을 차린 정중한 연설이 끝나자, 여러 귀족들에게서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그럼 모두 이 연회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인사를 끝으로 작게 고개를 숙여 연설을 마치자, 잠시 중단되었던 연회가 재개되기 시작한다.
“대단하네….”
“대단해?”
“응. 지금까지는 잘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알렉스님은 정말로 굉장히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까지 에린의 시점에서 보아온 알렉스라는 남자는 그저 ‘친구의 친구’ 같은 감상 밖에 품지 않고있었다.
가끔 엘레노아를 따라 일리아나의 저택을 방문하거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은현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가는 등의 행동은 전혀 귀족답지 않는 그의 면모에 적응되었던 탓이 크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연회에서 보여준 알렉스의 모습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진지하고 책임감과 의무감을 짊어진 표정을 보고 에린은 이전에 은현이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 귀족이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을 져야하는 아주 무거운 자리라고. 선택 하나에 백성들의 목숨이 좌지우지 될 수도 있고, 나라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나라가 망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저런 분이 현이가 말한 ‘귀족’이라는 걸까.”
“적어도 다른 녀석들보다는 낫지. 저 녀석이.”
“그러고 보니, 현이는 공작가의 분들한테는 그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
“가식이라니. 영업 스킬이라고 해주라.”
“얘는 정말로 좋은 사람들한테는 약하거든. 나쁜 놈들은 그냥 뒤통수쳐도 양심에 하나도 찔리는 구석이 없는데, 좋은 사람들 뒤통수치기는 또 껄끄러워 하더라.”
“시끄러워.”
일리아나가 킥킥대며 옆에서 빈정대자, 드물게 은현이 기분이 상한 듯 일리아나를 흘겨보았다.
그것이 은현이 보기 드물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애써 감추려는 행동임을 아는 일리아나는 재미있다는 듯 숨죽여 웃을 뿐이었다.
“은현 님.”
“음?”
은현은 자신을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에 조용히 샴폐인의 맛을 음미하던 은현의 인상이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접 은현을 찾아와 아브로스의 의사를 전하는 정중한 엘레노아의 태도에 일순 연회장의 내부가 정적을 감쌌다.
“이 인간이….”
순식간에 아브로스의 의도를 눈치 챈 은현이 이를 간다.
일리아나 또한,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 채고 웃기 시작했고, 에린은 그런 둘의 반응을 보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안내 하도록 하죠.”
정중한 태도로 세 사람을 데리고 엘레노아가 연회장을 떠나자, 연회장의 내부가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봤나? 엘레노아 공녀의 저 정중한 태도?”
“봐, 봤네만, 도대체 왜 일개 평민에게 저렇게 깍듯이 대하는 것인가?”
이 나라의 2인자나 다름없는 집안의 여식이 직접 찾아와 정중히 모셔갈 정도의 인사라니, 게다가 방금은 일리아나를 찾은 것이 아닌 은현이란 남자를 찾은 것이 아닌가.
“혹시….”
“자네도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겐가?”
“자네도?”
어쩌면 은현이라는 인물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조금씩 의심의 씨앗이싹트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 ◆
“아주 쓸데없는 짓을 하셨군요.”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표정과 온몸으로 표현하는 은현의 태도가 오히려 마음이 들었는지 아브로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은현을 비웃었다.
“네가 그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히 기분이 좋은 일이다만.”
세상에 당당히 엿을 먹이고 만족한 표정을 짓다니, 오히려 은현 쪽에서 어이를 상실할 지경이었다.
많은 귀족들의 앞에서 이 연회의 주최자인 아브로스가 자신의 딸을 시켜 은현을 정중히 모셔오도록 하는 것에는 공작가문에서 은현이라는 남자의 존재를 대놓고 밀어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와 같은 보여주기 식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쯤,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귀족들은 공작가의 신임을 받는 은현에 대해 관심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은현을 자연스레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평소 자신을 깔보게 만들고 방심을 유도시키는 방식을 고수하던 은현에게 아브로스의 돌발 행동은 전혀 좋은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정체를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던 것, 아니었나?”
“그것도 단계가 있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경계를 자진해서 사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건 미안하게 됐군.”
“전혀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닙니다만.”
“뭐 결과적으로 검은 마녀 뿐 만이 아니라, 내가 너의 뒤에 있다는 걸 주위의 귀족들에게 알린 셈인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지 않나. 적당히 넘어가도록 하지.”
“푸흡.”
“…설마?”
참지 못하고 터진 목소리에 은현이 매서운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린 엘레노아를 노려보았다.
이전 베르만 자작의 치료를 부탁했을 때,엘레노아의 노기어린 표정에 대고 은현이 했던 대사와 똑같지 않은가.
은현은 곧장 이것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의도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지금 이런 식으로 복수 하겠다, 이겁니까?”
“후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필사적으로 시치미를 떼는 엘레노아를 노려보기를 몇 초 후, 은현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제가 졌습니다. 이렇게 뒤끝이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네요.”
“칭찬, 감사히 받아드리도록 하죠.”
진귀한 것을 봤다는 표정을 짓던 아브로스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은현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아….”
아브로스가 에린을 응시하자, 에린 또한 작게 신음을 내뱉으며 아브로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건 처음이군.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의 당주, 아브로스 아르미타스라고 한다. 네 오빠와 집안을 망친 남자의 아버지이기도 하지.”
“에, 에린 헤르샤라고 합니다. 공작…님.”
“나를 원망하는 가?”
짧은 아브로스의 물음이었지만, 에린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