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080. 역전된 관계(2)
“…가자.”
“뭐?”
“진찰해주자. 현아.”
“그래.”
에린의 선택을 들은 은현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더욱 당혹스러웠던 것은 자신의 부탁을 승낙해준 마르바 쪽이었다.
“정말로…?”
“응….”
에린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르바와시선을 애써 피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게 행선지가 결정된 세 사람이 마차 안에 탑승하여 저택을 향하는 동안, 마차 안에는 무거운 공기와 함께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어색해….’
그런 마차 안의 공기가 불편해진 마르바는 자신의 집안의 마차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장 불편한 공기를 맛봐야한다는 것이 이상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속하게 제일 불편한 상대인 에린에게 선택권을 넘겨버린 은현과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것인지 생각을 알 수 없는 에린의 눈치를 살피며, 마르바는 이 불편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의 집에 도착하기를 속으로 빌었다.
저택을 방문하고 은현과 에린을 맞이해준 베르만 자작부인은 두 사람을 마르바가 에린을 보았던 것처럼,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의사라기엔 너무 젊고 환자를 진찰해본 경험도 없어 보이는 어디서 이상한 남자를 데려와서는 갑작스레 자신의 아버지의 상태를 봐줄 사람을 데려왔다고 설명하는 딸을 다그칠 뿐이었다.
“마르바, 정말로 아버지를 고쳐줄 수 있는 의사를 데려온 게 맞니? 의사라기엔 너무….”
사기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섞인 시선으로 은현을 흘끗 바라본 베르만 자작부인이 걱정을 담은 목소리로 재차 확인했다.
“맞아요. 이 사람이 전에 이야기했던 그분이에요. 그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특징하고도 일치하잖아요. 젊은 남자에, 은백색의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아무리 그래도 저 사람은 너무…젊잖니.”
“그건 그렇지만….”
자고로 의사란 환자의 병을 고치고 아픈 곳을 낫게 해주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
가벼운 병이나 상처부터, 심각한 상태를 유발시키거나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질병들까지, 인간의 몸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병과 상처들은 수십에서 수백 가지까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때문에 의사들이 다뤄야하는 분야 또한 다양하며, 의사들의 역량이 가장 중요시되는 직업이기도 한데, 갑작스레 딸이 데리고 온 20대 초반의 나이어린 남자가 남편을 치료해줄 의사라고 하니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작부인. 부인의 그 의심은 정당합니다. 하지만 뭔가 대가를 바라고 온 것도 아니며, 순순히 따님의 부탁을 받고 이렇게 찾아온것이니, 한 번 속는 셈 치고 맡겨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마르바는 정중하고 예의를 차린 격식 있는 어조에 자신의 목을 졸라 숨을 넘어가게 했던 과거와는 딴판인 은현의 모습에 온 몸이 소름이 돋을 뻔했지만,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는 그 모습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죠.”
매우 수상한 남자였지만, 일단은 딸인 마르바가 데려온 사람이기에, 베르만 자작부인은 마지못해 남편의 진찰을 허락했다.
“너는 이 편지를 좀 전달해주고 와.”
“편지요?”
“빨리.”
“아, 알겠어요!”
환자인 베르만 자작이 누워있는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은현이 편지를 하나 쓰고는 곧장 마르바에게 건 내어 전달할 것을 요구했다.
질문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어조로 은현이 말하자 마르바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저택을 나갔다.
“그럼 이제 한 번 봐볼까?”
“뭘 하려고?”
“상태를 봐야지. 이리 와봐.”
“응?”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는 은현의 행동에 에린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종종걸음으로 은현에게 다가갔다.
“지금 이 환자의 상태가 어때 보여?”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버리고, 뼈만 남은 것 같은 앙상한 몸 상태는 마치 생기가 다 빨려버려 말라비틀어진 거목과도 같다.
“으음, 마치 공기가 다 빠진 풍선같…아, 아아! 죄송해요! 그, 그게 지금 자작님의 상태가 그렇게 우스꽝스럽다는 게 아니라요! 그러니까 그….”
눈살을 찌푸리는 자작부인의 표정을 눈치 챈 에린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허우적댄다.
“아니. 괜찮단다.”
“이건 자작님에 대한 일이니, 자작부인께도함께 설명드릴 예정이었습니다. 베르만 자작의 현 상태는 이 아이가 말한 대로, 몸 안의 마나가 모두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로 인해, 쇠약해진 몸에 병이 들어선 것이죠.”
“그이를 진찰했던 의사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정말로…의사가 맞는 것 같군요.”
“씁쓸하게도 자주 오해받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일단은 의학적 지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맞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모호한 답변에 자작부인이 더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그런 의심 섞인 시선을 깔끔히 무시하고 은현이 침대에 누워있는 베르만 자작의 잠옷 단추를 풀더니,그의 상반신을 풀어헤쳐 맨살을 들어내게 만들었다.
“앗.”
깜짝 놀란 에린이 고개를 돌려 베르만 자작의 상반신에게서 시선을 회피하려 했지만, 은현의 따끔한 일침이 날아온다.
“어딜 보는 거야. 여길 봐야지.”
“하, 하지만 귀족의 맨 몸을 보는 건 그…명예에.”
“우린 지금 이 사람을 치료하러 온 거야. 환자의 몸 상태도 살펴보지 않고 어떻게 치료하려고?”
“난 의사도 아니잖아.”
“네 선택으로 이곳에 온 거야. 잔말 말고 시선 떼지 마.”
“응….”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에린은 베르만 자작부인의 눈치를 보았다.
복잡한 시선으로 은현과 에린을 바라보는 자작부인이마지못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 에린은 은현의 말에 집중할 수 있었다.
“병도 다른 시각으로 보면 싸움하고 똑같아. 인간의 몸은 본능적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주위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되어있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자,”
“응.”
“만약 단단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평소에는 침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장소가 있어. 그런데 그 장소를 지키는 단단한성벽이 어떤 이유로 파괴되어 허물어져버린 상태야. ‘질병’의 입장에서는 내부를 수호하는 성벽이라는 경계가 사라진 지금이 적기라는 소리지.”
사람의 몸은 본래 쉽게 병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쇠약해진 신체 능력의 급격한 저하로 면역력이 떨어진 지금의 상태라면, 질병이 들어서기 가장 최적의 조건을 가진 상태이기도 했다.
“응.”
에린은 고개를 주억이며 은현의 설명을 계속해서 들었다.
“결국에는 ‘질병’이 내부에 들어서게 되고 마력과 함께 쇠약해진 체력이라는 ‘성벽’이 무너진 지금, ‘사람의 몸’인 그 장소를 갉아먹게 되면서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질병’에 잠식된 사람을 구할 수가 있을까?”
은현이 던진 질문에 에린은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성벽이 무너지고 적이 이미 내부에 침투를 해버린 상황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적 내부의 소탕이 아닐까.
“가장 먼저 내부에 자리 잡은 질병을 없애고.”
“없애고?”
“또 다시 질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시 성벽을 쌓아올려야 하지 않을까?”
“정답이야. 잘했어.”
“헤헤.”
은현이 미소 지으며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에린이 배시시 웃으며 은현의 손길을 즐겼다.
“말씀드린 대로, 해결 방법은 무척이나 간단합니다만, 다른 의사선생님들이 이 방법을 못해서 해결을 못했을 리가 없죠.”
“맞아요. 지금까지 모두 세 명의 의사들이 다녀갔지만 모두 자신들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고는포기하며 이 저택을 나갔어요. 그래서 당신의 말도 믿지 않았죠.”
“확실히, 지금의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만.”
지구의 문명 속의 기술들을 이용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은현은 곧장 ‘복제’의 권능을 사용해 손에 약물이 든 주사기를 소환했다.
본적도 없는 처음 보는 형태의 물건이 은현의 손에 나타나자, 자작부인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건…뭐죠? 끝에 기다란 바늘 같은 게…?”
“지금부터 제가 하려는 치료는 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저만의 치료법입니다. 자작부인께서는 이곳에서 제가 어떤 치료를 통해 베르만 자작을 치료했는지, 비밀을 보장해주실 수 있습니까?”
자작부인의 얼굴에 갈등이 서리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말은 그것을 알고 있는 이도 없을뿐더러, 그것이 시행되었던 적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입증되지 않는 방법을 자신의 남편에게 사용한다는 것이 매우 꺼렸던 자작부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의 제안에 동의를 했고, 자작부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은현이 망설임 없이 베르만 자작의 손목에 주사바늘을 꽂아넣었다.
“으윽….”
손목에 기다란 바늘이 그대로 관통되는 광경을 본 에린이 인상을 찡그렸다.
엄지로 피스톤을 천천히 밀며 주사통 안에 담겨있는 약물을 천천히 베르만 자작의 몸 안으로 주입시킨다.
약물의 주입이 다 끝나자 주사기를 빼고는 권능으로 복제해낸 작은 솜뭉치를 손목에 가져다대고 끈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베르만 자작의 체내에 질병을 잡아내는 약물을 주입시켰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 3일에서 5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겠죠. 조만간 경과를 보기 위해 다시 한 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자작부인은 은현과 에린이 평민 출신이라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남편의 회복을도와준 것에 대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준남작 가계의 여식인 그녀는 이곳, 베르만 자작가에 시집을 온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고쳐준 은인으로 생각할 뿐 평민이라는 신분의 차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이걸로…이 집안도 기울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몸의 회복에 필요한 약재들을 적어드릴 테니, 그것들을 구해 달여서 자작께 먹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명심하겠다는 말과 함께 은현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자작부인의 배웅을 받아, 은현과 에린은 자작 저택을 나오는 길에, 편지를 전송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르바와 마주쳤다.
자작부인에게 이야기했던 것과 똑같이, 베르만 자작의 상태를 전달하자, 마르바의 안색이 크게 밝아지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감사의 인사는 너희 아버지를치료하는 걸 선택한 에린에게 해야지.”
“어?”
심드렁하게 에린에게로 감사의 화살을 돌리자, 지목당한 에린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마르바와 어색한 시선을 교환했다.
불안해진 마르바가 에린에게 물었다.
“나한테…바라는 게 있는 거야?”
“아니.”
“그럼…어째서?”
어째서 자신의 아버지를 치료하자는 선택을 내린 것인지 묻는 마르바의 질문에 에린이 답한다.
“저 사람도 벌은 받아야 하잖아.”
“…….”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상냥하지 않은대답에 마르바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표정을 굳혔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단지…그게 저런 식의 죽음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몇 일전, 은현이 재판을 받는 도중, 많은 귀족들 앞에서 했던 말이기도 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한다.
그것은 흑마법을 배운 자신의 오빠에게도 해당됐던 말이기도 했다.
단지 은현은 엘빈이 받았던 벌이 지었던 죄에 비해서 너무 무겁고 가중된 처벌이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세간에 떠도는 엘빈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상황을 조장했던 인물이 은현 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린은 그 사실에 은현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원망은 했었지만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이 나라에 혼란이 오는 것이 막기 위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은현은 에린에게 평생의 숙원을 던져준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엘빈의 오명을 네 스스로 벗겨내라.’라는 숙원을.
베르만 자작 또한 마찬가지다.
“자작부인께서는 네 아버지나 네가 해왔던 행동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더라.”
“윽….”
베르만 자작이 레니온 헤르샤의 배임횡령을 도운 사실이나, 아이테르에서 에린에게 일삼았던 마르바의 폭행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것을 지적당한 마르바가 몸을 움찔 떨었다.
“네 아버지나 네가 해왔던 일에 대해서 용서를 한 건 아니야. 단지….”
에린은 잠시 말을 끊고 뒤를 돌아보며 베르만 자작가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거니까.”
에린이 원한 벌은 죽음으로 죄를 갚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서 합당한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살린 거야.”
그것이 생각해낸 가장 자신의 마음에 드는 벌이라고, 에린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