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079. 역전된 관계(1)
재판은 우여곡절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현이 처형되기는커녕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지며 끝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에린의 집안인 헤르샤 가문의 작위가 되돌아왔다는 것.
이것은 엘빈의 명복을 빌어주고 그에게 씌워진 오명을 씻어내기 위한 에린의 첫걸음을 상징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페르니아스 왕국 안에서 향상된 에린의 입지다.
일리아나와 알렉스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왕국의 귀족들을 습격한 악마를 처치했다는 공적은 적어도 아이테르를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위용과도 같았으니, 왕국 안은 물론, 아이테르 안에서의 에린에 대한 입지는 더더욱 향상된 것이다.
“그래서…? 또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
아이테르의 학교장, 올리버 바오트만이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의 학교장실을 방문한 은현을 보며 묻는다.
은현이 피식 웃으며 그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제 얼굴이 보기 그렇게 싫으신가봅니다.”
“그쪽이 저질러 놓은 일들이 한 둘이 아니잖소. 솔직히 재판장에서 그 난리를 피운 중심에 있던 그쪽과 이렇게 독대를 하는 자리 자체가 불편하기 그지없소. 그대가 나를 찾아오는 용건은 하나같이 정상적인 용건이 아니지 않소?”
모두 큰 파란이 있었던 사건 이후에 은현이 찾아오는 것에, 은현이 또 무슨 무리한 요구를 해올지 모르던 올리버는 은현을 잔뜩 경계하는 기색이다.
재판장에서 은현의 처형에 대한 재판을 지켜본 것은 올리버 또한 마찬가지.
곧 자신이 사형당할 위기에 놓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고 공개재판의 진행자였던 오르바 백작을 말로 농락한 것도 모자라, 재판장 안의 분위기를 주도했던 은현의 모습은 굉장히 주도면밀했고 도저히 평민 신분의 젊은 청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남자가 재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굳이 이렇게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어찌 경계를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오늘 이렇게 학교장님을 찾아뵌 이유는 에린 때문입니다.”
“그 아이에게 또…무언가 문제가 생겼소…?”
혹시 이전처럼 그녀를 괴롭히는 학생들이 또 나타난 것은 아닐까.
만약 정말로 그런 학생들이 나타난 것이라면, 이렇게 자신을 찾아온 은현은 이미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또 다시 자신을 협박하러 온 것이 아닐까.
올리버는 식은땀을 흘렸다.
“에린의 몸 안에 페르니아스의 신목 아래에 묻혀있던 신수의 힘의 일부가 깃들었습니다.”
“뭐…라?”
순간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으나, 이내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은현에게 되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 에린의 몸 안에 신수인 구미호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대체…가능할리가…아니지.”
올리버는 심호흡을 하며 동요한 감정을 최대한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다.
은현에 의해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현상들이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보고, 듣고, 경험했던 올리버는 더 이상 은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은현을 통해서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모든 것은 자신의 부족한 지식과 그것을 애써 부정해오던 자신의 허영이 가득한 자만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이제는 올리버는 은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할 수가 없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주시오.”
고개를 끄덕인 은현은 올리버에게 에린의 몸 안에 신수의 힘의일부가 깃들었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은현이 말할 때마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몇몇 흥미롭거나 감탄한 추임새를 넣으며 은현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군…. 실종 사건 당시 몇 일 동안 그 결계 안에 갇혀있었을 때, 그때 신목을 통해서 신수의 힘이 그 학생의 몸에….”
말도 안 되는 사실이라기엔 너무나도 자세하고 은현이라는 자가 말하는 사실이라기에 신빙성은 차고 넘쳤다.
애초에 3개월 가까운 짧은 시간 동안, 에린이 아이테르 안에서 놀라운성장과 함께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으며, 무려 페르닌의 귀족들을 습격했던 악마를 잡은 공적까지 세우지 않았는가.
터무니없는 성장속도와 나이 어린 소녀가 쌓은 것이라기엔 믿을 수 없는 공적.
그녀의 성장과 힘의 근원이 신수에게서 물려받은 힘의 일부였다면 납득이 갔다.
“하지만…그렇기에 곤란하오.”
다른 이도 아닌 에린이었기에, 이것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왜냐하면 이미 그녀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 학생들이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담당 교수인 세실리아에게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는 바에 따르면, 현재 에린이 속해있는 세실리아의 반은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안의 분위기는 최악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을 뛰어넘는 과도한 성장과 악마 사냥에 성공하면서, 그녀의 명성이 학교 전체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평소 그녀를 괴롭히고 조롱하던 귀족가의 자제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좋은 부분이 아니었다.
“왜 하필이면 또 그 학생에게….”
“제가 학교장님께 이 이야기를 알려드리는 이유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일?”
“앞으로 에린의 앞에는 아마 많은 학생들의 질투와 시기를 한 몸에 받으며 걸어가야 하는 힘든 길이 있겠죠. 그 아이의 오빠인 엘빈이 걸어갔던 길처럼.”
자신보다 뛰어난 초신성의 등장에 평민이라는 신분을 들먹이고, 있지도 않은 소문을 만들어 음해하고,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며 찍어 누르는 과정들.
“지금 에린은 엘빈의 경우와 굉장히 유사합니다. 유사하다 못해 아마 엘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겁니다. 졸업하기까지 한참 남았는데, 악마 사냥에 대한 공적과 명성으로 벌써부터 많은 이들의 주목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으니까요. 좋든 싫든 많은 사람들이 에린을 주목하게 될 거고, 그 아이는 그걸 모두 이겨나가야 합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하지만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억울한 상황에 놓여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그 아이에 대한 판단을 최대한 공정히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쪽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뭐, 저도 어쩔 수 없지요. 만약 어쩌다가 에린의 몸 안에 깃든 힘의 정체가 이 학교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신목과 신수에게서 물려받은 힘이라는 것이 알려진다면…그건 학교장님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겠지요?”
싱긋 웃어 보이는 은현의 저 얼굴이 너무나도 싫었던 올리버는 마치 벌레를 씹은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은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현재 에린의 몸 상태에 대해서 아는 인물은 눈앞의 은현이라는 남자와 자신, 검은 마녀, 그리고 어쩌면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사람과 올리비온 후작 정도.
만약 에린에 대한 힘의 근원을 통해서 신수에 대한 존재가 왕가를 비롯해, 세상에 퍼지게 된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에린 뿐만이 아니라, 이 학교의 책임자인 올리버 또한마찬가지다.
좋든 싫든 에린과 자신은 서로가 비밀을 지키며 서로를 도와야하는 공생관계가 형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또 다시 이렇게 거미줄의 실이 엮이듯이 자신을 엮어 강제적으로 은현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이다.
“알겠소….”
올리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의 말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언젠가 한 번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네요.”
“그쪽과 더 이상 엮이는 것은 절대로 싫소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피식 웃어 보인 은현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 내고 그대로 학교장실을 나왔다.
“슬슬 끝날 시간인데.”
은현은 곧장 건물을 나와 학교의 정문에서 기대어 에린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저기요.”
“음?”
은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인가 싶어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한 여학생을 본 은현은 자신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이 눈앞의 여학생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그 여학생의 얼굴 또한 은현의 기억 속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다지 서로 마주보고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
여학생의 이름은 마르바 베르만, 이전 에린을 괴롭혔던 세 여학생 중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여학생으로, 은현에게 살해위협까지 받았던 여학생이었다.
아직도 은현의 얼굴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마르바는 양팔로자신의 팔을 감싸며 조금씩 떨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좀 봐주세요.”
“베르만 자작?”
“당신이 이번 페르닌에서 일어난 귀족 습격 사건의 피해자인 귀족들의 치료방법을 의사에게 전했다는 사실을 들었어요.”
“아아, 그때.”
은현은 리오드와 함께 네 번째 피해자를 만났을 때, 은현의 조언을 듣고 꺼져가는 불씨가 확 불타오르기 시작하듯 굉장히 의욕적으로 변모한 의사를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베르만 자작 또한 귀족 습격 사건의 피해자라는 사실까지.
베르만 자작은 레니온 헤르샤의 배임 횡령당시, 그가 회계정보를 조작하는 것을 눈감아주고 함께 금화를 빼돌렸던 전적이 있었던 것으로 정신조작 능력이특기였던 서큐버스가 그 정보를 입수하고 습격 사건의 범인을 에린으로 뒤집어씌우기 위해 일부러 베르만 자작을 습격하여 노린 바가 있었다.
“제발…저희 아버지의 진찰을 한 번만 해주세요.”
지금의 마르바의 모습은 이전 에린을 괴롭힐 때의 모습은 사라져버리고, 필요하다면 은현의 바짓가랑이라도 부여잡을 기세로 굉장히 절박한 모습이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서 의사들이 신경을 써서 관리를 해줄 텐데. 굳이 나에게 찾아올 이유가 있나?”
“그 습격 사건으로 인해 기력이 많이 쇠해지시면서 다른 합병증들이 도지셨어요.”
“더더욱 내가 관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
“제발요! 아버지를 치료했던 그 의사가 어쩌면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했단 말이에요!”
“안 돼.”
은현은 단호히 마르바의 부탁을 거절했다.
습격을 받은 피해자들을 꼴좋다는 식으로 생각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치료해줄 마음도 딱히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뿌린 업보대로, 그녀 자신이 그 업보를 모조리 되돌아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이런 생각을 내가 한다는 것도 웃기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허탈함에 피식 웃음을 짓고 많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소수의 동료들과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해온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 아닌가.
‘언젠가는 나도 업보를 모조리 되돌아오는 순간이 오겠지.’
그때는 절대로 자신은 편하게 죽을 수 있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을 것이라, 은현은 확신하고 있었다.
[아이야. 너무 슬픈 생각만 하지 말거라.]
‘여신님.’
상냥하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베르단디의 모습에 은현은 눈을 감았다.
짧은 고민 끝에, 은현은 결심이 선 얼굴로 마르바를 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조건을 걸도록 하죠.”
“조…건?”
“만약에 에린이, 당신의 아버지를 진찰하는 것을 승낙한다면. 저도 당신의 아버지를 진찰해보도록 하죠.”
“…….”
기대감이 어렸던 마르바의 얼굴이 단숨에 구겨졌다.
그녀 또한 에린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걔가…저를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어요.”
작위가 몰수되어 평민이라는 신분으로 강등되어버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오빠가 모두 죽어 혼자가 된 에린을 가장 앞에서 괴롭힌 학생이 바로 마르바였다.
그 사실을 마르바 또한 알고 있었기에, 차마 지금의 에린에게 은현을 소개해 달라는 목적으로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은현과 에린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마르바가 에린을 통해서가 아닌, 은현을 직접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하는 이유도 지금의 에린에게 은현을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기 껄끄러웠던 것이 원인이었기 때문.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은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이테르 건물을 응시했다.
이미 몇몇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하교를 위해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고, 그들 중에는 당연히 에린의 모습 또한 있었다.
에린 또한 정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은현의 모습을 보고, 눈에 띄게 안색이 밝아져 은현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현아! 어…?”
은현의 옆에 서있는 마르바 베르만을 뒤늦게 발견한 에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둘이 같이 있냐는 의문어린 시선을 은현에게 보내자, 은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 학생이 나한테 부탁하고 싶다는 일이 있는데.”
“부탁하고 싶은…일?”
“난 그 부탁의 결정권을 너한테 맡기려고 해.”
“응…?”
은현의 말에 에린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르바를 바라보았다.
에린의 시선이 껄끄러웠는지 자신의 한쪽 팔을 꽉 붙잡은 채로, 고개를 돌려 에린과 애써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마르바의 모습은 평소 귀족으로서의 소양을 강조하고 신분을 내세우며 자신을 핍박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할까?”
“그게 무슨….”
“이 녀석의 부탁 들어줄까? 말까?”
“…….”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은현이 에린에게 대답을 촉구하자,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맴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