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073. 소녀의 성장(2)
“저건….”
알렉스는 마지막에 그녀가 사용했던 기술을 보고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에게 배운 거지?”
동작하나하나가 세련되고 정밀한 숙련자의 기백과 움직임을 연상시켰다.
검을 잡아본지 3개월 조금 지난 소녀의 경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렉스는 확신했다.
은현은 아니다.
그는 정말로 에린에게 기초적인 체력과 마력 단련, 운용방법, 그리고 검술의 초보 딱지를 간신히 떼어줄 수 있는 교육정도 밖에 하지 않았고 애초에 그 이상을 가르쳐준다고 해도 초보자나 다름없던 에린에게도 교육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가 존재했다.
하지만 저 검술과 움직임은 초보자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어린 소녀의 신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폭발적인 스피드를 만들어내며 돌진하는 에린의 모습은 마치 사나운 야생마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레이피어로 악마의 목을 꿰뚫어버리는 그녀의 공격은 매서운 눈빛으로 먹이를 낚아채는 맹금류와도 같다.
어느 모로 보나, 전투에 닳고 닳은 영웅의 일면을 보는 것만 같았던 알렉스는 그녀에 대한 인식을 고쳐야만 했다.
‘이제는 학생의 수준이 아니다.’
악마의 목을 꿰뚫는 전사의 모습을 한 그녀가 17살의 어린 소녀라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반면 알렉스의 옆에서 악마와 소녀의 싸움을 관전하던 또 한 명의 여성은 에린의 다른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흐응, 저게 현이가 말한 ‘에너지 드레인’이구나.”
정신체도 결국엔 마력과 영혼으로 구성된 에너지의 집합체이기에, ‘흡정’계열의 능력중에서 최상위의 능력에 속하는 구미호의 에너지드레인에 저항도 하지못하고 흡수되어가는 서큐버스의 영혼.
죽기 직전까지 절규를 하며 목숨을 구걸하던 그녀의 애원을 에린은 망설임 없이 흡수해버렸다.
쓰러뜨릴 당시의 리라의 몸 안에는 일리아나에 의해서 남아있는 마력을 모두 사용해버려 고갈된 상태였지만, 악마의 핵심 근원이 되는 정신체를 흡수해버렸으니,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으로 치환이 되어 에린의 몸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으…으!”
에린의 손에 쥐어져 있던 서큐버스, 리라의 형체가 완전히 사라져 에린의 몸 안에 흡수되고, 갑작스레 에린이 레이피어를 떨어뜨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행동이 이상함을 느낀 알렉스가 일리아나에게 의견을 구했다.
“에린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인간의 에너지를 흡수한 것도 아니고, 악마의 에너지를 흡수했는데. 원래 음식도 상한 걸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야.”
인간의 몸속에 존재하는 마나가 순수한 샘물 같은 자원이라고 친다면, 악마족의 몸속에 존재하는 마나는 자연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마나와는 다른 오염된 마나다.
인간이 몸에서 사용하는 마력의 색깔이 푸른 색깔의 계열이라면, 서큐버스 리라가 사용했던 마력은 검붉은 색깔의 마력이었다.
각각의 종족 안에 흐르는 피의 종류가 다른 것처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나의 성질 또한 틀릴 수밖에 없다.
“그건…괜찮은 겁니까? 당장 조치를 취해야….”
“내가 아니라, 저 아이 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정확히는 저 아이의 몸속에 있는 신수라는 존재가.’
“으…몸이….”
뜨겁다.
에린은 서큐버스의 영혼을 흡수하자마자 달아오르는 몸속의 뜨거운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마치 몸 안쪽 내부부터 자신의 몸이 불타는 것만 같다.
[집중하세요. 지금부터 흡수한 오염된 마나를 정화시킬 거에요.]
머릿속을 울리는 갤러해드의 목소리에 에린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지금까지 마력 운용 능력을 이렇게 까지 끌어올린 당신이라면 분명 할 수 있을거예요. 몸 안에 흐르고 있는 오염된 마나들을 한곳에 집중적으로 모으세요.]
천천히, 갤러해드의 설명대로 몸 안의 마력을 움직여 한곳에 집중시킨다.
말로설명을 해준다고 곧이곧대로 행할 수 있는 수준의 작업이 아니었지만, 에린은 갤러해드의 설명을 무리 없이 이해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갤러해드는 순조롭게 자신의 설명대로 방법을 이행하고 있는 에린의 실력에 내심 감탄했다.
‘아마 그 남자의 덕분이 아닐까.’
갤러해드는 폐창고에서 백귀야행의 병사로 현현한 자신을 쓰러뜨린 은현이라는 은색머리카락의 남성을 떠올렸다.
‘대단한 남자였지.’
일 대 아홉이라는 수의 차이를 극복하고 차례차례 자신과 동료들을 쓰러뜨린 남자에 대해 들었던 생각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은현이 보여주었던 검, 기술, 전술들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쌓아올린 은현만의 역사와도 같았다.
‘한 번만 더, 그와 겨뤄보고 싶다.’
패배에 대한 굴욕감 따위는 없었다.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무인(武人)’으로서의 호승심.
자신의 세검술이 은현에게 어디까지 통할 수 있을지 순수하게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백귀는 자신 뿐 만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가졌던 검사 백귀나, 창사, 대검사 백귀들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모두 은현과 다시 한 번 제대로 붙어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몇 백 년 만에 세상으로 나와, 싸움을 해보고 자신들이 일방적인 압살하는 것이 아닌 호적수, 또는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대면하고 백귀들의 기대감이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은현과 한 번만 더 겨뤄보고 싶다는 자신의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을 포함한 ‘백귀야행’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이 소녀가 하루라도 빨리 힘을 성장시키도록 도와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서 성장해주었으면, 최소한 우리 중 하나를 현현시킬 수 있을 정도까지는….’
에린이 모든 오염된 마나를 남김없이 체내의 한 곳에 모으자,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미호가 나섰다.
[호족 선술(狐族 仙術)]
[탁기정화]
악한 기운을 정화시키고 기운을 순결하고 깨끗한 기운으로 정제하는 술법.
고대에는 존재했지만, 이제는 사라진 지구 문명의 술법의 잔재였다.
“아….”
몸 안을 불태우던 뜨거운 감각이 사라지고 청량한 느낌이 감도는 마나들이 몸 안을 활보하기 시작하자, 에린이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윽고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다리가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리자 에린 쪽으로 일리아나와 알렉스가 걸어왔다.
“몸은 어떠니?”
“괘, 괜찮아요…. 조금 피곤해서….”
“흐응.”
비음을 내뱉으며 천천히 에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의 상태를 관찰한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생했어. 이번엔 아가가 한 건 했구나.”
“헤헤….”
일리아나가 에린을 칭찬했던 경우는 에린이 일리아나의 저택에 식객으로 살게 되면서 딱 두 번이 있었다.
첫 번째는 은현의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 눈물 한번 흘리지 않는 에린의독한 마음을 칭찬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은현을 도와 저택의 집안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에린의 눈치 빠른 싹싹함이 기특하다고 칭찬해줬을 때였다.
그렇기에 본의 아니게 칭찬에 매우 인색했던 일리아나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의 한마디를 건 내주는 것이 굉장히 기뻤다.
하지만 그런 일리아나의 칭찬보다도 가장 많이 자신을 칭찬해줬으면 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현이도 절 잘했다고 칭찬해줄까요?”
“걔한테 칭찬을 듣는 건 자면서 마법 술식을외우는 것만큼이나 쉬운데,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네.”
“전 그런 거 못하는 데요….”
“그만큼 널리고 널린 게 걔의 칭찬이란 뜻이야.”
훈련할 때를 제외하면 오냐오냐 모든 걸 다 받아주면서, 업어 키우는 은현과는 달리 일리아나는 에린이 뭘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방임주의에 가까웠다.
“그럼 이제 나가자.”
“네. 저 그런데….”
“왜?”
“어, 어떻게 나가나요? 저흴 이곳으로 끌고 온 악마는 제가 없애버렸는데….”
뭘 그런 걸 묻냐며 일리아나가 눈을 곱게 흘기며 에린을 바라보았다.
“그런 걸 걱정했으면 내가 너한테 그 악마를 죽이라고 시켰을까?”
“어, 아니요?”
우우웅
일리아나가 스태프를 바닥에 탁 내리치자, 그녀의 앞에 금이가기 시작하더니, 커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처음 그녀가 등장하면서 나타났던 균열과 비슷했다.
알렉스는 균열을 보며 놀란표정을 지었다.
“이게…출구입니까?”
“응.”
알렉스는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서큐버스 리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순수한 호기심에 일리아나에게 질문했다.
“그 악마는 저희를 끌고 오면서 저희에게 말했었습니다. 저희들을 밖으로 꺼내줄 수 있는 건 저희를 이곳으로 끌고 온 자신 밖에 없다고. 이것도 마녀님의 마법으로 만들어낸 출구인가요?”
“그 악마가 너희를 끌고 오면서 만들어진 통로를 없애지 않고 유지시켰을 뿐이야. 문을 열고, 닫고, 통로를 만드는 건 걔네들만이 가능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통로 자체를 이용하는 건 방법만 알면 인간 쪽에서도 할 수 있는 거지.”
애초에 서큐버스가 도주하려는 낌새를 눈치 채고, 출구를 틀어막아버린 것도 일리아나의 작품이다.
“그렇군요….”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작업들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알렉스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들어가.”
일리아나의 말에 따라 균열 속으로 몸을 던진 두 사람은 마치 꿈을 꾸기라도 한 듯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천천히 의식이 각성한 알렉스와 에린이 놀라서 몸을 일으켰고 서로를 바라보자, 자신들이 그동안 정말로 누워서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에 허탈감과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로…돌아왔다….”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에린이 중얼거리자 알렉스도 아까까지 있었던 ‘몽환의 숲’에서의 경험이 정말로 꿈속의 경험이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눈치였다.
“원래대로 돌아왔어….”
자신의 마력으로 구현되어 있었던 여우귀와 아홉 꼬리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 양,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다시 그때의 힘을 꺼내어 발동시켜보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구미호 상태’가 되었던 에린이 그때의 그 상태로 변신하는 방법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몸 안의 마력을 활성화시켜보아도 푸른색의 마나가 주위를 감쌀 뿐, 이전처럼 꼬리와 여우귀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어째서 자신에게 그 힘이 갑자기 발현된 건지, 머릿속으로 자신에게 세검술의 교육을 해준 여자는 누구인지 궁금한 것은 너무 많았지만, 이 의문을 해소해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일리아나도 모른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일어났으면, 어서 움직여.”
재촉하는 일리아나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알렉스와 에린의 몸이 반응했고 주저앉아 있던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알렉스는 일리아나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물었다.
“저 악마를 처리했다는 걸 공식적으로 발표해야지.”
“하지만 그 악마는 이미 제가 없애버렸는데요?”
“그건 어디까지나 꿈의 세계 속의 정신체였잖아. 본체는 따로 있지.”
일리아나가 검지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자, 두 사람도 그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
눈을 감고 다소곳이 누워있는 박쥐 날개를 가진 여자를 발견한 에린이 탄성을 내질렀다.
꿈의 세계에 있는 동안 현실의 본체는 잠에 빠진다는 패널티는 인간 쪽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간도 전혀 지나지 않았어.”
하늘의 달빛을 보며, 아직 자신들이 서큐버스와 조우했던 시기부터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일단 저 서큐버스의 몸은 영혼이 없는 빈껍데기니까,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목만 베어서 리오드에게로 가져가.”
“알겠습니다.”
알렉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아나의 말에 따랐다.
그 또한 은현의 계획에 일부나마 동참한 셈이었으니, 은현의 생각대로 움직여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받을 대가를 생각하며, 알렉스는 껍데기만 남아 시체나 다름없는 악마의 머리를 베었다.
◆ ◆ ◆
수도 페르닌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귀족 연쇄 습격 사건의 범인을 죽임으로써, 사건의 종지부를 찍고 사흘이 지났다.
연쇄 습격 사건의 범인이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악마, 서큐버스였다는 사실은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동안 ‘정말로 악마가 존재할 리가 없다.’, ‘악마가 잠입해있다는 의혹이 나돌아서도 안 된다.’ 등 많은 귀족들이 이 사실을 부정하고, 숨겼던 것에 대해서, 그 계획을 옹호했던 많은 귀족들이 비난과 질타를 받았다.
그리고 이 사건의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은 바로 은색머리카락을 가진 정체불명의 남자와, 헤르샤 준남작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에린 헤르샤’였다.
그 두 사람 중 한 명인 은현은 현재 수갑이 채여진 채로 중앙의 단상위에 서 있는 상태였다.
넓은 홀의 중앙에 위치한 단상 위에 서있는 은현에게 홀 안에 배치된 좌석에 앉아있는 수많은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시선 속에는 이 나라에서 현재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시선도 섞여있다.
‘저 여자가 디아네 페르니아스.’
노쇠한 국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통해 나라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여자.
은현과 마주보는 위치.
중앙 끝 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옥좌에 앉아있는 디아네 왕비와 은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디아네 여왕이 은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간을 좁혔다.
“흠, 흠!”
디아네 왕비가 앉아있는 옥좌보다 조금 더 아래에 위치한 단상위에 서 있는 중년 남자가 헛기침을 하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죄인 은현에 대한 청문회 및 공개 재판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중년 남자의 선언을 시작으로, 중앙의 단상에 은현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한 재판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