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071. 고위 자릿수 마법사(2)
활활 타오르는 소운석 덩어리들이 추락하면서 만드는 지면들은 하나같이 멀쩡한 곳이 없었다.
운석이 충돌하면서 움푹 파인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성이 되는 가하면, 어떤 곳은 고열로 인해 지면이 녹아내려 형성된 용암지대도 있었다.
단 하나의 마법만으로 거대한 화산지대와도 같은 불지옥을 만들어버리는 그 광경은 마치 정말로 지상에 악마가 나타나 온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쩐다….”
일리아나가 펼친 보호막 안에서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에린의 머릿속에는 순수한 감탄만이 존재했었다.
이런 광경을 단 한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이야기로만 들었던 대륙의 영웅의 능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행운에 할 말을 잃는다.
알렉스 또한 에린과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었다.
“쩐다? 그게 무슨 말이니?”
“대, 대단하다는 뜻이에요!”
두 눈을 치켜뜨며 자신에게 묻자, 에린이 눈을 반짝 빛내며 바로 대답했다.
“흐응, 요즘 애들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작게 투덜거린 일리아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운석 낙하의 중심지였던 악마를 응시했다.
“살아있네.”
“젠장…젠장, 젠장, 젠장, 젠장!”
검게 그을린 피부와 화상의 흔적들이 보이는 서큐버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욕을 내뱉고 있었다.
서서히 상처들이 원래대로 복구되고 본래의 상태를 되찾아가고 있지만, 터무니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일리아나를 노려보며, 이성을 잃은 악마가 작게 중얼거린다.
“죽여 버릴 거야. 절대로 죽여 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그 그림자를 조종하는 흑마법. 정말 대단하긴 하네.”
증오심이 깃든 악마의 시선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하는 일리아나가 운석과의 충돌로 인한 물리적인 공격을 막아내는 그녀의 그림자에 감탄한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처음보다 명백히 느려진 악마의 회복속도를 보며 일리아나가 그녀의 상태를 짐작했다.
‘슬슬인가.’
“뭐, 내가 너를 끝내도 상관없지만. 그건 내 역할이 아니라서.”
“뭐?”
“아가.”
“네? 저, 저요…?”
구미호 상태로 각성한 모습의 에린을 부른 일리아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의 상태를 관찰했다.
신수의 힘의 일부를 이어받아 각성한 모습, 언젠가는 각성하게 될 때를 대비해 자신에게 마법의 교육을 맡겼던 은현의 말을 떠올렸다.
- 마법에 관해서는 네가 스페셜리스트니까. 적어도 틀은 잡아 줄 수 있지?
그것이 설마 지금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감옥 안에서 은현에게 대강의 이야기는 듣고 나왔다.
그녀의 몸 안에 있는 신수와 그 신수의 능력들 또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힘의 존재에 일리아나는 깊은 흥미를 품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탐구심을 발휘해야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현이가 왜 아가한테 저걸 처리하라고 한 건지 대강 알겠네.”
“네?”
“아가가 처리하렴.”
“네!?”
뜬금없는 일리아나의 명령에 적군이고 아군이고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알 수 없는 의문 섞인 새된 소리를 내뱉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일리아나님이 처리해주시면…!”
“마력은 어느 정도 소모시켰어. 이제 저 그림자를 이용한 방어마법은 사용하지 못하겠지. 이제부터는 순순히 물리적인 근접싸움의 승부야.”
간단히 설명하자면, 리라의 현재 상태는 MP가 고갈된 상태다.
리라는 자신의 마력과 꿈의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아무리 큰 데미지를 입어도 데미지를 입기 전의 상태로 상처를 수복시키는 것이 가능다.
어찌 본다면 은현의 사도의 권능인 ‘시간역행’과 비슷한 능력이지만, 리라의 능력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최상의 상태를 의도적으로 조율하여 만들어낼 수 있다는 차이가 존재했다.
현실이 아닌, 이곳 서큐버스들만을 위한 공간인 ‘몽환의 숲’안이라는 조건만 주어진다면, 어떤 면에서는 은현의 능력보다 서큐버스의 능력 쪽이 더욱 우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일리아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죽이지 않고, 리라를 빈사의 상태로 몰고 갔으며 회복에 자신의 마력을 쏟아 부음으로서 지금의 마력 고갈 상태가 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것은 에린이 직접 악마를 잡을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조건을 맞추기 위해 힘을 빼두기 위한 것이었다.
“그, 그래도 저는 아직….”
느닷없는 지목을 당한 에린에게는 그런 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그저 당황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현이는 내가 아니라 아가한테 저것의 처리를 맡겼어.”
“그건 맞지만….”
“저건 아가의 오빠를 그렇게 만든 원흉이나 마찬가지야. 틀려?”
“…맞아요.”
“그걸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맡길 거야? 넌 그걸 용납할 수 있어? 일이 다 끝나고 만족하면서 발 뻗고 잘 수 있어?”
“아니요.”
“그럼 아가가 해야지.”
“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단 부딪쳐. 현이가 설마 아가한테 불가능한 일을 시켰을 리 없잖니. 더럽게 힘든 일이면 몰라도.”
“그건…그렇죠.”
그 말에 에린은 쓰게 웃었다.
“저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너는…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네. 이건 저 아이를 성장시키기 위한 거니까. 구경이나 할래?”
일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알렉스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 중에 하나인 공작가의 아들이자, 입단한 것만으로도 가장 큰 명예를 거머쥐는 크라시르 근위기사단의 단원이었지만, 정작 이 자리에서는 벽에 걸린 그림신세인 것에 씁쓸한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배다른 형제의 무례한 행동으로 많은 고초를 겪어야했던 소녀가 어디까지 성장하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알렉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아나의 옆에 섰다.
일리아나가 눈짓으로 리라를 가리키자 결심이 선 에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향해 앞으로 걸어갔다.
“하…정말로 너 혼자서 날 상대하겠다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라고 여긴 리라가 크게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아무리 마력이 고갈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너 하나를 이기지 못할까!”
인간에게 무시를 당했던 것이 그녀의 자존심에 심하게 스크래치를 냈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감히 인간들 따위가 내 방해를 해!”
수년간 인간들에게서 흡정을 하여 모아왔던 대량의 마력들이 일리아나의 공격에 의해서 모두 소모되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야 말로 모으는 것은 힘들고 쓰는 것은 한순간이다.
수 년 간 인간들의 사회에 잠입하여 민간인들을 깨작깨작 습격하면서 들키지 않도록 힘을 모으고, 사회 속에 녹아들어 정보를 모으고, 인간들을 농락하면서 대량의 마력을 착취할 수 있도록 공을 들였던 자신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하물며 여태껏 모아왔던 마력들도 이렇게 날아가 버렸으니, 리라의 증오심 깃든 두 눈이 분풀이할 대상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에린을 지목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에린을 노려보며, 리라는 자신의 검을 뽑아들고 에린을 향해 겨누었다.
검붉은 마력이 리라의 주위를 요동치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을 정면으로 마주한 에린이 몸을 살짝 떨며 레이피어를 꽉 쥐며 리라를 향해 겨눴다.
온 몸의 피부가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끼며 잔뜩 긴장을 한 순간 에린의 머릿속으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자릿수 일반 마법]
[텔레파시]
[쫄지 마. 체내의 마력을 활성화 시키고, 신체를 강화해.]
‘네, 네!’
[상대는 이제저 그림자 마법을 유지할 수 없어. 이제부터는 완전히 물리적인 싸움뿐이야. 지금 신체와 검에 담은 마력이 현재 저 악마에게 남아있는 마력의 잔량이니까. 시간만 끌어도 점점 네가 유리해지는 거야.]
[난 싸움에는 문외한이지만, 마력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는 대강 알고 있으니까.]
일리아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자, 에린은 조금 놀랐으나 곧바로 냉정을 되찾고 마력을 활성화 시켜 신체를 강화해나갔다.
‘최고의 훈수’를 등에 업은 새로운 구미호 에린과, 몽환의 숲의 주인인 서큐버스 리라의 검들이 서로 맞부딪치며 두 존재의 싸움의 시작을 알렸다.
“마녀님께서는 검술에도 조예가 있으십니까?”
“아니.”
“그럼 도대체 정신감응으로 무슨 조언을….”
“내가 마법사라고 검을 맞부딪치는 물리적인 싸움에 조언을 못한다는 법은 또 없으니까.”
마법사도 아닌 은현이 마법사였던 일리아나를 가르쳤던 것처럼.
일리아나가 정신감응을 통해서 에린에게 조언해주고 있었던 것은 마력의 운용이었다.
이것은 마법사에게나, 무기를 사용하는 전사, 또는 모험가나 기사들에게나 마력의 운용은 목숨이 오가는 싸움 속에서 반드시 갖춰야하는 덕목과도 같다.
에린은 그동안 일리아나의 교육을 통해서 기초 마력량을 늘리는 훈련과 운용방법의 기본을 꾸준히 연습해왔다.
이것은 수많은 공격이 오가는 공방전 속에서 자신이 배운 것을 그대로 활용해야만 하는 심화과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순환이 느려졌어. 더 빨리.]
‘읏…네!’
서큐버스, 리라의 검격을 막아내는 것에 정신이 팔려 체내의 마력의 순환을 정체시키고 있던 것을 귀신 같이 알아본 마녀의 전음이 에린의 머릿속을 울리자, 에린이 이를 악물고 다시 체내의 마력을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마력을 순환시키는 것으로 신체를 강화시키는 것은 신체를 이용한 싸움에서 기초중의 기초다.
심장이 펌프질을 통해서 전신에 피를 공급하고 공급했던 피가 순환을 통해서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인위적으로 전신에 마력을 순환시키는 것으로 신체의 능력을 극대화 시킨다.
자신의 몸 전체에 마력을 전개하여 방어력을 강화시키는 신체 강화와는 다른, 인간의 근력과 민첩성을 강화시키는 신체 강화였다.
한번 신체에 마력의 장막을 펼치고 그것을 유지시키는 것과 끊임없이 신체의 마력을 움직여 순환시키는 두 신체 강화의 방식에는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쏟아야한다는 차이가 있었다.
마력의 순환을 지속시킨 상태에서 전투에 임하는 것은 종류가 다른 두 가지 작업을 왼손과 오른손을 이용해 각각 동시에 진행을 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정도 은현과 일리아나의 교육으로 마력의 순환에 대해 요령을 잡은 에린은 서로의 목숨을 건 생존의 사투 속에서 요령을 습관으로, 습관을 본능으로 조금씩 발전시키고 있었다.
카아앙!
처음으로 에린의 매서운 반격에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검을 틀어막은 리라의 몸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명백히 리라가 우세하여 에린을 밀어붙이던 초반과 다른 양상에 리라는 속으로 내심 초조해져만 갔다.
‘도대체 뭐야…. 이 녀석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강해지고 있잖아?’
처음엔 어색하기 짝이 없어 자신의 맹공을 힘겹게 받아 넘기던 에린의 검이 시간이 지날수록 리라의 검을 받아내고 반격을 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에린이 체내의 마력의 순환을 어느 정도 유지시키면서 전투에 임하는 것이 점점 목에 익숙해져갔기 때문이다.
일리아나와 알렉스가 그렇게 대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구미호와 서큐버스의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유지하고 있었다.
에린의 엄청난 성장 속도의 원인은 일리아나의 조언 뿐 만이 아닌, 또 다른 이의 조력이 존재이 원인.
[호족 선술(狐族 仙術)]
[백귀야행(百鬼夜行)]
에린의 전신이 푸른 불꽃으로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몸 안에 깃들어있던 신수의 힘의 일부가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구미호의 능력.
그 중 하나의 특성이 에린의 몸으로 발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 능력은 그녀의 몸속에 있던 신수, 미호가 에린이 백귀야행을 발현시킬 수 있도록 능력의 개방을 허가해주면서 에린이 무의식적으로 백귀 하나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제 막 각성했기에, 구미호로서의 소양이 떨어졌던 에린은 백귀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백귀의 형체를 유지할 수 없었다.
때문에 미호는 과감히 백귀의 육체 구성을 포기하고 혼만을 그녀의 몸 안에 빙의시켰다.
에린과 비슷한 종류의 무기인 세검사 백귀의 혼이 에린의 몸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반가워요. 나의 새로운 주인님.]
‘어…? 누, 누가…?’
일리아나가 아닌 다른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에 에린은 당황했다.
[제 이름은 갤러해드. 당신을 돕기 위해 원 주인님에 의해 소환되었어요.]
구미호에 의해 소환되었었던, 은현과 일 대 다수의 살벌한 전투를 벌인 전적이 있던 백귀 중 하나인 세검사 백귀의 혼이 에린의 머릿속에 빙의가 되어버린 것.
‘가, 갑자기 무슨….’
[설명하기 복잡하니까 일단 싸움에 집중하세요.]
‘네, 네!’
[내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이세요.]
에린의 레이피어, 세검술의 기초를 다져줄 수 있는 백귀로, 미호에게 선택되어 억지로 정착시킨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