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8화 〉068. 악마와의 조우(4) (68/730)



〈 68화 〉068. 악마와의 조우(4)

“왕녀가 이렇게 혼자 있어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지지기반도, 세력도 없는 무늬만 왕족이에요. 아까 나가면서 근위기사단장이 나한테 하는 소리  들었어요? 대놓고 그 왕비한테  일러바치겠다잖아요.”

“그거랑 왕녀님이 이곳에 저와 단 둘이 계시는 게 이유가 되지는 않는데요.”

“이 왕궁 안에만 있으면 내가 어디서  하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요. 심지어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왕궁 안에서도 나와 어머니 밖에 모르는 것 같은데. 감옥 안에 있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죄수 하나와 무슨 작당을 한들 신경이나 쓸까요?”

은현에 대한 존재는 이 왕국의 사람들도 모른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그의 정보는 검은마녀인 일리아나의 부하일 뿐이며, 자신의 능력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은현이 마녀의 연인이라는 사실 하나만 밝혀도, 왕국은 은현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왕가의 사람들  은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헬레나 후비와 그의 딸인 유리아 왕녀뿐이다.

“자, 이제 말해 봐요. 도대체  그랬어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유리아는 답답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은현에게 물었다.

“제가 뭘 어떻게 했는지를 설명해주지 않으시면 저도 뭔가를 대답해드리기 곤란합니다만.”

“시치미  생각이에요? 그  말이에요. 도대체 왜 감싸는 거예요?”

은현은 유리아가 누구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곧장 깨달았다.
유리아는 은현이 에린을 옹호하고 그녀를 석방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에린에 대해 알고 있군요.”

“그 아이는 위험해요.”

“왜 위험하다는 거죠?”

“그 아이는….”

순간 유리아는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발설하는 것이 맞을까, 고민하며 주저했지만, 이내 결심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구미호라는 신수의 힘을 이어받은 아이에요. 나중에 각성하게 되면서 페르닌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고요!”

“…….”

‘이건 또…. 설마?’

은현은 자신의 머리위에 떠있는 여신, 베르단디를 흘끗 바라보았다.

[아이의 생각이 맞는 것 같구나.]

“그건 왕녀님이 읽었던 ‘운명의 메르헨’ 속의 이야기, ‘미래시’에 에린의 이야기도 등장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아요.”

유리아는 심각한 얼굴로 은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의 메르헨’, ‘운명을 개척하는 메르헨’의 줄임말로, 유리아가 전생에 지구에서 읽었던 소설이다.
은현은 유리아의 전생의 기억 속에서 읽었던 소설의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는 것도 귀찮아져, 그냥 대놓고 미래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기구하게도 현재의 유리아는 그녀의 전생의 기억을 일깨운 신의 농간에 의해 이곳이 소설 속의 세계라고 어이가 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녀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틀리다.
이곳은 지구가 멸망한뒤에 신들에 의해 복구된 새로운 문명이 정착한 세계였으니까.
유리아가 가지고 있던 ‘운명의 메르헨’이라는 소설 속의 지식은 그저 앞으로 일어날 이 세계의 흐름 일부를 책으로 만들어서 과거에 보내진 것에 불과하다.
즉 그녀가 읽은 소설이라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일종의 ‘예언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애초부터 에린의 운명 또한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
그것도터무니없는 악역으로.

“하….”

마법은커녕 싸움도 할 줄 몰랐던  나약한 소녀가 수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려 하는 악역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은현이 헛웃음을 짓자, 이유를 모르던 유리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일단은 당신이 뭔가 생각이 있을 테니까,  아이를 풀어주는데 동의하긴 했지만요. 그 아이는 말이죠.”

유리아는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원작 소설 속의 지식을 은현에게 설명했다.
‘운명의 메르헨’ 속에서도 에린이 등장하여 신수의 힘을 각성하게 되는 시기도 공교롭게도 이 시기라고 한다.
아이테르에서도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던 에린이 갑작스레 등장하여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왕국의 예산을 빼돌리는 것이 들통나면서 배임횡령으로 처형을 당한 아버지.
아버지가 은닉시켜둔 금화들을 가지고 도주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 오빠.
이후 엘빈이 도주 과정에서 흑마법사였던 것이 밝혀져 아르티아의 단장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일하게 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존재인 오빠가 사망했다는 사실에 극심한 분노를 느낀 에린이 몸속에 잠들어 있던 신수의 힘으로 각성한다.
에린은 신수의 힘이자, 그들만의 고유 능력 중 하나인 ‘에너지 드레인’이라는 능력을 이용해서 귀족들을 습격하고, 그들에게서 방대한 양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것으로 조금씩 힘을 회복시키고, 이후 왕국의 수도인 페르닌 전체를 불태워버리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알렉스와 주인공의 파티가 에린을 죽임으로써, 그녀의 복수는 저지당하고 만다.
그것으로 자신의 가족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소녀의 복수극은 이뤄지지 못한 채 끝을 맞이한다.

“어이가 없죠? 아버지나 오빠나, 범죄를 저지르고, 나라를 위협하는 흑마법사였기 때문에 처형을 당한 건데. 그것으로 나라에 대해 복수심을 불타서 죄 없는 사람들까지 불태워 죽이려 하다니 말이죠.”

“…그 소설 인기 많았습니까?”

“네.  많았는데요? 광고도 엄청 했고, 인터넷에서도 자주 화제가 되었었어요. 아마 작가가 돈 엄청 벌었을 건데.”

“…….”

“왜, 왜 그래요?”

은현이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유리아가 당황하며물었다.

“도대체 개연성 같은 건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이야기 속에서는 어째서 에린의 오빠인 엘빈의 시점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다.
자연스레 독단행동으로 레니온 헤르샤의 비리를 주도했던 애슈턴의 이야기나, 어떻게 신수의 힘의 일부가 에린의  안으로 흘러들어왔는지, 등의 많은 이야기가 빠져있었다.
철저히 ‘주인공’, 또는 이야기 속에서 ‘승자’가 된 자들의 시점에서 기록된 이야기들이다.
아직도 이 세계가 소설 속의 세계라고 착각하고 있는 유리아의 입장에서는 ‘불합리한 이유’로 왕국의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려는 에린은 악인이었다.

‘이것 때문에 여신님이 에린의 운명을 나와 엮으신 거였구나.’

[알고 있었단다. 하지만 간섭할 수 없었기에, 아이가 관여하도록 운명의 실을 엮었지. 최종적으로 아이가  아이를 구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마음이 갈가리 찢긴 가엾은  소녀가 스스로를 망치고 자포자기 끝에 왕국을 불바다로 만들지 않도록.
이미 에린의몸을 잠식하고밖으로 나온 구미호라는 신수의 힘의 일부를 겪어본 은현이었다.

‘아마도 소설 속에서 중간에에린을 부추긴 건 그 악마의 짓이겠지.’

아마  악마는 에린에게 자신이 벌인 연쇄 습격 사건의 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많은 사람들을 습격하여 마력을 갈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악마의 예상과는 달리, 악마의 부추김으로 멘탈이 가루가 된 에린의 몸속에 있던 신수의 힘이 깨어났고, 그 결과 페르니아스의 초대 국왕에게 깊은 증오심을 키우고 있었던 구미호가 왕국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
구미호 처음부터  나라의 왕족들을 모두 몰살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니, 에린이 정말로 복수를 다짐했었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구미호에게 자신의 몸을 넘겼을지도 모른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아마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은현은 생각했다.
한 소녀의 운명은 은현을 만나서 개척되어 소설, 또는 예언이라는 미래의 흐름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커다란 운명의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실감했다.

“왕녀님.”

“네?”

“미리 말씀드리지만,  세계는 왕녀님이 읽으신 그 소설 속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은현은 에린과 유리아가 제대로 마주치기 직전에,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단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인식을 뜯어 고칠 필요가 있었다.

“왕녀님은 아셔야합니다. 자신의 여동생을 위해서, 자신의 미래조차도 포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한 ‘마법사의 이야기’를.”

◆  ◆

“진짜로 어쩌지…?”

에린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불안한 얼굴을 내비쳤다.

“그 녀석한테서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건가?”

감옥에서 나온 에린과 알렉스,  사람은 그저 행선지 없이 가만히 수도 안을 걷고 있었다.

“네…. 그냥 절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준비해놨다고만…했는데요?”

은현은 에린이 악마를 잡을 수 있는 대항 방법 중 하나라고만 설명했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거나 어딘가를 향하라고 지시는커녕 조언조차 주지 않았다.

“…일단은 너에게 사과부터 먼저 하도록 하지.”

“네?”

“나의 배다른 형이 너에게 저지른 일은 모두 들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정말로 면목이 없어.”

“아….”

느닷없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사과를  내자 에린은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알렉스의 사과를 거부했다.

“알렉스님한테 받아야하는 사과가 아니에요.  남자한테 받아야하는 사과잖아요. 그리고 이 일은 공작님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걸 알아요.”

에린은 한 번도 아브로스를 본 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집안의 사람인 애슈턴의 독단행동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엘레노아도 너에게 이렇게 사과를 했다가 거절을 당했다고 하던데 진짜였군.”

쓰게 웃는 알렉스가 숙인 허리를 폈다.

“그러게. 나였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

“누구냐!”

느닷없이 들려오는 고혹적인 음성과 함께 에린이 깜짝 놀라 소름이 돋았고, 알렉스는 곧바로 마력을 활성화시켜 신체를 강화하고 검을 빼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를 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던 알렉스는설마 하는 심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 쯤 넋을 잃고 볼 법한 육감적인 몸매와 매력적인 외모, 그리고 새하얀 피부의 살을 모두 드러내는 옷은 안 입은 것 마냥 못하다.
오로지 남성을 유혹하는 목적으로 구성된 외모들과 악마의 상징과도 같은  쌍의 박쥐 날개.
알렉스는 허공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입술에 침을 바르며 입맛을 다시는 서큐버스를 노려보았다.

“어머? 날 보자마자 적의를 드러낸 건 자기가 처음이야.”

“닥쳐라.”

“넌 굉장히 흥미로운 남자지만, 이번 용무는 네가 아니라 저 아이라서.”

“뭐?”

재미있다는 듯 꺄르르 웃는 서큐버스를 보고 냉담히 대꾸한 알렉스는 어째서 은현이 에린에게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은현은 저 악마가 에린을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대항하라는 것일까?
알렉스는 은현이나 자신의 아버지 또는 리오드와는 달리 악마와 싸워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에린 또한 마찬가지, 은현은 도대체 에린에게서 무슨 가능성을 보고 그녀에게 악마 사냥의 중대한 임무를 맡겼던 것일까.

“나한테?”

“응응. 얘, 나랑 같이 복수하지 않을래?”

“뭐…라고…?”

“우리가 같이 힘을 합쳐서 이 나라를 불태우는 거야!”

“그, 그게 무슨….”

“멈춰!”

낌새를 눈치  알렉스가 검을 휘둘러 서큐버스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지만, 그녀의 행동 쪽이 더 빨랐다.
싱긋 웃어 보인 악마, 서큐버스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려 에린의 이마를 건드렸다.

[안녕? 같이 공부하지 않을래?]

“아….”

에린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기억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서큐버스의 꿈을 조작하는 능력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추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학생과 남학생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함께하는 많은 추억들.
그 남학생은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알렉스의 검을 피하고 멀찍이 거리를 벌린 상태로 에린을 향해 계속 말을 건다.

“내 이름은 리라 바라노프야. 아이테르에서 엘빈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친구지.”

“오빠와….”

에린은 머릿속에 재생되는 수많은 엘빈의 웃는 얼굴을 생각하며 넋을 잃고 있었다.

“이건….”

‘좋지 않다.’라고 생각한 알렉스가 불안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가만히 서있는 에린을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 가자. 엘빈을 그렇게 만든 이 나라에 복수하는 거야.”

“안…돼….”

그럴 순 없다며, 필사적으로 에린이 저항하기 시작하지만, 에린의 머릿속에 걸린 세뇌가 점차 그녀의 정신을 지배하려하고 있었다.

“나를 따라와. 내가 너에게 길을 제시해줄게.”

“길?”

“그래. 길. 너는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안 돼. 그럴 순 없어.”

“응…?”

에린의 머릿속을 잠식하던 세뇌가 깨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진 것에 서큐버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럴…리가 없는데?”

“나한테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은 네가 아니야.”

[흥.]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여자의 코웃음 소리.
그리고 떠오르는 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한 남자에 대한 마음이 그녀의 머릿속에 걸린 세뇌를 깨뜨렸다.
자신의 허리춤에서 레이피어를 꺼낸 에린은 굳게 다짐한 표정으로 은현이 내려준 임무를 떠올리며 자신과 대치해있는 악마에게 무기를 겨눴다.

“나한테 길을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야.”

“…….”

서큐버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절대로 깨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세뇌를 한낱 인간이 깨뜨렸던 것에 대한 분노인 것일까, 아니면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에 대한 짜증인 것일까.
어느 쪽인지, 둘  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큐버스가 이 상황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했다.

“괜히 걱정했군.”

다행이라는 표정이 이내 피식 웃음으로 바뀌는 알렉스도 에린의 옆에서 서큐버스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래도 기특하구나. 상을 내려주도록 하지.]

“어, 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에린의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색의 마나가 그녀의 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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