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5화 〉065. 악마와의 조우(1) (65/730)



〈 65화 〉065. 악마와의 조우(1)

이전 몰래 궁정을 빠져나와, 일리아나와 은현에게 유리아의 구조를 요청했던 것이 걸렸기 때문에, 그것을 구실로 궁정 내부에 가출한 유리아와 함께 엄중한 경비로 누구의 접견도 허락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은현이 도움을 준 적이 있었던 대가로 헬레나 후비에게 은현의 석방을 요구하려 했던 일리아나였지만, 애초에 왕궁 내부로 입궁 자체가 허락이 되지 않았다.
사실상 연금되어 있는 현재 상황은 디아네 왕비의 견제에 가까운 조치의 결과였으나, 이로 인해 불편을 겪고 있는 것은 일리아나였다.
은현이 왕실근위기사단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일리아나는 곧바로 궁정을 찾아 은현의 신분 보증인이라는 점을 내세워 은현과 면회를 하려 했지만,  요구는 보기 좋게 거절당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신원은 대륙이 모든 마법사들이 보증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지만, 이 왕국에 소속된 백성도 아닐뿐더러 이방인이라는 점을 핑계로 일리아나의 요구를 거절한 셈.
평소에는 페르닌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뭐든 상관없다면서, 마법도서관 하나를 지어주고  자리를 맡아달라고 애걸복걸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그녀의 요청을 거절당했다.
사실상 권한이 왕국 쪽에 있는 이상 일리아나도 별다른 수가 없었기에 이렇게 리오드를 찾아온 것이다.

“개 같은 X끼들. 뭐? 작위를 받아들이고 페르니아스의 귀족이 되라고? 그러면 신원 보증이 가능해? 이럴 때 조차 그딴 말을 지껄이고 앉았더라? 하,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궁정 다 불태우려던  겨우 참고 왔네.”

평소 굉장히 나른하고 매사에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번 감정의 도화선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렇게 리오드에게 쌓아두었던 말들을 모두 쏟아 붓고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은 일리아나는 생각보다 리오드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몇 일 전, 이 나라의 공작인 아브로스 아르미타스와 리오드, 은현 이렇게 기묘한 조합의 세 사람이 함께 술을 마셨던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은현이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귀족 연쇄 습격 사건의 수사를 도와주게 되었다는 것을 떠올린 일리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리오드를 노려보았다.

“너…이렇게 될  알고 있었어?”

“아니.”

“그럼? 왜 그렇게 담담해?”

일리아나만큼이나 은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리오드다.
이전에 말했던 대로, 은현이 원한다면 이 나라의 국왕의 목이라도 따서 갖다 바칠 만큼, 리오드는 은현의 행동과 선택들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세간에서는 리오드를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 중의 기사라고 평가하고는 하지만, 그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왕국이 아닌 은현이라는 단 한사람만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그의 가족과 당시의 동료들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걔가 감옥에 투옥됐는데, 네가 가만히 있는 다고? 말도 안 되지. 뭐야. 너희끼리 뭘 꾸미고 있었던 거야! 당장 불어!”

이전부터 은현이 자신에게 숨기고 리오드와 함께 무언가를 작당모의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은현이 숨기고 하고 싶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일리아나는 사납게 리오드를 노려보며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감옥에  예정은 없었다. 뭔가가 예정이 틀어진 거겠지.”

“원래의 예정은 뭐였는데?”

“서큐버스에게 일부러 붙잡혀서  악마의 목적을 캐내는 것.”

“서큐버스? 그…남자의 몸에서 정기를 빼가는 악마?”

“그렇지.”

“정기…설마 현이의 정기를…?”

무언가를 상상한 일리아나가 안색을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뭐?”

“안 된다고! 누구 마음대로 그건 다 내…! 읍!”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일리아나가 당황하며 다급하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

그런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지켜본 리오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자 일리아나는 시선을 살짝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흐, 흐흠! 그래서? 자세히 말해봐.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전부.”

“은현은 처음부터 악마의 소행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단지 나서지 않았을 뿐이지.”

“그래. 걔는 늘 그러니까.”

“이후 은현 쪽에서 나와 아르미타스 공작에게 제안을 해왔다.”

“응?”

뜻밖에 말에 일리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은현은 사건이 발생해도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해결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해결을 하더라도 부탁을 받아서 하거나, 아무도 모르게 뒤에서 공작을 펼쳐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일을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은현 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건의 해결을 주도한다는 것에 뜻밖이라는 인상을 품었다.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현이, 얘는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 자리에 없는 은현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일리아나는 한숨을 쉬었다.

  

타닥타닥하는 장작이 타는 소리가 귓가에 맴 돌았다.
의식이 각성하여 감겨져 있던 눈을 뜬 은현은 가만히 누운 채로 허공을 응시했다.
날은 밝고 있었지만, 아직 해가 뜨기 전인 이른 새벽이었다.

탁, 탁, 탁

“어머? 내가 깨웠니?”

“아니요. 그냥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네요.”

침낭 속에서 몸을 일으킨 은현은 기지개를 켜며 평소보다 조금 이른 아침을 맞이했다.

“뭐 하세요?”

“응? 아, 그게….”

식칼을 들고 도마 위의 채소들을 올려둔 채, 머뭇거리고 있는 여자가 은현의 말에 당황하며 우물쭈물 댔다.
부끄러운 행동을 보인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보이는 여자의 날카롭고 길쭉한 아름다운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 인간의 요리는 뭔가 어렵네…. 맨날 현이한테 얻어먹으니까 나도 현이한테 요리라는 걸 해주고 싶었는데….”

처음 잡아보는 식칼을  손이 어색한 티를 냈고 그 식칼로 다듬은 채소들의 모양이 하나같이 불규칙적이고 이상한 모양새가 그녀의 엉성한 솜씨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신선하고 귀여웠기 때문일까, 은현은 아침부터 좋은 것을 봤다고 속으로 하늘에 감사해하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

“식칼은 그렇게 힘으로 꽉 쥐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조언을 해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

식칼을  자신의 오른쪽 손을 감싸 쥔 은현의 손을 보며 여자는 깜짝 놀랐다.

“칼은 이렇게 쥐고 반대 손은 손가락이 보이지 않도록 감아쥐고.”

직접 양손을 잡으며 가르쳐주는 형태가 되자 졸지에 은현이 여자를 감싸 안은 자세가 되어버렸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리듬을 타면서.”

등 뒤에서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은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멍하니 은현의 손이 이끄는 대로 칼을 움직여 채소를 썰었다.

“쉽죠?”

“으, 응. 쉽네….”

“그래도 굳이 요리를 하실 필요는 없어요. ‘엘프’들은 애초에 요리라는 개념 자체가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현이의 요리는 맛있는 잖아.”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은현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엘프, 실비아는 은현의 위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엘프들의 문화에서는 은현의 말대로 요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의 그대로의 것을 사랑하는 존재들이며, 무언가를 불에 굽거나, 조미료를 이용해 간을 내어 맛을 낸다는 방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은현과는 다른 의미로 불노장수의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엘프들에게 있어서 음식이란, 몸속에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소모품일 뿐이며, 그것에서 즐거움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살생하여 잡아먹는 것 또한 선호하지 않기에 고기나 생선도 먹지 않고, 먹는 것은 오로지 나무열매나 독소를 제거한 식물들과 뿌리, 채소들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실비아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요리에 도전한다는 것도 굉장히 의외의 선택지에 가까웠다.

“누나 마음은 고맙지만, 저는 괜찮아요. 자, 어서 정리하고 아침부터 준비해볼까요?”

“응, 그러자.”

다시 본래의 역할대로 돌아와서, 은현이 야외의 조리도구를 이용해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실비아는 자리와 침낭들을 정리하고 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짐을 꾸린다.
처음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던 인간과 엘프의 동행관계도 몇 주가 지속되니, 익숙해진 두 사람은 의사소통이 없이도 서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순조로운 여행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현이는 정말 신기해. 엘프를 봐도 크게 놀라지 않았잖아. 혹시 동족들을 만나본 거야?”

엘프들의 다른 종족명은 ‘요정족’.
한 나라보다 넓은 울창한 숲 속에서 천년이 넘는 세월을 넘게 보내며, 다른 종족들과 일절 관계를 가지지 않는 폐쇄적인 엘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목격담이 존재하지 않아 전설로만 남아있었던 종족이다.
설사 인간들이 사는 속세에 나가게 되는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외양을 인간처럼 바꿔주는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나가기 때문에, 속세의 한 장소에서 장기간 체류를 하지 않는 엘프들을 알아보는 것은 엘프를 목격해본 적도 없는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위장을 알아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속으로는 엄청 놀랐어요.”

“거짓말, 처음 봤을 때 네 표정이 어땠는지 아니? ‘엘프네.’ 라고 딱 한마디 얘기하면서 얼굴은  얼마나 딱딱했는지 나무랑 대화하는 줄 알았다니깐?”

간단한 아침 식사를 먹으면서도 대화의 꽃을 피우며 서로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달의 마을’에 도착하면 우리도 헤어져야겠지?”

“그렇겠죠.”

“싫다아…. 현이가 해주는  평생 먹으면서 살고 싶은데. 그냥 나랑 함께 살면 안 돼니?”

“다른 엘프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리가 없잖아요. 저는 인간인데.”

“으음, 내가 잘 설득할 수 있어.”

“아직  얘기니까, 우리 천천히 생각해봐요.”

“피…알았어.”

아쉬운 소리를 내는 실비아를 보고 미소 지은 은현은 자신이 엘프의 마을에 정착해서 실비아와 함께 사는 인생을 상상해보았다.
만약 자신이 ‘신의 사도’가 아니라면, 자신은 실비아의 저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보아왔던 그 어떤 여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은현의 마음속에는 실비아라는 여성 엘프의 존재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은현은 세계수를 향한 여정에 발걸음을 옮겼다.

◆ ◆ 

“으….”

에린은 딱딱한 바닥에서 자신의 몸에 스멀스멀 스며들어오는 찬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야, 방금 그 기억은…현이랑 엄청 예쁜 사람이…핫!”

천천히 깨어나는 의식을 붙잡고 잠에서 깬 에린은 어렴풋이 꾸었던 꿈속의 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와중, 아직도 자신의 손목이 묶여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용수철이 튕기듯이 몸을 들어올렸다.

“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인식했을 때, 에린은 자신이 있는 곳이 감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애슈턴에게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고, 무언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와 말을 걸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이후로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갇혀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어났구나.”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을 때, 구석에서 들려오는 한 남자의 익숙한 목소리에 에린은 고개를 퍼뜩 돌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이 생각했던 남자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에린은 놀라 남자의 목소리를 외쳤다.

“현아! 어…?”

그리고 은현의 상태를 보고 또 한 번 놀란다.
한쪽 눈은 뜨기 어려울 정도로 잔뜩 부어있는 얼굴과 여기저기 찢어진 옷가지 안으로 보이는 시퍼런 멍들, 그리고 에린과 마찬가지로 팔을 뒤로한 채 수갑으로 구속되어 있는 상태까지.
게다가 잔뜩 수척해지다 못해 비쩍 말라있는 그의 전신은 도저히 괜찮은 상태라고는   없다.
그의 몸속의 마력과 정기를 모두 빨아먹은 것은 에린의 몸속에 깃들어있는 신수의 짓이었지만, 의식을 빼앗기고, 몸의 제어권을 강탈당했던 에린은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에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은현에게 물었다.

“너 얼굴이…어떻게  거야…?”

“그냥 좀 일이 있었어.”

“일이 대체 무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의 얼굴이 심하게 망가져 잔뜩 부어오른 것일까.
상황의 파악이 제대로 되지가 않는다.

‘나는 그때 그 남자한테 맞다가 의식을 잃고…. 그때 내 머릿속에 말을 걸었던 여자는 누구지?’

누군가가 자신의 머릿속을 잠식하고, 자신을 밀어내는 느낌을 받았던 감각.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었던 미지의 감각이며 무력하게 저항하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에린이 인상을 찡그린다.
에린이 상황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은현은 그런 에린을 자신의 뒤에 숨겼다.

‘기사…?’

에린은 전방의 기사들을 응시하고, 자신과 은현이 구속되어 감옥 속에 투옥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자각했다.

“자, 얘기를 계속하자. 그래서 내 제안. 받아들일래? 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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