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8화 〉058. 귀족 연쇄 습격 사건(4) (58/730)



〈 58화 〉058. 귀족 연쇄 습격 사건(4)


“너 같은 거 전혀 무섭지않아!”

순간 에린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잠시간 이해하지 못한 애슈턴은 멈칫거리며 멍하니 에린을 바라본다.
표독스러운, 일방적인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독한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에 애슈턴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

“아악!”

애슈턴은 에린의 머리채를 붙잡고 강제로 일으켜세운 뒤, 얼굴을맞대어 그녀와 강제적으로 눈을 마주쳤다.

짜악!

손목에 힘을 실어 있는 힘껏 에린의 뺨을 강타했다.
뺨을 맞은 에린의 고개가 심각할 정도로 돌려지며, 애슈턴의 손바닥이 직격한 뺨에는 얼얼한 통증과 함께 입안에 핏물이 고였다.
강하게 때린 일격이었음에도, 에린은 비명 한 번을 내지르지 않고 이를 악물며 억지로 참아냈다.
머리채를 다시 잡아 당겨 돌려진 고개를 원래대로 되돌리고는 애슈턴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에린에게 물었다.

“너, 대체  믿고 이러는 거냐?”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고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에린의 표정은 죽지 않았다.
굴복하기는커녕 더더욱 굳센 표정으로 애슈턴을 노려볼 뿐이었다.
은현과 일리아나에게서 검술과 마법에 대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준비도 철저히 했다.
최근 에린의 보호자인 은현이 그녀를 데리러 아이테르에 오지 못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면서도 그녀를 납치할 수 있는 타이밍을 계속 엿보았다.
마력 차단 수갑을 이용해 마력을 봉인했고, 온 몸을 수갑으로 결박하여 움직임도 봉인당한 에린은 그저 17살짜리의가녀린 몸을 가진 약한 소녀에 불과했다.
하지만 뭘까, 이 태도는.
모든 상황에서 자신이 유리한데, 절대로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 하나가 애슈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자식이 널 구하러 와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하!  깨. 이곳은 내가 개인적으로 마련한 공간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포함한 공작가문의 사람들도 모르는 곳이야. 그런데  놈이 이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애슈턴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는 에린의 반응에 눈살을 찌푸렸다.
또 이 눈이다.
마치 더러운 벌레를 보듯이, 경멸하는 것과 같은 눈과 표정.
자신은 귀족인데, 언제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왕국의 2인자라는 칭호가 따라붙은 아르미타스 공작, 군무장관에 앉을 예정인 자신인데.
어떻게 그런 자신을 미천한 피를 이어받은 범죄자의 자식새끼가 벌레 보듯 경멸어린 표정을 짓는 단 말인가.
저것은 바로 자신이 에린을 보며 지어야했던 표정이다.

“그러게 거슬리게 왜 계속 눈에 띄는 거야. 천만의 다행으로 목숨이라도 건졌으면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살면 되잖아.”

에린은 역시나 대답하지 않고 이를 꽉 다물었다.

“공작가문에서 그 쓰레기 같은 네 아버지의 횡령죄와 빌어먹을 흑마법사 새끼의 죄를 연좌제로 너에게도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처를 해줬으면, 그냥 학교도 그만두고 벌레 같은 평민으로 조용히 숨어 살면 될 것이지.”

짜악!

또 다시 애슈턴의 손이 에린의 뺨을 때렸다.

“남한테 계속 빌붙어서까지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다니는 이유가 뭐야? 검하고 마법은 배워서 뭐하겠다고! 설마 나라에서 너를 기사나 마법사로서 고용할 것 같아? 평민인 너를? 제 분수도 모르고 건방지게!”

[한심하군.]

‘아, 안 돼.’

[닥쳐라.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구나. 내가 해결하겠다.]

‘안 돼! 하지 마! 제발 부탁이야!’

[너의 말을 들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

‘무언가’가 에린의 몸, 마음, 정신.
모든 것을 잠식해나간다.
희미해져가는 의식이 몸의 통제를 잃어버리고 촛불이 꺼지듯이 사그라져간다.
마지막 남은 한줄기의 의식 속에서 에린은 절박하게 한 남자를 찾았다.

‘현아…. 제발 도와줘.’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입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오는 것은 자신에게 육체의 제어권을 빼앗아간 ‘무언가’가 짓는 비릿한 조소 뿐.

“하….”

굳게 다물고 있던 에린의 입이 열리더니,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가며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예상치 못했던 에린의 표정을 본 애슈턴이 멈칫거리며 에린을 노려보았다.

“뭘 실실 쳐 웃고 있어? 너무 맞아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너.”

“뭐?”

“얘가 무서웠구나?”

“……!”

에린이 비웃음과도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애슈턴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한 번 더, 에린의 뺨을 때리기 위해 들어 올린 팔이 움찔 떨리더니, 처음으로 애슈턴의 얼굴 속에서 동요를 엿본 에린은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았음을 직감했다.

“얘가 그 남자한테서 검술과 마법을 배우고, 학교를 계속 다니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몰라서 불안했던 거지?”

 그래도 에린이 계속 아이테르에 다니겠다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들은 순간부터 심기가 불편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이 다르게 성장해가는 에린의 존재는 본인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아이테르의 학생들 사이에서는 꽤나 화제의 인물이었다.
검술과 마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던 평민이 갑자기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원인 모를 실종 사건을 겪은 뒤, 다시 복학한 소녀가 같은 기사 수업이나 마법 수업에서 자신들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했기 때문.
게다가 눈부시게 아름다워지는 성숙한 소녀의 외모까지.
귀족 자제들의 입소문은 자연스레 집안에까지 소문이 퍼지고 부모인 귀족들의 사이에서도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만약 에린이 성장해서 학교를 졸업하고 왕국의 기사가 되거나, 마법사가 되겠다는 선택을 한다면?
혹시라도 그녀의 가족을 박살낸 것이나 다름없는 애슈턴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에린이 칼을 갈고 독기어린 눈으로 성장을 해온 것이라면.
에린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번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압도했던 ‘은현’이라는 남자였기에 애슈턴의 불안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심지어 자신의 배다른 동생들인 알렉스와 엘레노아도 수시로 에린이 훈련을 받고 있는 검은 마녀의 저택을 드나든다는 것까지 듣고, 불안은 의심이 되고, 의심은 잘못된 확신으로 번지며 돌발 행동을 유발시키는 발화점이 되었다.
학교를 계속 되는 성장과 더 많은 주목을 받아서 눈에 띄기 전에, 지금 제거해야한다는 생각을 품게  애슈턴이 지금과도 같은 무모한 행동을 강행하게 된 계기였다.

“얘가 성장해서 왕국에 고용이 된다면, 혹시라도 네가 얘의 아버지를 시켜서 왕국의 예산을 빼돌렸던 걸 고발할까봐 무서웠구나?”

“개, 개소리! 비열하기 짝이 없고 흉학한 범죄자들의 가족인 너를 왕국에서 고용해줄 리가 없어!”

“글쎄? 과연 그럴까?”

애슈턴이 말했던 것은 허세에 불과했다.
실제로 귀족 자제들을 통해서 에린의 놀라운 성장을 들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에린의 존재는 주시의 대상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는 검술 실력과 탄탄이 기초를 다져가는 마법들, 아름다워져 가는 외모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에린을 동정하는 여론이 적지 않게 형성되어 있었다.
배임횡령을 저지른 아버지와 흑마법사였던 오빠, 그 가족의 구성원이었던 에린도 정상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 가운데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아무런 힘도 없는 가련한 소녀의 사연을 불쌍하게 여기는 귀족들도 많았다.
그런 그들이 에린의 성장과 재능을 알아보고 지원을 해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이게 미쳤나? 갑자기 왜 이러지……?’

가장 신경이 쓰이는 점은 에린이 자기 자신을 ‘나’라고 지칭하지 않고 ‘얘’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그녀의 몸 속에 다른 존재가 들어가면서 인격이 뒤바뀌기라고 한 것 같아께름직하기 그지없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채로,  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내고 자신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짓고 있는 에린의 모습은 아까까지만 해도 일방적인 폭력을 당하며 통증에 온 몸을 떨었던 가녀린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명백히 소녀의 정신이 이상할 정도로 뒤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몸을 묶어두고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정도로, 얘가 무서웠나 보지?”

“다, 닥쳐!”

“그 남자가 그랬지. 귀족이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을 져야하는 아주 무거운 자리라고. 선택 하나에 백성들의 목숨이 좌지우지  수도 있고, 나라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   번의 잘못된 선택을함으로써 나라가 망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어.”

애슈턴을 바라보고 있는 에린의 얼굴 속에 이제는 증오나 경멸의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제대로 된 능력도 없으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  결과 생기는 문제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고, 그저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싶다는 권력욕과 명예욕에만 도취된 열등감 덩어리가 앉아도  자리가 아니라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하는 에린의 표정에 담겨있는 것은 애슈턴에 대한 한심하다는 생각 뿐.
에린의 기억 속을 읽어 들인 ‘무언가’가 에린의 얼굴로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그게 네 얘기였구나.”

“닥쳐.”

“너 같은 게 귀족이니까 이 나라가 망하는 거야.”

- 너 같은 게 나라의 위에 있으니까 나라가 망하는 거야.

“닥쳐어어어어어!”

머릿속으로 몇 개월 전, 은현에게서 들었던 모욕적인 말이 재생되어 애슈턴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이성을 잃은 애슈턴의 포효가 창고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감히! 너 따위가! 네가 뭔데 나를 평가해!”

애슈턴이 다시 멈추었던 폭력을 재개하며 에린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비, 빌라드 님! 저거 말려야하는 거 아닙니까? 이러다가 진짜로 죽어요!”

멀리서 애슈턴의 인간의 도리를 넘어선 과격한 행동에 질겁하면서, 그라스는 오르바에게 애슈턴을 말려야한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도저히 반쯤 미친 상태로 폭주하고 있는 애슈턴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던 오르바는 가슴 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최대한 내색하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서, 설마 진짜로 죽이기야 하겠어? 그리고 문제가   뭐야. 아르미타스 소공작님이 시키신 일이잖아! 문제가  리가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발언한 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지만, 몸속에 있는모든 허세를 끌어 모아 답한 말에 그라스는 찝찝함을 떨쳐내지 못하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은 모두 애슈턴이 시키는 대로 에린을 납치하여 이곳으로 끌고 왔을 뿐이다.
거기에서 엄청난 양의 금화를 보상으로 받고 덩달아 에린까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으니.
평소 에린의 외모를 눈여겨보고, 어떻게 꿰어낼지 고심했던  사람은 애슈턴의 명령을 거절할 신분도 아니었지만 굳이 거절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성을잃은 애슈턴의 열 번이 넘는 가혹한 구타 행위가 끝나고, 넝마가 된 에린의 몸은 마치 쓰다버린 걸레짝이라도 된 것 마냥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후우….”

“하아, 하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기나긴 폭행을 멈춘 애슈턴은 힘겹게 가늘기만 한 숨을 내쉬고 있는 에린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그 자식이 널 구하러 와줄 것 같아?”

“아니,그 남자가 와줄 필요도 없지.”

에린의 눈이 번뜩이며 살벌한 독기를 품고 애슈턴을 노려보았다.

우우웅

“어?”

에린의 양손에 채워져 있던 마력 차단 수갑이 달달거리며 진동하고 있었다.
신체의 마력을 운용하여 방출하려 했지만, 수갑에 의해서 중간에 차단당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 소용없다고 말 했을 텐데? 그걸 차고 있는 이상, 너는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고.”

“그건 네 기준에서의 얘기고.”

애슈턴의 말대로 에린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수갑은 에린이 마력을 방출시키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도구도  용도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는 법이다.
지속적으로 한계를 넘어선 마력을 계속 방출하게 된다면.

파지직

결국 내구를 버티지 못한 수갑이 에린이 방출한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다.

“이, 이럴 수가!”

일정 이상의 마력을 방출시켜 내구도를 닳게 하고 수갑을 풀어버린다는 선택지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었지만 수많은 개량을 통해 어떤 범죄자라도 수갑을 부숴버릴 정도의 마력을 방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쩌면 대륙의 열 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위마법사들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기껏해 봐야 17살짜리의 평범한 소녀가 방출할  있는 마력의 양이래 봐야 얼마나 하겠는가.
평소의 또는 아까 전까지의 에린이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무식한 파훼 방법이었지만, 지금의 에린은 무언가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손과 발을 구속시켜두었던 수갑은 망가지고 자유의 몸이 된 에린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일으켰다.
살인행위에 가까웠던 일방적인 폭행을 당했던 에린의 온 몸은 뼈에 금이 가고 멍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않는다는 듯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애슈턴은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긴장하며 에린을 노려보았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공기는 너무 탁하고 먼지가 자욱하군.”

“너는……뭐냐.”

에린은 눈을 감았다.
조금씩 에린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푸른색의 마나가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고, 얼굴의 멍 자국들과 터진 입술, 피로 얼룩진 뺨이 아무것도 없었던 일인 양, 깨끗하게 치유되고 복구되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세 남자의 표정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간다.

“이, 이게 무슨……!”

가만히 서서 감고 있던 눈을 뜬 에린은 유려하게 걸어가며 애슈턴의 앞에 마주섰고 그대로 손을 뻗어 애슈턴의 목을 낚아챘다.

“커흑!”

17살의 가녀린 소녀라기엔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힘으로 애슈턴의 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들어올린다.
애슈턴은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손을 풀기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에린의 손은그런 애슈턴에 저항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상황….”

“어서 말려야 해요! 저러다 소공작님이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갑작스럽게 변한 에린의 변화와 아르미타스 소공작을 위협하고 있는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빌라드를 그라스가 재촉하며 에린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에린을 노려본 순간.

“어?”

계속해서 에린의 주위를 맴돌던 푸른빛의 마나가 이내 에린의 몸에 응집되기 시작했다.
에린의 몸이 푸르게 빛나면 빛날수록 에린에게 목을 움켜쥐어 공중에 떠있는 애슈턴의 저항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점점 말라비틀어져 가는 신체.
남자의 몸 안에있는 마력을 모두 빨아들이고 그와 동시에 뼈만 남을 정도로 앙상해져버린 수척한 몸, 그리고 최근 수도 안에서 저런 현상을 발생시키는 연쇄습격범에 대한소문을 떠올린 그라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설마….”

그라스의 의문을 제대로 해소할 여유도 없이, 상황은 계속해서 변해만 갔다.
에린의 몸에 응집된 푸른색의 마나들이 서서히 형체를 갖춰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건…?”

‘대체뭐지?’

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에린의 변화.
에린의 머리카락과 같은 남청색의 털로 뒤덮인 수인을 연상시키는 여우귀.
허리에서 일렁이고 있는 아홉 개의 은백색 꼬리들.
애슈턴을 위협하면서도 흘끗 두 남학생을 바라본 평소의 에린과는 다른 성숙한 외모를 가진 여성의 차디찬 표정.
남학생들은 갑작스럽게 변모한 에린의 모습에 쉽사리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만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에린의 몸 안에 들어있던 신수(神獸), 구미호(九尾狐)가 에린의 몸을 매개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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