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057. 귀족 연쇄 습격 사건(3)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손님방에 혼자 앉아 있던 은현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고 말하고 아브로스에게 양해를 구해 방 하나를 빌린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브로스는 선뜻 은현에게 손님방 하나를 빌려주었고 생각이 정리되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이야기를 했다.
머릿속으로 수 만 가지의 생각이 떠올랐지만, 많은 생각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한 소녀의 행방이었다.
이내 머리를 흔들며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에린의 얼굴을 억지로 지우며, 악마를 유인하기 위한 다음 계획을 짜기 위해 억지로 생각을 짜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신경써주지 못한 에린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너무 자만했어.’
아무리 판을 짜고, 포석을 깔아둔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은현의 예상을 벗어나고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다주었던 적도 많았다.
언제나 자신이 그리는 그림대로 상황이 흘러갈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을 진데, 은현은 어째서 애슈턴이 에린에게 손을 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미리 대비도 하지 못했을까.
아직도 자신은 터무니없이 미숙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후우….”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동요하고 혼란에 빠졌던 것이 얼마만인 것일까.
[아이야.]
“…….”
[아이야?]
“아, 여신님…오셨군요.”
베르단디의 현현은 생각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계로 현현하자마자 은현이 소파에 앉아 피곤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고 베르단디가 의아해하며 물은 것이었다.
[…무슨 일 있었던 것이냐?]
“…예.”
은현은 베르단디가 부재중일 동안, 왕국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모두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은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베르단디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하급 악마….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악마들의 페르니아스 왕국의 중심인 수도, 페르닌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페르니아스 왕국의 안에서 국한된 문제가 아닐 터였다.
아마 이 습격사건의 범인처럼 다른 악마들이 다른 국가나 도시에서 이와 같은 비슷한 혼란을 초래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이번 습격사건은 악마들과의 싸움의 전초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네가 고민 중인 것은 악마들 때문이 아닌 것 같구나.]
“에린이 납치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악마 쪽에서 애슈턴의 정신을 조작해 불안감을 증폭시켜서 극단적인 행동을 하도록 부추긴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그래서 납치된 그 아이를 어떻게 구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던 것이냐?]
“아니요.”
[응?]
“애슈턴의 독단행동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실수가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선시해야 할 건 ….”
문제가 발생했고, 발생한 문제들이 하나가 아닌 다수일 때, 인간의 몸은 하나이기에 해결을 해야 하는 문제들도 하나씩 밖에 해결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라는 것이 주어진다.
이 나라의 귀족들을 습격하고 있는 악마의 처리와 한 소녀의 납치.
쉽게 에린보다 악마를 잡는 쪽에 먼저 우선순위를 두자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째서 일까.
엘빈이 죽어가면서 동생인 에린을 자신에게 맡긴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일까?
아니면 훈련을 봐주면서 그 짧은 시간에 정이라는 것이라도 생긴 걸까?
“에린은….”
에린의 이름만을 입에 담으며 그녀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선택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거침없고 여유를 보이며 모든 일을 해결했던 모습과는 다른, 굉장히 동요하고 있는 모습에 베르단디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은현을 바라보았다.
생명에 담겨있는 무게를 잴 수는 없다고들 하지만, 한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야하는 것이 마땅한 선택이라는 것에는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냉정한 판단도 있고, 은현도 그것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여신인 베르단디 또한 마찬가지.
여신의 입장에서는 인간들을 위하고 지켜주는 존재지만, 인간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품지 않는다.
한 사람을 희생시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라면 망설임 없이 그 방안을 채택한다.
여신들은 한없이 인간들을 사랑하고 위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인간들을 위해서 한없이 매정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 사고방식을 통해서 은현이 처음으로 여신의 사도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고행과 업을 짊어지고,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정신이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여신의 사도로서의 길을 걸어온 이 남자는 이번처럼 이성과 감정이 충돌하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적이 처음이 아니었다.
대의를 위해서, 여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소수의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은현과 인연을 쌓고, 특별한 감정을 품게 하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주었던 이들도 존재했었다.
그때마다 절망하고 울부짖으면서도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자신에게는 사명이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똑같다.
자신은 에린보다 악마들의 대처를 우선시해야만 했다.
이것이 맞는 판단이라고, 이성이 말하고 있었지만, 은현의 감정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호소한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은현은 더 깊은 딜레마에 빠지고 있었다.
[아이야.]
“…….”
[아이야!]
“아…네. 죄송해요.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공중을 부유하던 베르단디가 은현에게 다가왔고 은현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품으며 상냥하게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괜찮다.]
“네?”
[그 아이를 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여신의 사도라는 직함에 얽매여 그런 매정한 선택을 할 필요도 없단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해도 된단다. 내가 전에 말해주었잖니.]
은현은 다시 베르단디와 은현이 여신의 옥좌에서 재회했을 때, 상냥하게 웃으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상관없다고 허락을 해주었던 그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녀의 그런 말이 잘 실감이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정말로 본인의 의지가 포함된, 그런 선택을 내릴 수가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무의식적으로 그 문제에 대한 고민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고 머릿속 깊은 곳에 넣어두며 뒷일로 미뤄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은현은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베르단디는 어째서 은현이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은현에게 물었다.
[뭔가가 곤란한 것이냐?]
“네…. 곤란합니다.”
[무엇이?]
“어째서, 어째서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건가요?”
[응?]
“‘요정의 숲’에서 다크엘프들에게 인질로 잡혔던 실비아 누나가 괜찮다고 웃으면서 죽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라요.”
[어….]
“현성이 형이 마지막까지 같이 술 한 번도 못 먹어보고 이렇게 떠난다고 아쉬워하던 얼굴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어요. 아스타로트를 봉인하면서 몸이 부서져가면서도 비명한번 지르지 않고 참아냈던 브류나크가 유언으로 남긴 말이 아직도 가슴 속에 깊이 박혀있어요. 제가 포기해버려서 ‘마녀’로 몰려, 처형을 당했던 엘리시아가 전수해준 마법을 쓸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은현은 계속해서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의 선택으로 기쁘게 희생을 받아들였던, 사도의 사명을 우선시하고 자신이 버렸던 사람들을 떠올리고는 그들의 이름들을 입에 담았다.
[아, 아이야.]
“어째서 그때가 아니라 지금에서야 말씀해주시는 건가요?”
[그, 그건!]
“그때, 이번처럼 나타나셔서 저한테 말씀해주셨으면….”
그들을 희생시키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데, 허락만 해주었다면, 번거롭고 힘이 들더라도, 그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은현이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구했던 것에는 그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낸 결과가 아니었다.
은현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 중에는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이라는 명목으로 은현을 돕기 위해 많은 동료들의 희생들이 쌓인 끝에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결과들이다.
모두 은현이 망설임과 고민 끝에 감정의 판단을 거부하고, 철저히 효율과 결과만을 추구하여 이성의 판단을 우선시했던 결정들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베르단디가 해준 상냥한 말은 은현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말이었다.
이성과 효율을 우선시하여 동료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은현이 이제 와서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하여 에린을 구하는 것을 우선시한다는 말은.
자신을 위해 죽어간 동료들에 대한 배신이다.
심각히 위선적이고, 기만이다.
은현도 베르단디가 신계에서 하계로 내려올 수 없었다는 것도, 신들의 사고방식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이 말을 견디지 못하고 내뱉는 것은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다.
베르단디는 은현의 투정에 가까운 원망을 나무라지 못했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이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버린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
[아, 아이야….]
베르단디는 망가져버린 인형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은현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영생에 가까운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여신에 대한 원망이나 불경한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던 은현이 처음으로 베르단디에게 원망에 가까운 말을 토로했다.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언제나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주고 미소를 지어주었던 은현이었지만.
사도로서 임명을 받은 순간부터, 은현의 정신은 조금씩 갉아 먹히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서 깨달았다.
강하고 굳센 아이일 줄 알았는데, 영생에 가까운 강인한 육체와 비상한 머리를 가졌음에도, 결국엔 은현 또한 내면은 평범한 인간의 영혼이다.
지금까지의 에린이 불합리한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폭력에 꾹 참고 감정을 쌓아두고 있었던 것처럼, 은현도 동료들과의 추억들을 간직하며 많은 감정들을 쌓아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깊숙한 내면을 읽어내지 못한 베르단디의 실수였다.
[미안하구나. 미안해…. 정말로….]
여신은눈물을 흘릴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신들 중에서도 인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예외적인 여신이었으니까.
멍하니 공허한 표정으로 베르단디를 응시하고 있는 은현을 꽉 끌어안으며 사죄의 말을 반복했다.
은현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은 자신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하지만 아이야. 만약 여기서 그 아이를 구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완전히 망가져버릴 지도 모른다.]
“…….”
[나는 아이가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신들을 설득했고, 지금 이렇게 아이의 곁에 있는 것이란다.]
“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아이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을 지지할 생각이란다. 아무리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라면, 나는 그것을 막지 않을 것이야.]
“그 말씀은….”
[아이야. 신이란, 인간들을 위하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은혜를 내리지만, 때로는 매정하기까지 하지. 나도 그렇단다. 하지만….]
베르단디는 품에 안고 있던 은현의 얼굴을 직시하며,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으, 으읍?!”
베르단디의 돌발행동에 놀란 은현이 허둥거리며 그녀의 입술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베르단디는 양손으로 은현의 얼굴을 단단히 고정시키며 그에게서 입술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은현이 거세게 저항하려하자 한 술 더 떠서 은현의 입안에 베르단지의 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혀가 은현의 혀를 휘감기 시작했고,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 좋은 감각을 느낀 은현은 익숙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 더더욱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데자뷰?’
순간적으로 베르단디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푸하! 여, 여신님! 갑자기 무슨!”
[후후, 놀랐느냐?]
“다, 당연히 놀라죠! 설마 이번에도 이상한 가호를…?”
[아니, 이번에는 내가하고 싶어서 한 것이다. 하계를 내려다보면서 인간들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당황해하는 아이를 보니 귀여워서 참을 수 없구나.]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는 베르단디의얼굴에는 묘한 만족감이 드러난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라니, 그것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것보다 대체 어떤 놈이 자신의 여신에게 저렇게 요염하고 색기가 넘치는 편향된 지식을 알려준 것일까.
은현이 심히 고민하고 있을 때, 베르단디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아이야. 나는 모든 인간들을 다 평등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
[나는 오직 아이만의 행복을 추구할 것이고, 아이만의 미래를 생각할 것이며, 다른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떤 피해가 간다 하더라도 결코 신경 쓰지 않을 것이야.]
“…여신님, 그거 직무유기 아닙니까?”
베르단디는 은현의 반응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산통을 깨는 아이구나. 눈치를 스프 속에 부어서 말아 먹었다는 그 마녀아이의 표현이 정말 정확해.]
“그거…일리아나 얘기에요?”
[기껏 고심하여 분위기를 잡았는데, 나의 앞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을 꺼내지 말아라.]
“…옙.”
‘설마? 에이, 아니겠지. 아니, 하지만 키스인데? 아니, 그래도…하지만 여신님이신데? 나는 인간이고?’
아무리 눈치를 밥에 말아 쳐 먹었다고 하더라도, 두 번이나 되는 농밀한 입맞춤과 이 정도나 되는 호의를 계속 보내온다면, 은현이라도 조금씩 그 ‘가능성’을 의심해보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베르단디라는 존재가 같은 인간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 존재가 아닌, 차원이 다른 ‘여신’이라는 존재라는 어마어마한 차이 때문에, 그 가능성을 부정한다.
[하긴…나의 마음이 일반적인 다른 신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은현의 생각을 읽은 베르단디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아이에게 신들의 방식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이 없단다. 설령 그게 이성과 효율이 아닌, 감정이 중시되는 선택이 될지라도, 잘못된 선택과 결과를 낳을지라도, 그것이 아이가 하고 싶은 선택과 행동이라면 나는 막을 생각도, 탓할 생각도 없단다. 단지….]
베르단디는 은현의 뺨을 상냥하게 어루만지며 미소지어주었다.
[이제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무너뜨리는 후회가 남을 선택만큼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그것이 옳은 선택일지라도, 그 선택의 결과로 은현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제가 정말로 그렇게 이기적이게 되어도 될까요?”
[그럼.]
“저, 굉장히 욕심쟁이에요.”
[알고 있단다. 하지만, 아이야. 말해주지 않았느냐.]
“네?”
[이제는 ‘엑스트라’라는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네. 아….”
그 말은 엑스트라가 아닌, 다른 역할로서 이야기를 이끌어도 상관이 없다는 소리였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대개 욕심이 많은 법이지. 어디 한 번 날뛰고 싶은 대로 날뛰어 보거라. 그것이 아이에게도 행복한 결말이고, 새로운 ‘하계의 멸망’의 운명을 비트는 결말이 된다면, 나는 아이의 행동을 지지하겠다. 언제까지고.]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나는 아이의 멋있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주문이 너무 많습니다만.”
[보상으로 여신의 입맞춤을 한 번 더 선사할 기회를 주마.]
“그, 그건 좀….”
아까 전의 경험을 떠올린 은현이 손사래를 치며 과하게 부끄러워하면서도, 그 경험이 머릿속에서 잊혀 지지 않았기에 복잡한 기색이었다.
은현은 베르단디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해주진 말아주세요. 그런 건….”
[후후, 후후후! 귀여워 죽겠구나.]
베르단디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뒤에서 은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항상 타인들 앞에서 여유가 넘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은현이 유일하게 자신의 앞에서만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매우 기뻤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베르단디는 은현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베르단디의 덕분에 은현은 결심에 설 수 있었다.
이제는 실행에 옮길 일만 남았기에, 은현은 곧바로 아브로스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