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056. 귀족 연쇄 습격 사건(2)
사전 준비를 위해서 은현은 리오드와 헤어졌고, 홀로 길을 걸어 도착한 것은 엄청난 넓이와 위용을 자랑하는 대저택의 입구 앞이었다.
“공작가의 저택에 용무가 있는가?”
“예.”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저택 앞에서 발을 멈춘 은현은 입구를 막고 있는 공작가의 사병의 질문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약속은 하고 찾아온 건가?”
“이걸 보여주면 통과시켜줄 거라고 전달 받았습니다.”
품에서 아브로스가 주었던 두 개의 검이 교차한 형태의 브로치를 꺼내어 사병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이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브로치라는 것을바로 알아본 사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고는 은현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길을 비켜주는 시늉을 했다.
“들어가라.”
“수고하세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사병들에게 인사한 은현은 새삼 터무니없는 넓이의 정원과 대저택에 휘파람을 불었다.
이전 헤르샤 준남작 사건 때는 몰래 이 저택에 들어온 전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서 들어온 것인 만큼,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감상하며 저택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느긋하게 걸으며 정원을 감상할 생각이었는데, 자신을 맞이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은현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응시했다.
“네. 안녕하세요.”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천천히 가고 싶었는데.’
살짝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서 저택을 안내하고 있는 엘레노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요즘 공녀님 덕분에 에린의 상태가 많이좋아진 것 같더군요.”
“갑자기 웬 학부모 행세를 하세요?”
“일단은 이래 뵈도 보호자라서.”
피식 웃으면서, 뜬금없는 화제를 꺼내는 은현의 얼굴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엘레노아였다.
“애가 일리아나는 좀 어려워하거든요. 동성이면서 연상의 언니에게 의지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일단 보호자로서는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대륙에 열 명 밖에 존재하지 않은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를 편하게 대할 수가 있을까.
엘레노아는 은현의 말을 들으며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에게 가지고 있는 건 미안함뿐이에요.”
자신이 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배다른 오라비인 애슈턴의 독단행동으로 죽을 뻔했던 경험까지 겪게 만든 것은 명백히 자신의 집안사람의 잘못이었다.
아버지를 닮아 냉정하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도도한 표정을 짓는 사제가 ‘페르닌의 꽃’이라고 불리는, 그런 엘레노아가 에린에게 딱 잘라 냉정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 것은 에린에 대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죄책감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에린도 알고 있을 겁니다. 공녀님이 자신에 대해서 그런 감정을 품고 계신다는 것도.”
은현의 말에 엘레노아가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지금 그 아이에게는 그런 관심이라도 필요합니다. 주위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 거지같으니까.”
학교에서 에린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고 있기에, 지금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지, 억지로 괜찮은 척하며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성장하면서 마음이 조금씩 치유가 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생기는 가슴속의 새로운 응어리가 존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현재, 에린의 상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나, 초 A급 관심병사와도 같은 상태였다.
지금은 은현이 상냥하게 달래주며 에린의 감정을 조절해주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쌓이고 쌓이는 감정의 폭풍은 시기를 늦추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터지기 마련이다.
“저는…당신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사람 하나를 구원하고,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계속 지지해주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엘레노아 또한 에린의 사정을 듣고 그녀를 구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녀를 구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한 이후에도 그녀에게 상냥하지 못한 이 세계에서 그녀가 적응할 수 있도록 끝까지 그녀를 지원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엘레노아는 그런 은현의 행동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자신에게 한해서 얄밉기 그지없고, 음험한 생각을 일삼는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지만, 이상한 부분에서는 자신의 주위사람들을 끔찍하게 챙기는 호인이나 다름없었다.
“에엥? 보기 드물게 칭찬을 해주시네요?”
“그 능글맞기 짝이 없는 면상만 치워주신다면 더 대단할 텐데 말이죠.”
엘레노아는 단번에 인상을 찡그린 은현이 피식 웃으며 대꾸해주자 뚱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후 시덥잖은 잡담을 나누며 걸었고, 아브로스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엘레노아가 노크를 했다.
“들어와라.”
허가를 받은 엘레노아가 문을 열고 은현을 방안으로 안내하고는 알렉스의 옆 자리에 앉았다.
은현도 아브로스의 권유를 받아 자리에 앉고는 이 자리에 없는 한 사람을 생각했다.
“급하게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가지, 너에게 알려야할 사실이 있다.”
“뭔가요?”
“애슈턴이…결국에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어버린 것 같더군.”
“아, 아버지? 그게 대체 무슨…?”
“……?”
아브로스는 그 순간, 명백히 지금까지 보여준 표정과는 다른 처음 보는 표정을 짓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예상대로, 자신이 설계하고 미리 쳐둔 포석으로 상황을 조장하는 것에서 여유를 보여주는 은현이었지만, 지금 은현의두 눈에는 명백히 ‘동요’의 감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조용한 정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뺨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딱딱한 감각을 느끼며 에린은 눈을 떴다.
“여기는…. 읏?!”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자신의 손과 발이 수갑들로 결박되어 움직임을 제한당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황급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과 차디찬 바닥, 그리고 작은 창가 사이로 새어나오는 달빛에 비치는 자욱한 먼지들.
자신이 결박되어 갇혀있는 장소가 어두운 창고 같은 곳임을 직감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어째서 자신이 이런 곳에 이렇게 감금되어 있어야하는 것일까.
“난 그때…일리아나님의 저택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학교의 수업이 끝난 방과 후, 드물게도 은현이 마중을 나오지 않은 하루였다.
오늘은 은현이 와주지 않았다는 것에 아쉬워하면서도, 자신의 훈련을 봐주는 것 이외에도 매우 바쁜 일이 많았던 은현이 마중을 와주지 않았던 것도 처음이 아니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식객노릇을 하고 있는 일리아나의 저택으로 혼자 걸어서 가는 도중이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남아있었다.
“치, 침착하자. 현이가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알려줬었잖아.”
혼란스러운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한다.
이후 어느 정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자 에린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확실히 직시했고, 자신 취해야할 행동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우선순위를 정하여 정리했다.
“일단 묶인 것부터 어떻게 풀고….”
팔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지만, 얼마나 세게 묶어놨는지, 손목을 묶어둔 끈은 헐거워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으, 진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자 에린의 미간도 좁혀지며 조금씩 초조함과 함께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끼이익!
“어…?”
결박이 풀리지 않아 답답함에 이기지 못하고 작게 투덜거리고 있을 때, 굳게 닫혀있던 철제 미닫이문이 열리더니, 세 명의 인영이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워서 얼굴까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체격으로 봤을 때, 에린은 그들의 성별이 남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점점 에린에게 가까워져오는 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에린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중앙에 위치했던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있던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양 옆에 위치해서 따라 걸어들어오는 남자들은 에린의 기억 속에 있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다, 당신은….”
“흐흐.”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에린의 얼굴을 보고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두 명의 남자는 얼마 전, 아이테르에서 에린에게 치근덕댔던 귀족가의 자제들, 빌라드 오르바와 그라스 브로드였다.
“드디어 얼굴을 보게 되는군. 그때 조용히 죽어줬으면 참 좋았을 텐데.”
노골적인 시선으로 에린을 바라보는남학생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에린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은현과 일리아나에게 배웠던 마력법을 운용하여, 신체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억지로라도 수갑을 뜯어낼 생각이었지만 자신의 신체에 아무런 변화도 찾아오지 않자, 에린은 당황했다.
“어, 어째서 마력이….”
“마나 차단용 수갑이거든. 일반적으로 왕국에서 큰 죄를 저지른 대역죄인들이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구속할 때쓰이는 물건이지. 네가 그 자식과 마녀에게서 훈련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파악해뒀어. 그 수갑을 차고 있는 현재의 너는 그저 무력한 인간일 뿐이지.”
“당신은…누구죠?”
“너 때문에 많은 피해를 본 사람.”
“내가 당신한테 무슨 피해를 줬다는 거예요!”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의 소공작, 애슈턴 아르미타스다. 이름은 들어봤을 텐데?”
“아….”
애슈턴의 자기 소개를 들은 에린이 깜짝 놀라며 자신의 어깨를 들썩였다.
“당신이……?”
에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애슈턴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을 듣고,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겨우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던 에린의 감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당신이…당신이 우리 오빠를!”
에린의 놀란 두 눈이 순식간에 증오의 감정을 실려 애슈턴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애슈턴이 인상을 찡그리며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되는 모욕을 들은 것처럼, 애슈턴은 곧바로 에린에게로 다가갔고 결박된 채로 움직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에린의 몸을 걷어찼다.
“쿠흡!”
“감히! 건방지게! 평민 따위가! 공작가문의 후계자인 나한테! 뭐냐! 그 건방진 눈은!?”
한 번, 두 번, 분노가 담긴 애슈턴의 발길질이 에린의 몸을 강타한다.
에린은 자신의 몸이 걷어차일 때마다 피가 섞인 숨을 토해내며 온 몸에 가해지는 충격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떨었다.
“하, 하으윽….”
“네년만 조용히 잡혀줬으면 됐잖아! 그랬으면 그 흑마법사한테서 널 인질로 금화를 다시 빼앗아 올 수 있었어! 네년이 거기서 그렇게 사라져버려서! 그 뱀 같은 녀석이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하고! 모든 게 틀어져버렸어! 다 네년 탓이야! 내가 이 모양이 된 것도! 그 개자식이 우리 공작가문을 우습게보기 시작하는 것도! 아버지와 그 년 놈들이 보는 앞에서 씻을 수 없는 굴욕을 맛봐야했던 것도! 전부 다! 네년 때문이라고!”
“우읍!”
그동안 오랫동안 잊어왔던 일방적인 구타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은현과의 훈련과정에서 겪었던 폭력과는 다른, 상대방의 악의가 가득 담긴 일방적인 폭력이 또 다시 에린의 트라우마를 일깨워 간다.
본능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몸을 걷어차는, 일방적인 폭력 속에서 끔찍이도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힘없고, 주눅이 들었던 과거의 자신으로 조금씩 돌아가면서, 자신의 몸을 잔뜩 웅크리고 폭력에 저항하지못하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만 같다.
“흐…윽….”
애슈턴은 그동안 쌓여왔던 분노와 수치심, 모욕감을 모두 에린을 구타하면서 해소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며 자신이 해왔던 모든 잘못된 행동의 책임을 에린에게 씌우는 불합리한 행동과 말을 늘어놓는 애슈턴의 모습에는 이미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쌓여있던 감정의 울분을 사람에게 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에린은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은 또 다시 저항하지 못하고 이렇게 맞고만 있는 것일까.
그동안 은현에게 받아왔던 훈련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렇게 허무하게 붙잡혀 납치를 당하고, 일방적인 폭력을 당하는 자신의 미래가 변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자신은 그 지독한 훈련을 견뎌낼 가치가 있었던 걸까?
‘아니, 아니야….’
그런 생각은 가져선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을 열성적으로 도와준 은현의 배려와 노력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자신이 한심하고, 노력이 부족하고, 재능이 없고, 힘이 없어서 이런 사태가 초래한 것이다.
[예전처럼 그렇게 저항하지 않고 맞고만 있을 셈이냐?]
‘아니.’
머릿속에 직접 들려오는 누구인지도 모를 목소리에, 그것이 누구인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에린은 곧바로 부정했다.
“…혀…지…않아.”
“뭐?”
중얼거리는 에린의 작은 목소리에 애슈턴이 발길질을 멈추고 그녀가 뭐라 중얼거리는 지를 듣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너 같은 거 전혀 무섭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