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055. 귀족 연쇄 습격 사건(1)
“미쳤군….”
“하….”
은현의 모든 계획을 들은 아브로스와 알렉스의 얼굴에서 어이없음,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새어나왔다.
평소 은현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맹목적인 신뢰를 보였던 리오드 마저도 이번만큼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개인적으로 너의 계획에 불만을 표시할 생각은 없다만, 이번만큼은 좀 심하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나?”
“당연하지. 내가 이렇게 나가야 그쪽에서도 더 큰 빚을 지게 되는 셈이야.”
“일리아나가 동의하지 않을 텐데.”
“당연히 몰래 동의해야지. 일리아나한테는 중간부터 말할 거야.”
리오드는 한숨을 쉬었다.
은현의 이 계획을 들었다면 미치고 팔짝뛰어서 가장 먼저 은현의 멱살을 쥐어흔들고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네 계획은 터무니없이 무모하면서도 너무나도 두렵군…. 하지만 내가 너의 계획을 듣고 생각을 바꿔 동참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나?”
“적어도 공작님이라면 그러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부분도 있고…굳이 계획에 동참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단, 방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정말로 필요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아까까지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시던 공작께도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으음….”
은현의 계획은 확실히 자신의 걱정과 우려를 타파해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의 과정에서는 이 나라의 귀족들이 계속 피해를 입는 것을 묵과해야한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공작가문에서 나오는 피해라 할지라도,그것을 감수해야만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아브로스는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알렉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는…해봄직 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피해자들이 저질렀다는 범죄를 들었을 때는 화도 났습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라도 그들이 벌을 받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도리어 후련한 마음도 들 것 같습니다.”
“네가 예견한 그 상황이 정말로 벌어진다면, 나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고 모르쇠도 있겠다. 이 나라의 귀족으로서, 맡은 바의 역할에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지.”
그것은 아브로스가 암묵적으로 돌려 말하는 승낙의 표시였다.
“좋습니다.”
은현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고, 허름한 주점의 방안에 모여있던 네 사람은 그렇게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 ◆ ◆
“나 왔어.”
“어서 와.”
집에 들어오자마자 마법등으로 비추는 조명아래에서 조용히 마법서적을 보고 있던 일리아나는 현관으로 들어오는 은현을 맞이해주었다.
곧장 부엌으로 다가가며 쌓여있을 그릇을 찾았지만 깨끗한 접시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싶은 표정으로 일리아나를 바라보자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애가 해놨어. 밥도 주고 재워도 주는데, 이런 것도 안하기엔 너무 눈치 보인다면서.”
에린의 행동이라는 것에 기특해하면서도, 일리아나의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무슨 표정이야, 그게?”
“어? 아니, 그냥….”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기분에 은현은 애써 표정을 감추고 은현은 웃어보였다.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시키고는 그대로 소파에 앉아 있던 일리아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그녀의 행동에 은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시간이니까.’
“무슨 얘기 했어?”
“이 나라의 귀족이 되어볼 생각 없냐는 얘기.”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일리아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냥 여러모로 걱정이 많으시더라고 공작께서.”
“흐응, 그래서?”
“당연히 거절했지. 그런 거 귀찮아서 어떻게 해.”
“하는 짓거리만 보면, 이 나라에서 제일 바쁜 건 너야.”
“무슨 그런 헛소리를 다 하시나. 그리고 요즘 떠들썩한 사건 하나 도와주기로 했어.”
“그 습격 사건?”
“응.”
“흐응….”
뚫어져라 은현을 쳐다보던 일리아나가 무언가를 감지한 듯 매서운 눈초리로 변했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응?”
“당장 말해.”
급발진이라도 하듯이 일리아나가 은현에게 몸을 밀어 붙이며 밀착했다.
“무슨 말이야?”
본인 스스로 뛰어난 연기력을 자부하는 은현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를 뚫어져라 직시하고 있는 일리아나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져만 갔다.
평소 같으면 그 귀차니즘 때문에 웬만해서는 전혀 간섭도 하지 않는 성격을 가졌지만, ‘여자의 감’같은 게 정말로 있는 듯 매서운 일리아나의 눈치는 은현이 감추고 있는 비밀을 너무나도 쉽게 눈치 챘다.
하지만 은현의 행동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 그가 뭘 감추고 있는 지까지는 모른다.
심지어 저렇게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는 은현이 자신에게 그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후우….”
작게 한숨을 쉰 일리아나의 눈빛에서 순식간에 매서움이 사라지고 불안함이 서렸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 안 해도 돼. 대신…다치지 마.”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안한 감정을 지우지 못했다.
‘미안, 이번엔 그건 안 될 것 같아.’
◆ ◆ ◆
대개 동일범의 소행에 의한 연쇄 범죄에는 몇 가지 공통된 패턴이 존재한다.
범인과 피해자들 간의 원한 관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공통된 이름이나 어떤 물건의 존재가 나오거나, 범인의 특정 행동이나 습관에 의해 생겨난 결과로 비슷한 흔적이 남는 등, 비슷한 사건의 유형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발견할 수 있는 단서들은 늘어나고, 범인의 특정 또한 하기 쉬워진다.
하지만 무조건 동일한 유형의 피해자가 많아질수록 늘어나는 것은 좋은 것들만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는 아직도 사건의 해결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수사지휘권을 잡고 있는 아르티아를 무능하다고 헐뜯는 궁정회의에서의 귀족들의 존재가 그러했다.
“X발, 진짜 환장하겠네….”
어젯밤 기사단원들의 탐문수사와 습격당한 귀족들의 상태의 경과를 분석한 의사들의 소견서 등을 정리하여 단장인 리오드에게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던 카인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며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조사했던 많은 보고서들을 정리하여 옮겨 적고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내용은 ‘조사에서 추가적인 정보는 발견되지 않음.’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런 것으로단장인 리오드가 자신을 포함한 부하단원들을 뭐라고 쪼아댈 일은 없겠지만 수사에 진척이 없다는 것은 아르티아가 무능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 되며, 다음 있을 궁정회의에서 자신들의 수장이 또다시 그 수모를 겪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아, 진짜 악마면 어떡하냐….”
리오드가 입에 담았던 가능성을 입에 담으며 카인은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카인 또한 20년 전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젊은 세대 중의 한 명이었기에, 악마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잘실감하지 못한다.
차라리 범인이 인간이라면 잡는데 힘들기는 해도 걱정이 들지는 않는다.
악마라는 미지의 존재를 상대해야하는 상황 자체를 경험해보기는커녕 상상해본 적도 없었기에 막연한 느낌만이 존재했다.
“후우, 일단은 보고해야지.”
작성을 마친 카인은 보고서를 들고 단장실을 방문했다.
두 번의 노크와 함께 방으로 들어간 카인은 리오드에게 경례를 한 뒤 단장실에 리오드 혼자가 아닌, 한 명이 더 있는 것을 보았다.
“으엥?”
은색 머리카락과 적색의 눈동자를 가진 남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아, 안녕하세요.”
“아, 예….”
미소 지으며 자신에게 인사를 건 내는 남자를 보고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인사를 받았다.
‘아니, 저 양반이 여기는 또 왜 왔지?’
카인은 은현을 한 번 본적이 있었기에 그가 리오드와 친구라는 관계라는 것 자체는 알고 있었다.
나이는 어떻게 먹지 않은 건지 20대 초반의 남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서로를 허물없이 대하는 모습이나 은현의 검술 실력,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연륜을 보여주는 것이 절대로 범상치 않은 남자였다.
“어쩌다 보니 친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게 인사를 나누던 도중, 급하게 방문을 열고 단원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다, 단장님! 어?”
잔뜩 동요한 표정으로 단장실 안에 뛰어든 단원은 처음 단장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카인이 지었던 벙 찐 표정을 지으며 은현을 바라보았다.
“아니, 저분이 왜 여기 있습니까?”
“야, 내 얼굴 왜 이렇게 많이 팔려있냐. 난 저분하고 대화를 해본 적도 없는데.”
“흥, 그걸 내가 어떻게 안다는 거냐.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코웃음 치며 대꾸하는 리오드의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은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본다.
“아, 큰일 났습니다. 단장님! 네 번째 피해자가 발생 나왔어요!”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단원이 던진 폭탄과도 같은 소식을 접한단장실 안에 있던 세 사람의 인상이 단번에 찡그려졌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항상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며 은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참 부지런하기 도 하지.”
◆ ◆ ◆
“이전의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체에 마나가 한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리오드와 동행한 은현은 피해자의 저택 침실에서 안정을 취하기 위해 누워있는 귀족 피해자를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어, 그런데 이쪽은…?”
피해자의 상태를 설명했던 의사가스리슬쩍 리오드와 카인과 함께 동행안 은현의 신분에 대해서 물어본다.
검이나 갑옷을 착용하지도 않고, 평민에 가까운 평상복을 입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아도 기사단의 소속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일행입니다. 신분에 대해서는 저희가 보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렇다면야 뭐….”
수사권을 가지고 있는 아르티아의 기사단장이 정중한 태도로 보증한다는 인간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냐고 생각을 하면서도, 의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였다.
하지만 굳이 기사단장이 이렇게 사건을 직접 살피러 올 줄은 몰랐고, 그가 동행한 정체불명의 남자가 있었기에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외상이나 공격을받았던 흔적은 없었습니까?”
“예. 깨끗했습니다. 어딘가에 부딪친 상처 하나도 없었어요.”
말라비틀어진 살가죽과 뼈마디가 보이는 앙상한 외모, 움푹 패여 들어간 피해자의 양 볼 제대로 힘들게 몰아쉬는 호흡도 매우 불규칙적이다.
피해자의 상태는 마치 영양분을 모두 빨린 식물과도 같았다.
갑작스레 은현이 피해자에게 다가서더니, 피해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이, 이보시오? 지금 무슨….”
자신의 환자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의사가 급하게 은현을 말리려고 나섰다.
그 행동을 리오드에게 제지당하자, 의사는 영문을 몰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은현은 손으로 피해자의 감겨있는 눈을 벌렸고, 풀려있는 동공과 피해자의 눈동자 속에서 마법의 힘을 감지하고 손을 뗐다.
“맞아. 최면 마법.”
“최, 최면…?”
의사는 은현의 말에 당황하며 반문했다.
은현은 그런 의사를 흘끗 보고는 작게 끄덕인 뒤, 리오드를 보며 설명을 재개했다.
“체내에 있어야할 마나가 모조리 사라졌는데, 눈동자 안에는 마나와 함께 마법의 흔적이 남아있어. 이건 자기 자신에게 건 마법이 아니라, 타인이 이 피해자에게 건 마법이야.”
“그동안 어째서 발견되지 않았던 거지?”
“그거야 애초에 최면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잖아. 인간들의 마법에는 타인의 정신을 조작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종류가 아예 존재하지 않아. 연구해본 적도 없었겠지.”
대전쟁 당시에는 이런 증상의 환자들은 모두 서큐버스에게 당했다고만 결론짓고 증상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도 진행되지 않았다.
그때는 한창 전쟁 중에 사람 하나라도 더 살려야했기에 의사들에게도이런 증상을 연구할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저, 정말로…악마의 소행이 맞단 말입니까…?”
이야기를 들은 의사가 안색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은현에게 물었다.
이제 와서는 이 이야기를 해주는 은색머리카락의 남자의 정체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의사로서 이 환자에 대한,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환자들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상태는 호전 될 수 있는 겁니까?”
“뭐, 말 그대로 몸속에 있는 마나만 모두 갈취해간 상태입니다. 몸이 저렇게 수척해진 것은 마나와 동시에 너무 많은 영양분을 빼앗긴 부작용이죠. 식사를 잘하시고 요양만 제대로 한다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겁니다. 아, 그래도 당분간은 위에 부담되는 고기나 기름진 음식은 피하시고, 소량의 스프로 가벼운 식사를 시작으로 조금씩 식사량을 늘려 가셔야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내 당장 다른 피해자들의 저택에도 들러서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죠!”
축 쳐져있던 의사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더니 급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수도 안에서 꽤나 실력 있는 궁정 내의로 알려져 있던 노년의 의사는 현재 피해자들이 계속 속출하고 있음에도, 환자들의 상태에 호전을 보이고 있지 않자 자신의 의사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비록 자신의 힘으로 찾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하더라도, 환자들의 상태가 호전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 매우 힘이 났던 모양이었다.
“연세도 있으신데, 아직도 기운이 펄펄하시네.”
그런 의사의 뒷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던 은현은 리오드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단서도 다 모았고, 범인의 목적도, 행동패턴도 어느 정도 예측이 되니까….”
“그렇군. 이제는 우리 쪽도 준비를 해야 할 차례군.”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