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054. 세대의 차이(3)
“흐음.”
은현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아브로스의 권유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이 나라의 귀족 자리에는 관심 없지만 공작님의 생각에는 흥미가 가네요. 어떤 의도로 말씀하시는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도움이 필요하신 거라면 제 능력이 닿는 선에서는 도와드릴 의향도 있습니다.”
평소의 은현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대사다.
은현은 항상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능동적인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요청받은 부탁을 조건을 정하고 대가를 치르는 방식으로 들어주는 수동적인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로스라는 인간에게 자신이 먼저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은 굉장히 뜻밖의 일이었다.
이런 은현의 행동의 변화에는 자신의 여신, 베르단디가 은현에게 걸었던 제약을 풀어준 것이 원인이었다.
지금의 은현은 정체를 숨기며 뒤에서 행동하는 이전과는 다른, 자신이 먼저 나서서 도움을 주겠다고 자처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그 생각의 변화의 첫걸음을 베르단디가 직접 보았다면, 분명 기쁜 표정을 지었으리라.
하지만 방식이 조금씩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은현의 행동원리 자체는 똑같았다.
‘사람들을 성장시키고 앞으로의 위협에 대비하라.’
오로지 여신이 내린 사명을 충실히 이행할 뿐이었다.
“너는 이전에 나에게 백금화 600닢이라는 거금을 선뜻 건 냈었지. 그러면서 그 자금을 어디에 사용하려는지 그 용도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혔어.”
“성검 듀란달의 복원….”
은현에게서 당시의 상황을 전해들은 리오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성검(聖劍)이란, 말 그대로 성스러운 검.
‘공허의 시대’의 악마족들과 인류의 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여파로 피폐해진 대륙을 재창조시킨 일곱 명의 여신들의 힘이 깃들어있는 검들이 바로 성검이다.
언젠가 또 다시 악마들이 모종의 방법을 통해서 아르케나 대륙으로 다시 등장할 것을 대비하여, 일곱 여신들은 각자가 자신의 힘을 담은 성검을 만들어내어 인간들에게 하사했고, 성검을 이용해서 인간들이 스스로 악마들의 위협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그 중 한 자루, ‘듀란달’은 페르니아스를 건국하고 왕국의 역사를 새로이 쓴 초대 국왕이 가지고 있었던 무기였다.
약 200년 전,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에 페르니아스의 당시 국왕이 당시의 아르미타스 가문에 듀란달을 하사하면서, 성검 듀란달은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의 가보가 되었다.
그 듀란달이 20년 전, 아르케나의 대전쟁에서 부러져버린 것이다.
“네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듀란달에 대한 정보를 들었는지는 묻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너의 그 의도니까. 너는 내가 복원시킨 듀란달을 2왕자에게 쥐어줌으로서, 초대 국왕의 무기인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왕세자로서 옹립시키려 했던 것을 알고 있었지. 맞나?”
이전 엘레노아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자, 은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브로스의 질문을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자신의 행동을 꿰고 있었는지는 매우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아브로스는 은현에게 그것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최소한 그의 그런 행동에는 악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르키스 대미궁에서의 일도 자식들에게서 들었지. 너의 그 행동과 사고방식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꺼림직 하기 짝이 없지만, 최소한 너의 의도는 왕국의 혼란을 막고 사람들을 구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 나라의 국민도 아니면서, 누구보다도 이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고 움직이며 위험을 염두 해두고 많은 사전 공작을 펼쳐둔다.
거기에 여신의 의지가 깃들어있는 사도의 임무라는 것을 아브로스는 몰랐지만.
은현이라는 남자는 아무도 모르게 페르니아스의 안정을 위해 가장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 나라는 점차 곪아 썩어갈 뿐이야.”
드르륵
“아버지.”
“알렉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한창 이야기 중에 덜컥 낡은 미닫이문이 열리더니 등장한 알렉스를 보며 세 남자가 모두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알렉스는 웃음을 지으며,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의자 하나에 자리를 잡고는 앉았다.
“저택으로 들어온 시종이 몬타스 와인을 꺼내고는 검은 마녀님의 저택으로 향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침 엘레노아도 그곳에 있고 하니, 저도 뒤늦게 발걸음을 옮겼죠. 도착했더니 세 분이 이렇게 술을 마시러 나갔다고 들어서 바로 이곳을 떠올렸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근위기사의 임무를 모두 마치고 퇴근했다면 조용히 저택에서 쉴 것이지.”
“아시지 않습니까. 요즘 수도 내부가 뒤숭숭한 것을. 그것을 걱정해서 엘레노아도 밤중에 저택으로 귀가시키지 않고 마녀님의 저택에 외박을 부탁한 것이 아닌가요?”
“흥.”
아브로스는 대꾸하지 않고 알렉스의 앞에 놓인 잔에 조용히 술을 따랐다.
“그런데 무슨 얘기 중이셨습니까?”
“이 자에게 귀족이 되어 볼 생각이 없냐고 권유했던 차였다.”
“오?”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가 은현을 바라보았다.
“꽤나 친해진 것 같군.”
“아니, 나는 저 시선이 엄청 부담스러운데. 뭐 한 것도 없는데 왜 저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야? 도대체?”
떨떠름한 표정을 짓은 은현을 보며 리오드가 피식 웃었다.
“당연히 거절했겠죠?”
고개를 끄덕이는 아브로스의 반응을 살피며 알렉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브로스는 오늘 궁정에서 있었던 회의의 내용을 은현에게 설명해주었다.
“악마…정말로 그런 존재가 수도 안에 잠입해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아직 가능성일 뿐이다. 직접 본 것도 아니니 정황만으로 뭐라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는 얘기지만…. 서큐버스라는 악마가 저렇게 활보하며 귀족들을 습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 건가요?”
알렉스의 질문에 은현이 입을 열었다.
“그것들이 이용하는 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최면술이야. 사람의 머릿속에 진짜와도 같은 꿈을 보여주고 인식을 조작하지. 이 최면술도 서큐버스들의 등급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힘의 범위도 다른데, 하급 서큐버스들은 그저 꿈을 통해서 환상을 보여는데 그치지만, 상급 서큐버스들이 거는 최면은 맹목적으로 자신을 따르도록 의지까지 조작할 수 있지. 아군 끼리를 서로죽고 죽이게 만드는 것도 가능해.”
상급 서큐버스의 최면 상태에 걸려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악마의 종으로 타락해버린다.
내리는 명령에 일절의 불만도 품지 않으며 아무런 의문도 느끼지 않는다.
설령 평생을 함께해온 동료와 같은 사이일지라도, 명령만 내린다면 자신의 가족이라도 죽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그들이 사용하는 ‘최면술’이었다.
“끔찍하군.”
은현의 설명을 들은 알렉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20년 전 전쟁 당시엔 그 정도로 강한 최면술을 사용하는 서큐버스는 만났던 적이 없었는데?”
“당연하죠. 20년 전에 제국을 뒤에서 조종했던 악마들은 이 대륙에서 자연스레 태어난 하급 악마들입니다. 그들이 악마 소환 의식을 통해서 불러내려던 게 아까 설명 드린 공허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상급 악마들이에요.”
“너는 어떻게 그 정보들을 알고 있는 거지?”
“언제 한 번 메르비스 도서관에 오시면 페르니아스 초대 국왕의 일대기에 대해 저술된 책을 대여해드리죠. 공허의 시대에 존재했던 상급 악마들에 대해서 어렴풋이 기술이 되어있습니다.”
공허의 시절, 멸망하기 이전의 지구의 시대부터 존재해왔다는 것을 밝힐 수 없던 은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서큐버스들을 상대하는 것 자체는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불가능한 건 아니야. 상급도 아니고 하급 몽마들은 간단한 정신조작 마법 정도 밖에 사용하지 못하니까. 세뇌에 대한 면역 대책만 가지고 있다면,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지.”
“그런데 왜 그렇게 아버지나 리오드님의 표정이 좋지 못하신 거지?”
“대처법을 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현재 단서나 존재조차 포착하고 있지 못하는상황이고, 그 악마들은 세뇌 마법만큼 위장 마법도 뛰어나거든. 작정하고 인간의 행세를 하고 다닌다면 그걸 찾을 방법도 없어. 물론 이것만이 원인이 아닌 것 같지만?”
은현은 흘끗 아브로스와 리오드를 바라보며 말끝을 의문형으로 던졌다.
“제일 한숨이 나오는 건 현재 귀족들의 대처 방법이다.”
“회의 결과가 썩 좋은 방향이 아니었나요?”
“결론은 가능성만을 염두 해두고 좀 더 확실한 단서를 찾으면 그때 다시 논하자는 것으로 회의를 마쳤지. 단지…정말로 악마가 수도 내에 잠입해 있다는 것이 확실시 되더라도, 그것을 공표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그건…어째서입니까?”
“밝혀져서 왕국의 이미지가 나빠지는 걸 우려하는 거야. 수도 안에 악마가 잠복해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누가 안심하고 그 장소에 있을 수 있겠어.”
사실이 공표되면 백성들은 불안감에 빠지고, 평생 일궈온 재산과 집을 버리고서라도 수도를 떠나자는 반응이 나올지도 모른다. 불안감으로 생긴 혼란은 치안에 영향을 주고, 소문을 접한 상인들은 수도를 찾아오지 않게 될지도 모르며, 악마가 잠입해있는 국가라는 것을 구실로 타국의 간섭을 받을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말도 안 되는 극단적이고 비약적인 상상에 불과했지만 이런 상상을 시작으로 불안감이 증폭된 귀족들은 진실을 감추는 것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어려운 문제군요.”
이야기를 들은 알렉스도 복잡한 얼굴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 의견에 중심의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이 악마라는 존재들을 접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의 귀족들이다. 악마라는 막연한 존재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게 원인이지. 자신들에게 올 수 있는 피해만을 우려하고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에는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아. 손해를 입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어하면서 해결에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책임만을 남에게 돌려버리지.”
악마가 수도 안에 잠입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면서 그 책임을 디아네 여왕의 존재를 거들먹거리며 이야기 했던 젊은 귀족들을 떠올리고는 아브로스와 알렉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다지 유익한 회의의 시간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고 짐작한 은현은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거 저한테 함부로 말씀하셔도 되는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궁정회의의 내용인데요. 전 그저 일반인입니다만.”
“하, 새삼스레 이제 와서 무슨 그런 서운한 말을.”
알렉스는 은현의 대답에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렸다.
은현이 알렉스의 이죽거림에 눈을 가늘게 잠시간 뜨고 노려본 뒤, 한숨을 쉬고는 아브로스에게 다시 묻는다.
“즉, 이런 겁니까? 악마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현재 젊은 세대의 귀족들에게는 위기의식이란 게 거의 없는 수준이고 위기 상황에 대해서 문제 해결의 의지도 보이지 않고 있고 책임감도 없으며 그저 나라에서 주는 봉급을 날로 먹고 있는 벌레 같은 존재들이라는 말씀이신가요?”
“표현은 너무 직설적이지만 정확하군.”
은현의 정리에 아브로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공작님의 가신으로서 귀족이 된 저는 공작님의 힘과 위세를 등에 업고 그런 귀족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뒤가 아닌, 앞에 나서서 이 나라를 받쳐줬으면 한다는 게 공작님의 바램이겠네요.”
“그렇다.”
“너무 많은 걸 바라시네요. 제가 그런 게 가능할 거라 보시는 겁니까?”
“적어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보는데.”
이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높게 사고 있다.
은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귀족 연쇄 습격 사건에 대해서는 저도 생각해본 바가 있습니다.”
“흐음?”
“저는 이 사건이 공작님이 걱정하시는 악마에 대한 젊은 귀족들의 위기의식도 심어드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며 은현은 미소를 지었다.
아브로스는 습관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마치 뱀이 자신의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은 무언가 흉계를 꾸밀 때 짓던 꺼림직 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리오드.”
“뭐지?”
“피해자는 귀족들 안에 한해서 발생한 거야?”
“현재로선 그렇다. 적어도 평민들 중에서 비슷한 증상을 보인 환자가 있다는 보고도 신고도 받지 못했다.”
“아까 얘기했던 피해자라던 귀족들 말이야. 왠지 이름이 귀에 익숙한데 말이지.”
“익숙하다고?”
“예전에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에린을 데리고 옷가게에 한 번 간적이 있었는데 말이야. 거기에서 어떤 귀족이 하는 짓이 가관이더라고. 자기 딸한테 고급원단으로 만들어진 비싼 옷을 입히면서 ‘고귀한 신분인 귀족에게 옷을 진상하는 건 낮은 신분의 평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는 신박한 논리를 펼치면서 값비싼 보석까지 하나 갈취해 가더라.”
있는 것들이 더하더라니 라는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양심이 출타해서 공중분해라도 된 것 같은 인성의 소유자였다.
“최소한 금화 3닢 정도는 되는 가격이었는데, 하는 짓거리가 아주 한 두 번이 아닌 것 같더라고. 근데 이번 피해자 중에 그 진상보다 못한 쓰레기 귀족의 이름이 들어가 있네?”
“뭐?”
“혹시 최근에 말이야. 다른 두 피해자들도 이것과 비슷한 트러블이나 사건사고가 있던 적이 있었나?”
“…하나는 아이테르에 다니는 피해자의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평민 하나를 가혹하게 구타를 했던 사건이 있었지만, 재판에서 벌금형을 선고 받았던 사건이 있었지. 하지만 또 다른 한 명은….”
“베르만 자작. 레니온 헤르샤 전 준남작의 배임횡령을 눈감아주었던 그의상사지.”
은현의 말에 세 사람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은현을 바라보았다.
화제를 던지자마자 은현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사건에 대한 단서들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범인이 인간인지, 악마인지에 대해서는 둘째 치고, 정말 의외롭게도 의적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더라. 그게 정말 선의인지, 선의를 가장한 악의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지만.”
“넌 처음부터 이 사건의 공통점에 대해 알고 있었나?”
“뭐 대강은. 네가 물어보면 알려줄 생각이긴 했지만.”
리오드는 웬만해서는 은현에게 의지하는 것을 크게 선호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친구에게 부탁하여 의지를 하는 것이 그렇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은현 쪽에서 먼저 정보를 제시하는 의외의 행동을 보여 왔다.
그것은 은현 쪽에서 뭔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있고,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뜻이라는 걸 리오드 또한 눈치 채고 있었다.
친구이자, 은인이나 다름없는 은현을 돕는 것은 리오드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도와야 할 것이 있나?”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은현은 아직까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르미타스 공작가의 부자에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 전 말이죠. 이 왕국의 귀족의 안위 따위엔 관심이 없습니다. 공작님이나 리오드 같은 귀족이라면 몰라도, 저런 같잖은 의적행세를 하는 자의 표적이 될 정도로 쓰레기 짓을 해왔던 자라면 더더욱 도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중심에 서있는 귀족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찬성하는 바입니다.”
“…….”
“제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동참하시겠습니까?”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두려움과 이상함, 혼란스러운 감정이 뒤섞인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감정들을 짓누르는 강력한 호기심.
최소한 이 남자는 방식은 뒤틀려 있다 하더라도, 항상 이 나라를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를 막는 것보다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는 욕구가 더더욱 강렬했다.
뱀 같은 또 하나의 흉계를 꾸미는 모사꾼의 유혹에 아브로스는 침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