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053. 세대의 차이(2)
“하아…좋다아….”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욕탕에 몸을 담근 에린은 오늘도 쌓였던 몸의 노곤함이 싹 풀리는 기분 좋은 감각을 즐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넓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욕실에 들어온 엘레노아는 예상외로 넓은 욕실의 내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이가 만들었데요.”
“그 사람이?”
“네. 현이의 고향에서는 엄청 큰 목욕탕이 있었고 적은요금을 내고 평민들이 공동으로 시설을 이용하는 풍습이 있다고 그랬어요. ‘공중목욕탕’이라고 하던데.”
“설마 너도 그 사람과 함께 목욕을…?”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남녀 구분이 되어있는 탕이라고 그랬어요!”
얼굴이 새빨개진 에린이 황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엘레노아의 말을 부정했다.
처음과 시작이 좋지 못한 인연이었지만, 엘레노아의 사과를 시작으로 에린과 엘레노아는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은현이 유리아 왕녀와 알렉스의 구조 요청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매일 엘레노아를 호출하여 에린의 수련에 도움을 주도록 요구한 이유는 에린과 엘레노아가 서로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게 쌓인 오해와 묵은 감정들을 풀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자연스레 풀어진 둘의 관계에서 엘레노아는 에린을 어느 정도 편하게 대할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너는 안 힘들어? 이렇게 훈련 받는 거?”
“네? 으음….”
엘레노아는 에린이 은현에게 처음 검술 교육을 받게 되는 순간부터 항상 그 자리를 함께했다.
처음에는 에린이 연약하고 가녀린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가혹했던 은현의 구타에 에린이 헛구역질을 하고 온몸에 드는 멍을 볼 때마다 경악했고 안쓰러운 감정을 품었다.
이를 악물고 꿋꿋이 버텨내며 조금씩 성장하는 에린을 볼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은현이 어째서 에린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며 강하게 키우려는 건지제대로 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사제라는 직업을 가진 엘레노아도 원정을 통해서 전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본 적은 있었지만, 에린처럼 구타에 가까운 폭력을 동반한 교육을 받고 원정에 나갔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받았던 교육은 오로지 사제로서 배워야할 소양과 신성마법, 그리고 신을 향한 경건한 마음가짐이었다.
같은 여자였기 때문에 엘레노아는 어째서 에린 같은 불행한 경험을 하고 힘도 없는 가녀린 소녀가 이렇게까지 독한 훈련을 꿋꿋이 참아내고 무엇을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히 힘들죠. 처음 체력훈련을 받았을 때는 ‘아, 진짜로 죽겠구나.’ 싶었던 적도 있었다니까요.”
교육 초반 당시, 은현의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았을 때를떠올린 에린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소름이 돋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공녀님. 저 말이죠. 꽤나 거칠게 살아서 그런지 다른 사람의 눈치 엄청 봐요. 주목받는 것도 거북하고요.”
언제나 에린에게 다가오는 이들은 에린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비웃고음흉하게 짓는 그 시선들을 마주하는 게 싫어서, 에린은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니며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많이 시달렸던 만큼 타인의 시선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현이가 저를 쳐다보는 건 싫지 않더라고요.”
자신에 대해 아무런 흑심도 품지 않았기 때문에, 흑심은커녕 하나라도 더 챙겨주기 위해 행했던 은현의 많은 행동들에는 모두 에린을 배려하기 위한 의도들이 섞여있었다.
“훈련할 때만 마치 악마라도 된 것처럼 굴리지. 다를 때는 엄청 잘해줘요. 꼬박꼬박 챙겨주는 밥도 엄청 맛있고, 매일 학교 데려다주고, 데리러 와주고. 저한테 이렇게 관심을 쏟아주고 정성스럽게 하루 종일 붙어서 관리해주는데. 어떻게 힘들다고, 하기 싫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정말로 에린이 그만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은현은 당연히 당장 훈련을 중지할 것이다.
에린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은현이 짜준 훈련을 견뎌내는 이유는 하나였다.
-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날 믿고 따라와. 너에게 내가 길을 만들어 줄게.
자신에게 길을 만들어주겠다는 그 한마디가 너무나도 기뻤으니까.
지금의 에린의 마음속은 은현이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은현에 대한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 소녀가 품고 있는 특별한 감정을 어렴풋이눈치 챈 엘레노아는 쓰게 웃으며 생각했다.
‘이건 중증이네….’
과연 그 마음이 무엇일지,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맞을지 엘레노아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 ◆ ◆
“니가 아주 막나가는 구나?”
일리아나는 싸늘한 눈초리로 자신의 앞에 서있는 한 남자를 향해 서슴지 않고 독설을 내뱉었다.
“내 집이 만남의 광장이야? 현이도 요즘 다짜고짜 훈련이랍시고 매일 회복셔틀 하나를 들이더니, 너까지 혹 하나를 달고 와? 이것들이 예의라는 말의 개념을 상실했니? 아주 내가 만만하지?”
“그 훈련에 어울려주는 사람이 아마 내 딸일 것이라고 생각되오. 지난 번 은혜를 입은 것도 있어 그 남자에게 인사차 방문을 했소. 물론 빈손으로 온 것도 아니네만.”
뒤따라온 시종에게 아브로스가 눈짓을 주자 시종이 앞으로 나서며 손에 들고 있던 와인병 하나를 일리아나에게 내밀었다.
“…….”
“몬타스 와인이오. 내 영지인 공작령에서 재배하는 과일로 만든 것이네만. 부디 입에 맞았으면 좋겠소. 이건 그 남자와 마녀에게 보내는 감사의 의미요.”
일리아나는 무엇에 대한 감사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엘레노아가 은현의 존재를 헬레나 후비에게 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헬레나 후비와 은현을 중재해준 사람은 양쪽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일리아나였다.
사실상 일리아나 또한아들인 알렉스를 구하는 것에 간접적으로나마 일조한 셈.
“흥, 뭐, 들어오세요. 가면서 따님 분을 데려가면 되겠네.”
정중한아브로스의 인사를 대강 받아들이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였지만, 아브로스는 개의치 않았다.
일리아나는 현재 왕국의수도인 페르닌에 적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왕국의 국민은 아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조용히 은거를 원했던 그녀를 페르닌에 억지로 붙잡아두고 많은 편의를 봐주면서 특혜의 혜택을 부여하면서까지 붙잡아두고 있는 것이 왕국의 귀족들이 입을 모아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륙에 열 명 밖에 없다는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인 ‘검은 마녀’라는 이름의 가치는 그저 수도에 있어주는 것 만 으로도 어마어마한 효과를 불러 모은다.
일부 귀족들 중에는 도도한 태도를 유지하는 일리아나의 태도가 건방지기 짝이 없다고 불평을 해대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을 대놓고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심기를 거스르게 되어 일리아나가 다른 나라로 가버리거나 하는 등의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왕국의 입장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며 진행했던 국가사업들도중단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일리아나와 관련된 문제나 그녀의 영역만큼은 거의 ‘치외법권’의 대우를 받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더더욱 놀라운 점이었다는 것은.
“그자가 마녀의 연인이었다니.”
갑작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경비를 뚫고 공작가의 저택에 유유히 침입해온 은현이 대영웅의 동료이자, 연인이었다는 점이리라.
마녀에게 짝이 있다는 사실은듣도 보도 못했지만, 애초부터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은밀한 행동을 위주로 움직이고 있는 은현이 자신과 일리아나와의 관계를 세상에 밝혔을 리도 없다.
“음…?”
한창부엌에서 요리를 하던 은현은 익숙한 실루엣에 고개를 돌렸고 집에 의외의 손님이 왔다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오드가 찾아온 것 자체는 그렇다고 쳐도, 그를 따라온 아브로스는 더더욱 의외의 인물이었다.
“바쁜 것 같군.”
“아, 예. 뭐 그렇긴 합니다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대강 고개를 끄덕인 은현은 요리를 마친 음식들을 접시에 담고 테이블에 세팅했다.
“갑작스러운 손님에게 대접해드릴 만한 음식이 없는 게 송구스럽네요.”
“상관없다. 너와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 왔다.”
“흐음. 여기보다는 밖에서 이야기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일리아나, 에린 나오면 밥 좀 먹여줘.”
“난 애 엄마가 아니야. 알아서 먹겠지.”
“엘레노아 공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룻밤만 재워줄 수 있겠소?”
“내 집은 여관도 아니랍니다. 게다가 다 큰 처자를 남의 집에서 재운다니,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네요?”
“마녀의 집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소. 이 남자도 이 집에 산다는 것이 신경 쓰이지만, 그대의 연인인 이 남자가 내 딸에게 손을 댈 리도 없잖소. 게다가 여자만 사는 집에 적어도 지켜줄 수 있는 남자 하나는 필요하지.”
“하, 웃겨. 누가 누구를 지켜요?”
일리아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아브로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다 차리자마자 아브로스와 리오드를 따라 집을 나섰다.
“그릇은 모아만 놔. 내가 들어와서 설거지 할게.”
“알았으니까 빨리 가기나 해.”
자기 집에 사람이 북적거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일리아나는 손사래를 치며 은현을 내쫓듯이 말했다.
잔소리를 늘어놓는 살림꾼의 말이 일리아나의 입장에서는 귀찮기 그지없었다.
식객으로 에린 하나가 추가된 것에는 크게 불만을 품지 않았지만, 엘레노아가 일리아나의 집을 드나들게 되고, 가끔 알렉스까지 추가가 되면서 조금씩 불만이 쌓이고 있던 그녀였다.
“들어가면서 야식이라도 하나 사갈까.”
“누가 보면, 부부라도 되는 줄 알겠군.”
“아, 음…사실 조만간…그 생각을 가지고 있긴 해.”
“…그 말은?”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 그런데 일리아나는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비밀로 해줘.”
“흥, 알았다.”
리오드는 은현의 계획에 재미있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는 언제지?”
“아니, 생각만 가지고…내 문제가 정리되면 그때 의사를 전달하려고.”
“네 문제?”
“응. 내 문제.”
은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묻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짓는 은현의 얼굴을 보고, 리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문제라는 것은…아직 결심을 내리지못한 것이냐?]
‘좀…그렇죠.’
[…이제는 아이의 의지를 존중하겠다고 내가 허락해주었지 않느냐.]
‘그렇다고는 해도, 갑자기 그 생각의 방식을 바꾸는 건 불가능해요. 저는 400년을 넘게 이런 식으로 살아왔으니까. 좀…마음의 정리를 하고결심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이제 와서 일리아나와 연인이 된 것을 후회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단지 많은 시간을 살면서 그의 마음과 기억 속에 축적된 경험과 감정들은 자신의 여신이 제약을 풀어주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그런 간편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풀어내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많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였다.
이 문제들을 모두 풀어내고, 정리한 끝에, 은현은 자신의 결심을 일리아나에게 보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은현의 마음속의 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받아들인 베르단디는 조용히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기특하구나. 후후.]
‘감사해요.’
[그러면 잠깐 신계에 올라가봐야 해서, 당분간 아이의 곁에 있어주지 못할 것 같구나.]
‘큰일인가요?’
[아니다. 전에 그 왕녀라는 전생자에 관련된 일이다.]
‘아.’
[구체적으로 누가 벌인 일인지. 무슨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고 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후후, 조심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그래도 고맙구나. 빨리 갔다 오도록 하마.]
베르단디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지더니, 아예 모습을 감춰버렸다.
“무슨 일이지?”
“아니, 아무것도.”
다른 이들의 눈에는 은현이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는 것처럼보이고 있었기에, 리오드가 은현에게 물었지만, 은현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낡아 보이는 간판과 내부가 허름한 술집이었다.
“공작님의 취향이 신분과 맞지 않는 특이한 취향이시군요.”
“공적인 자리가 아닌 개인적으로 용무가 있거나 피곤한 일이 있을 때 찾는 곳이다. 내부는 이래도 음식의 맛만큼은 보장하지.”
“기대되네요.”
허름한 내부 안은 확실히 음식의 실력이 좋다는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해주듯이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한 분위기 안에서 식사와 술을 먹고 있었다.
아브로스는 왕국의 2인자라는 신분에 맞지 않게 허름한 가게의 단골이라는 것이 맞는 듯 그의얼굴을 알아본 여자 점원이 곧바로 익숙하게 내부 안쪽에 마련된 방으로 안내를 했다.
자리에 앉고 항상 먹던 것을 주문하자 점원이 간단한 안주와 술을 가져와 테이블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세팅이 끝나고 아브로스가 자신, 리오드, 은현의 순서대로 각자의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서 용건이 뭔가요?”
은현은 아브로스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일단 딸의 요청을 받아 아들을 구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공작이라는 신분을 가지신 분이 쉽게 머리를 숙이시면 안 되죠. 감사는 받겠습니다만.”
말을 마침과 함께 고개를 숙이려던 아브로스의 행동을 은현이 제지했다.
“혹시 이번 습격사건 때문에 이 녀석을 찾은 것이십니까?”
“아니, 그것 뿐 만이 아니다.”
리오드의 질문에 아브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중한 눈으로 은현의 얼굴을 응시하던 그는 이미 어느 정도 결심을 굳힌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은현. 혹시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이 되어볼 생각이 있나?”
그의 말을 들은 은현의 눈빛에도 이채가 서렸다.
“이대로 가다간 이 나라는 망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당혹스러움과 함께 미간을 좁히고 있던 리오드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한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아브로스, 그리고 뜬금없는 제안에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이 아브로스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아브로스 권유를 시작으로 세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맴돌기 시작했다.